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춰버린 앨범 속의 시간

올해도 서리가 내리고 산천의 단풍이 삶아 놓은 킹크랩처럼 곱고 붉게 물든 걸 보니 한 해를 마무리할 때가 다가왔음을 느끼게 한다. 여름내 창문을 열어놓고 살던 테라스를 며칠 전부터 쌀쌀한 가을 날씨에 닫아걸면서 어수선한 서재 책장을 정리하다 지난 주말에는 구석에 처박혀 있던 앨범을 꺼내어 내친김에 정리를 하였다. 사진 속의 지난 세월은 우리 부부와 아이들의 기억들이 빼곡히 들어앉아 있었다. 들로 산으로 호수와 강을 가리지 않고 많이도 돌아다녔다. 아내의 말로는 국내 웬만한 곳은 다 가본 것 같다고 한다.

앨범에 갈무리한 사진도 많지만, 앨범이 모자라 종이상자에 보관된 사진들도 꽤 많다. 내친김에 근처 상점에서 두 권의 앨범을 사들여 정리에 들어갔다. 요즘 지인 자녀들 결혼식에 가 보면 신랑 신부의 어린 시절 사진을 추려서 슬라이드 영상으로 제작해서 보여주던데, 아무래도 혼기가 찬 아이들을 위해 미리 정리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더군다나 향후 며느릿감이 집에 오면 짝지의 어린 시절 사진이라고 종이 상자에 들어 있는 것을 내놓기는 다소 민망도 할 터이다.

이참에 사진은 언제 누가 발명했는가 검색해 보니 200년이 조금 모자라는 19세기 프랑스 발명가 조셉 니세포르 니엡스(Joseph Nicephore Niepce)와 영국의 헨리 폭스 톨벗(Henry Fox Talbot)의 발명을 기반으로 지금과 같은 형태의 ‘빛에 반응하는 물질에 의해 만들어진 원본’이 만들어져 대량의 사진이 제작되었다고 한다. 내친김에 우리나라 사진의 역사도 들추어 봤는데, 그 내용이 참으로 흥미롭다. 문헌상 1884년 서화가인 지운영(池運英)이란 분이 일본에서 사진술을 배워 종로의 마동(麻洞)이란 곳에 사진관을 차렸다는데, 이 분이 바로 종두를 개발한 지석영의 형으로 김옥균을 암살하라는 명성황후파의 밀명을 받고 일본에 건너갔다가 사전에 경찰에 들통이 나서 체포되고 실패하여 조선으로 송환된 후 원악지(遠惡地: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살기 어려운 장소)로 유배되어 귀양살이하면서 사진관도 문을 닫았다고 한다. 그는 내가 자주 등반하는 관악산 삼막사에서 1912년 환갑을 기해 은거 생활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디지털카메라도 스마트폰에 밀려나서 힘을 못 쓰고 있지만, 예전에는 필름을 넣어서 촬영하는 카메라가 대부분이었고 즉석 사진이 찍혀 나오는 폴라로이드(Polaroid) 즉석카메라나 일회용 카메라가 주를 이루었었다. 우리 가족을 20여 년 가까이 촬영해준 예전의 카메라는 내가 전역하고 결혼하기 전 80년대 초에 여동생이 매달 2만 원씩 준 용돈을 함부로 쓰기 아까워 24개월 할부로 장만한 ‘미놀타’ 카메라였었는데, 그 카메라로 찍은 사진들은 하단에 촬영 년, 월, 일이 표기됐다. (그러나 2000년 이후는 년도 표식은 안 되고 월, 일만 표기되었다) 그 당시 다소 저가의 미놀타, 올림푸스와 함께 고급 카메라는 니콘이나 케논, 펜탁스 등의 카메라가 있었으며, 사진기가 귀하던 시대라 사진관에서 대여도 해 줬었고, 필름은 후지필름과 코닥 필름이 쌍벽을 이루고 주로 판매, 사용되었었다.

