영등포의 두 얼굴

‘가슴을 파고드는 추억어린 영등포의 밤♬∼

영원 속에 스쳐 오던 사랑의 불꽃♪~

흐르는 불빛 속에 아련한 그대의 모습♩~

아~~ 영원히 잊지 못할 영등포의 밤이여♪~♬’

80년대 구성지게 부르던 가요 오기택의 ‘영등포의 밤’ 가사 2절이다. 오늘은 아들들과 저녁 식사를 같이하기 위해 영등포 신세계 백화점 앞에서 아내를 기다리며 어지러운 불빛을 헤치며 걸어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문득 이 노래가 입안에 뱅뱅 돌며, 내 어릴 적 영등포가 추억된다. 나는 출생지, 즉 고향은 충북이나 서너 살 때 온 가족이 이주하여 대부분 이 영등포 땅에 발을 뻗고 뿌리 내려 근 60여 년 가까이 살아왔으며 본적도 신길동이니 이곳은 나의 고향이나 마찬가지다.

전쟁이 끝나고 아직 사회가 안정적이지 못 할 때 우리 가족이 처음 정착한 신풍동(신길5동의 옛 지명)은 판자촌에 공동묘지였었다. 농어촌에서 살다 살다 지쳐서 서울로 올라온 이주민들은 그곳에 무허가로 흙벽돌을 찍어 벽을 두르고 천막을 구해다 지붕을 가리고 살았었다. 우리는 공동묘지 사이를 뛰어다니며 연을 날렸고 동내 형들은 염소를 길러 고학을 하였다. 오늘같이 가을비가 조곤조곤 내리다 사위어 가고 어둠이 슬며시 깔리는 저녁이면 나의 텃밭 영등포의 유년이 떠오르는 것을 보면 영등포는 내 고향이다. 맞다 내 고향. 아직도 나는 그 텃밭에서 삶의 각질들을 하나하나 털어내며 사는 것이다.

다른 나라의 유명 도시들도 대로변의 호화로움에 비해 골목 뒤편의 슬럼이 공존하는 거리가 종종 있지만, 영등포는 서울의 다른 구와 다르게 야누스의 얼굴을 하고 있다. 푸른 지붕이 고풍스럽게 여의도 하류에 버티고 선 국회의사당에 전국 곳곳의 수다쟁이들이 모여 설전의 침이 샛강에 떨어지고, 각양각색의 목소리를 전파에 실어서 쏘아대는 사람들이 모이고 나름 상류로 분류되는 사람들이 사는 빛나는 모래밭 여의도와 달리 그 외 다른 동네는 아직도 슬럼을 면치 못하고 있다. 영등포는 원래 고단한 사람들이 모여 살던 서민의 마을이었다.

내가 전역하고 직장을 얻은 지 몇 해가 지난 서른 즈음의 어느 겨울이었다. 직장 친구들 네 명이 역 앞 오른쪽 골목에서 거나하게 술을 마시고 불콰한 얼굴로 왜 갔는지 모르지만 역 오른쪽 건너인 속칭 ‘홍등가’로 건너갔다.

그곳에는 겨울 추위에도 불구하고 길 양쪽으로 하얗게 분칠하고 꽃단장한 아가씨들이 아슬아슬한 스커트와 젖가슴 돋보이는 블라우스를 입고 죽 나래비 서서 마치 어미 새가 물어 온 먹이를 차지하려는 제비 새끼들처럼 지저귀며 호객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장난기가 발동한 한 친구가 손짓하며 “야! 너희들 이리 와봐.” 했더니, 마치 무심코 발 디딘 갯벌의 칠게처럼 일사불란하게 일제히 가게로 들어가 버리고, 등화관제 민방위 훈련하듯 일제히 불을 꺼 버리는 것이었다. 우리는 오히려 당황해서 서로의 얼굴만 바라봤다. 하지만 그 이유를 알아내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우리는 실소를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아가씨를 불렀던 그 친구의 행색이 짧게 자른 단정한 머리에 영화 콜롬보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베이지색 바바리코트를 걸쳤으니 영락없는 형사였다. 우리는 그녀들 눈에 모두 단속 나온 형사가 되어 있었다. 껄껄 웃으며 그곳을 되돌아 나왔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는 참 못된 친구들이었다. 적어도 그녀들의 영업 방해를 하고 만 것이었다.

