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집에서 쉬는 토요일.

아내는 출근하고 아이들은 저마다 친구들과 놀러 간다며 큰아들은 자동차 키를 들고 나서고, 작은 아들은 제 친구들과 먹으려 미리 사놓은 삼겹살과 각자의 준비물이라고 라면 두 봉지를 들고 나선다.

이제 이 오후는 나 혼자만이 집을 지키고 있어야 한다.

아침도 날계란 한 개로 때우고 난 터라 정오가 가까운 이 시간에 밀려드는 시장기는 나를 압박해온다.

하지만 어제부터 통증을 느끼는 어금니쪽의 잇몸앓이로 제대로 음식물을 씹을 수 없으니 밥은 생각이 없어진다.

치아가 튼튼하다고 과신을 하고 육고기의 물렁뼈나 오돌뼈를 거리낌없이 씹어 먹다 보니 어느새 어금니 두개가 금이 가서 10여년 전에 치료를 하고 치아를 갈아서 덧씌워 놓았었는데, 그런 젊은 날의 치아건강에 대한 무관심과 과신의 보복을 받는 것인지 가끔씩 이렇게 통증은 나의 잇몸을 공격하여 왕성한 식욕을 물리치곤 한다.

마침 작은 아들이 들고 나서던 라면이 떠올라 점심을 라면으로 해결하기로 하고 양은냄비에 물을 적당히 채워 가스렌지에 올린다.

불을 당겨 물을 끓이며 냉장고를 주섬주섬 뒤져서 매운 청양고추 두개를 가위로 잘게 잘라넣고 이어 시큼해진 김치 국물과 라면 스프를 넣는다.

잠시 후 끓는 물에 라면을 넣고 대파를 가위로 썽둥썽둥 잘라 넣은 다음 국수를 조금 넣고 적당히 끓을 때쯤에 계란을 풀어 넣고 얼른 불을 죽인다.

이렇게 해서 점심이 준비 되었는데, 청양고추로 매콤하고 김치국물과 계란으로 새콤,걸쭉해지고, 같이 넣은 약간의 국수로 다소 부드러운 맛의 라면이 식탁에 오른다.(어묵도 있었으면 조금 더 맛있는 라면이 됐을 텐데…….)

라면과 국수는 씹지 않아도 그냥 식도로 넘길 수 있으니 김치국물과 깍두기 국물을 반찬 삼아 어렵사리 점심을 해결한다.

그러고 보면 라면은 어느새 우리 국민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훌륭한 인스턴트식품이 되어 있다. 이 라면은 외국으로 나가는 사람들의 커다란 여행가방 안에서는 매우 귀중한 몸으로 도난이나 분실을 걱정하게 하기도 하며, 야영을 하거나 낚시를 할 때면 하루에 한끼 이상은 라면으로 해결하기 일쑤다.

이제는 학생들이나 요리를 전혀 해보지 못한 아가씨들도 자신 있는 요리를 물어보면 주저 없이 “라면이요.”라고 말하는데 아마도 잘하는 요리보다는 할 수 있는 한가지의 요리 아닌 요리가 라면인 것 같다.

요즘에는 라면의 종류도 매우 다양해졌다.

그 다양이라는 게 제조회사마다 내놓는 브랜드도 다양하지만 그냥 라면에 김치를 넣어서 끓인 김치라면, 떡을 넣어서 끓인 떡라면, 만두라면, 참치라면, 해물라면 등등…….

라면은 1963년 우리나라가 전쟁 후 주식인 쌀의 절대부족으로 빈곤에 처해 있을 때 대체 식량으로 삼양식품이 일본에서 들여 왔는데, 당시는 반일감정도 최고조였고 국수나 수제비에 비해 생소하기도 해서 주목을 받지 못했었는데, 무료시식으로 점차 그 맛을 인정 받다가 정부의 강제적인 혼분식 장려정책 덕에 급속히 판매량이 늘어 가고 생산하는 기업도 늘어 갔다고 한다.