사진의 종류에는 순수사진(예술 사진), 보도 사진(다큐멘터리 사진), 광고 사진(상업 사진)으로 분류한다지만 나의 일반적 사진의 분류는 증명사진, 명함판 사진, 반명함판 사진, 여권 사진이나 가족사진, 돌 백일 또는 회갑 기념사진, 여행 사진과 요즘 유행하는 결혼사진이 있으며 작가들의 예술성 있는 작품사진 등 다양하다. 또한, 디지털 사진과 달리 필름 사진은 흑백사진과 컬러사진이 있고 영화나 슬라이드 사진도 있겠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인 1970년대 초에 흑백사진 일색이던 우리나라에 컬러 필름이 막 들어왔었나 보다. 고교 2학년 가을에 우리 학교는 설악산으로 수학여행을 갔었다. 그때 단풍으로 곱게 채색된 설악산에서 다른 아이들은 모두 흑백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내 짝꿍이 그때는 상당히 귀하고 비싼 컬러필름을 구매해서 나와 친구는 담임선생님과 함께 주로 컬러사진을 찍었고, 흑백사진은 사양하며 겨우 두어 장 찍었었다. 선생님은 귀하게 찍은 필름을 당신이 현상한다고 가져가셨는데, 아뿔싸! 사진관에서 자세한 설명을 듣지 못한 아저씨가 슬라이드 환등기용 필름 현상액에 넣어 버려서 단 한 장의 사진도 건질 수 없었다. 결국, 아쉬움만 남기고 내 학창시절 설악산의 멋진 경치를 다시 담을 수는 없었다. 덕분에 설악산 수학여행 추억은 그나마 흑백사진 두어 장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 짝꿍은 후에 돈 벌러 중동 근로자로 나갔다가 저축할 생각은 않고 거금을 투자하여 사 온 커다란 전문가용 카메라, 아주 작은 소형 카메라 등 4개의 카메라를 줄줄이 어깨와 목에 걸고 내 결혼식 행사 사진을 찍어 줬었는데, 그중 두 개의 카메라는 그 시절 사진기자들도 탐내고 자기에게 팔라고 요청할 정도로 고가의 고급 카메라였다고 한다.

사진을 정리하다 보니 얼음낚시, 단풍산행, 여름휴가 물놀이 등 사계가 다 남아 있고 우리나라 방방곡곡 정말로 많이도 다녔다. 또한, 날짜가 박혀 있으니 추억을 더듬기가 한결 용이하다. 그런 사진들이 큰 아이 고등학교 저학년쯤에서 멈추고 더 이상의 사진이 남아 있지 않다. 더 이상의 세월은 적어도 앨범 속에서는 흐르지 않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이때쯤에 내가 미놀타 카메라를 분실하고 디지털카메라를 산 것 같다. 그 해가 앨범의 시간이 멈춰버린 시점일 것이다.

디지털카메라를 처음 샀을 때는 참 좋았다. 필름을 구매할 필요도 없어 같은 사진을 몇 번씩 셔터를 눌러도 됐고, 즉시 사진 상태를 확인할 수 있어서 한결 편리했다. 누구나 그랬듯이 찍은 사진을 PC에 저장했다가 필요할 때 불러서 다시 보면 되는 아주 편리함이 있다. 약간의 기술만 익히면 포토샵 기술로 또 다른 표현도 할 수 있는 참 좋은 기기였다. 그러나 그런 디지털 사진이 세월을 더해 양이 무척 많아지니 추억의 포인트를 찾아가기 어려워지고 어디에 저장했는지 정리를 잘해두지 않으면 찾기가 곤란해졌다. 더군다나 많이 지난 세월의 사진들은 방치하다 손실되기도 하였고 찾아보는 재미도 시큰둥해졌다. 이것이 디지털 사진의 커다란 맹점이다.

앨범을 정리하며 잃어버린 디지털사진 시절을 생각하니 앞으로 디지털 사진도 소중한 추억의 편린들은 현상하여 아날로그로 간직하여야겠다. 이번 11월의 초입은 지난날을 회고하며 편리함에 안주하다 15년 정도의 잃어버린 시간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반성하며 미래를 위해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주말 저녁이다.

2017년 11월 중순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