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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ple01_next.gif이인철 수필 소설 문학서재

ㆍ작성자 이인철
ㆍ작성일 2013-12-21 10:28
ㆍIP: 124.xxx.149
슈킹 (102회)

 그녀가 목례를 하며 대로변에서 우측으로 휘어진 골목길을 가리켰다.
 
"아직 수혜 씨에게 해드릴 이야기가 구백 구십 일곱 번 남은 것 기억하세요."

 뒤돌아서며 외치는 현우의 목소리에 그녀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묵묵부답으로

서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와 함께 걸은 거리가 불과 300미터도 안 되는데 그는 천천히

걸으려고 무척 애썼다고 생각했다.

 포장마차에서 그가 마지막 한 잔을 놓고 한 병을 더 주문할 것이냐로 갈등하고

있을 때 갑자기 스피커 소리가 커지며 노래가 흘러 나왔다. 주인이 카세트에서

나오는 음악을 조용히 듣고 있다가 자기의 애창곡인지 볼륨을 높였던 것이다.

 그 노래는 그도 전에 몇 번 들은 적이 있는 나훈아의 '내 삶을 눈물로 채워도'란

곡이었다. 평소에는 들어도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지나치던 노래였는데 오늘은

가사 한 구절마다 수혜와 연관을 시켰다.

 현우는 불현듯 그녀가 보고 싶었다. 너무 보고 싶어 가슴이 저려 왔다. 지금 그녀를

향한 그의 가슴속에서 타오르는 사랑의 불길은 온몸을 산화시킬 정도로 뜨거웠다.

 그는 반사적으로 의자 뒤에 걸쳐 두었던 가방에서 메모지와 펜을 꺼냈다. 그리고는

흘러나오는 가사를 중간부터 적어 내려갔다.

 '인연이라는 만남도 있지만 숙명이라는 이별도 있지.

 우리의 만남이 인연이라면 그 인연 너였음 좋겠어.

 어쩌면 우리 언젠가 또다시 우연을 핑계로 만날지 몰라.

 내 삶을 전부 눈물로 채워도 널 기다리면서 살는지 몰라.

 아마 난 평생을 못 잊을 것 같아. 너를.'

 노래는 여기에서 끝나 있었고 주인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감상에 젖어 있었다.

주인은 중년의 털보로 센티한 면이 풍부한 감상주의자 같았다.

 노래를 들으면서 꼭 집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미로움이 현우의 가슴을 쓸고 지나갔다.

 그는 '인연이라는 만남'에서 수혜를 떠올렸고 '숙명이라는 이별'에서 희현과 시영이

생각났다. "오빠를 만난 것은 우연이 아니고 필연인 것 같아요."라고 말한 희현에게

왠지 미안했다. 그것은 지금 그가 수혜에게 그 말을 속삭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잔을 털어 넣은 그는 비틀거리며 포장마차를 나왔다.

 '그녀가 말하는 개인사정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노래 가사처럼 그는 우연을 핑계로 수혜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필연을

핑계로 그녀를 또 만날 수 있다. 그것은 오늘 받은 서류를 돌려주면서 자연스럽게

그녀를 한 번 더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에 만나면 기필코 물어봐야지'라고 중얼거리며 그는 현관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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