비가 오면 비 포장된 도로는 진창이 되어 ‘진등포’, 바람 불면 황토먼지가 오로라처럼 피어올라서 ‘먼지포’라고 부르던 시절에는 문래동과 지금의 타임스퀘어 자리에는 방림방적과 경방(구 경성방직)이라는 꽤 큰 방직공장이 있었다. 그 시절 시골에서 올라온 예쁜 누나들이 방을 얻어 두세 명씩 자취하며 열악한 공장에서 돈을 벌어 고향의 동생들 학비와 부모님 생활비를 부쳤었다. 동네 어른들도 거의 노동과 행상으로 자식을 키우며 지난한 세월을 겪어 왔다. 우리 집에도 두 누나가 자취를 하고 있었는데, 어린 나는 꽁딱 거리는 가슴으로 출근하는 누나들의 예쁜 뒷모습을 훔쳐보곤 했었다. 그 시절에는 사는 게 너무도 버거워 아버지들은 그 고단을 술기운으로 달래다 품삯을 탕진하고 미안한 마음에 되레 집 식구들을 닦달하다 늦은 밤이면 이집 저집에서 부부가 싸우는 날카로운 소리가 야트막한 담을 넘기 일쑤였다.

그러다 군 비행장과 땅콩밭이었던 모래섬 여의도가 개발되고 방귀깨나 뀌는 사람들이 터를 잡으면서, 마치 원주민인 아메리카 인디언을 내몰고 관리하며 자신들 법의 잣대를 들이대는 대서양 건너온 백인들처럼 사상누각(砂上樓閣)이 아닌 그들의 사상누각(思想樓閣)을 세우고 목청을 높이고 있는 것이 우리 영등포구이다.

나는 이 시점에서 곰곰이 생각해 본다. ‘우리 구의 빈민과 부민을 법의 상징 정의의 여신 디케(Dike)가 들고 있는 공평 저울 천칭 양쪽에 올려놓으면 어느 쪽으로 기울까?’ 우리 구의 부촌이라고 할 수 있는 여의도의 인구는 약 3만 4천 명 된다고 하니까 영등포 전 주민 약 37만 명의 10% 정도밖에 안 되고 거기에 다른 동의 부유층을 합친다고 해도 70% 이상이 서민과 쪽방촌, 빨간전등촌, 노숙인, 다문화 가정이 주를 이루는 영등포는 아무래도 작고 힘없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고단한 사람들의 천칭 쪽으로 기울 것이다. 하지만 소수의 천칭이 묵직이 내려가는 게 현실이다. 옛날에 누나들이 땀 흘리던 일터를 허물고, 프랑스의 샹보르성처럼 웅장하게 들어선 타임스퀘어도 튼튼하고 빛나는 근육질 어깨를 세우고 낡고 초라한 우리 붉은 집들을 빨리 손 털고 떠나라고 윽박지르고 있지 않은가? ‘우리 아이들 교육에 좋지 않다.’ 또는 ‘지역 발전을 저해하고 보기 좋지 않다.’라는 굴레를 씌우고 몰아붙인다. 버티다 지쳤는지 며칠 전 돌아보았더니 홍등가는 붉은 불을 모두 끄고 조용히 누워서 숨 고르기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사람이고 인격체며 우리 구민이다. 또한, 역 서쪽 토마스의 집에 끼니때마다 몰려드는 저 ‘길거리 잠’ 인생들은 또 어이할꼬?

비구름 벗어지는

영등포역 광장 곁에

날개 떨어진 깔따구같이

노숙자들이 어지러이 몰려있는

작은 집이 있다

그곳엔

뽀얀 손들이 내신성적을

주워 담을 뿐

키 작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숭고한 사랑은 희미하고

처마 밑에는

몸통을 땡강 잘리어

주둥이만 남겨진

북어대가리 같은 인생들이

밥그릇을

겨냥하고 있다

<최평균 ‘영등포의 정오’ 전문>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문화 결혼 이주자, 중국 교포들 같은 고단한 삶들이 지금도 이 영등포로 몰려드는 걸 보면, 이곳은 아직도 없는 사람들이 살만한 땅 기운을 가지고 있는 사람 살기 좋은 지역이다. 아내가 저만치서 손을 흔들며 사랑스러운 마음을 먼저 내게 보내온다. 사람들은 연신 역에서 시장으로 시장에서 타임스퀘어로 발길을 옮긴다. 참 부지런한 사람들이다. 현실이 어렵더라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격려의 박수로 작은 힘을 보태며, 잠시 더듬어 봐도 영등포는 아직도 사람냄새가 구수한 살기 좋은 고장이라고 자위하며 눈가에 어설픈 웃음을 그리며 아내를 맞는다.

지금도 영등포의 정문인 영등포역 앞에는 빛과 그림자가 뚜렷이 공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