내가 한 10여년 전에 읽었던 제목이 생각나지 않는 소설에서는 20대 아가씨인 주인공이 광화문 정동공원 어디쯤에 혼자 살면서 라면조리의 전문가로 인터넷을 통해 라면에 대한 정보를 교류하고, 초보자가 라면전문점을 창업하려고 요청을 하면 그 매장으로 출장을 가서 다양한 조리법을 가르쳐 주고 그 대가로 얼마간의 수고비를 받아서 생활을 하는 스토리였었는데, 그때 그 작가의 이름은 기억 나지 않지만 라면에 대한 해박한 지식들을 주인공을 통해 풀어 놓았었다.

그 책에 나오는 조리법도 다양해서 라면에 깻잎을 넣고 끓인다던가 다 끓은 라면에 불을 끄고 치즈를 한두 장 얹어서 치즈가 다 녹고 나면 젓가락으로 저어서 잘 섞어 먹는다던가 된장을 풀어 넣은 물에 라면을 끓인다던가 하는 다양한 조리법을 소개했었는데, 이제는 대부분의 라면요리는 전문식당의 메뉴판에 제 이름을 올리고 있다.

그 소설에서는 라면의 과학에 대해서도 몇 가지를 간접적으로 소개를 하였었는데, 라면의 면발이 꼬불꼬불한 것은 면을 뽑을 때 면이 나오는 속도보다 면발을 받아내는 컨베이어 벨트의 속도를 다소 느리게 조절하여 자연스럽게 꼬불꼬불한 라면을 생산하며, 그렇게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라면을 끓일 때 물방울들이 꼬불꼬불한 면발 사이를 용이하게 통과하여 골고루, 그리고 신속히 익도록 하여 조리시간을 단축시켜 준다고 한다.

그밖에도 좁은 면적에 많이 담을 수 있고, 국수보다 강도가 높아져 유통시 충격에 의한 파손도 얼마간 줄일 수도 있는 등 몇 가지 과학이 숨어 있다.

일본의 라멘에서 시작된 라면은 몇 가지 유래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는 일본이 중일전쟁에서 얻은 또 하나의 전리품이라는 설도 있다.

1937년 중일 전쟁시 중국군 포로들의 짐 꾸러미에서 원조격인 초기의 라면이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모든 음식을 기름에 튀겨서 먹는걸 즐기는 중국인들이 건면을 튀기게 되면 식품이 건조되어 저장성이 좋고, 수분이 적어 가볍고, 기름을 함유한 고 칼로리 식품인데다가 급할 때는 끓이지 않고 과자처럼 먹을 수 있는 이점으로 이것을 전투식량으로 지참했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후 일본인들이 그 중국군의 전투식량을 더 개량하고 발달시켜 지금의 라면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라면이 처음 시판되었을 때는 가격이 10원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내가 사 먹을 당시 가격은 20원이었었는데, 그 시절의 가정경제는 마음대로 자주 사먹을 수 있는 수준은 못되어 어머니나 식구들 몰래 라면을 사서 스프를 뿌리고 생으로 뜯어 먹었었는데 그도 맛이 있었다.

나처럼 생으로도 맛있게 먹는 아이들의 군것질 성향을 파고든 제품으로 ‘라면땅’, ‘뽀빠이’, ‘자야’ 등이 70년대를 전후해서 과자로 출시 되었었는데, 아무래도 그것들은 상품으로 판매가 곤란한 파손된 면이나 라면 부스러기로 만든 듯이 잘게 부숴진 면에 몇 가지 소스를 첨가하여 기름에 바삭 튀긴 과자였었는데 변변한 주전부리가 없던 그 시절에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서 그 회사는 당시 최고의 제과회사가 아니었나 생각되어진다.

그렇게 몇 가지 신비한 과학을 지니고 있고, 어린시절 과자로도 우리들 입을 즐겁게 해주었던 라면이 이제는 부대찌개, 김치찌개, 생선찌개등 각종 찌개의 사리로도 제 기량을 뽐내고 있다.

그렇지만 라면은 출생의 목적에 맞게 끓여서 먹는 게 가장 잘 먹는 방법이겠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맛있는 것은 찌그러진 양은 냄비에 연탄불로 끓여 뚜껑에 덜어서 호호 불며 먹는 라면과 장작불이 한참 타고 사그라지기 시작할 때 뚜껑 없는 스텐레스 대접에 라면을 끓이면 국물에 허연 재가 솔찬이 들어가는데, 그 라면들의 맛이 일품이다.

그 외에도 요즘 아이들은 군에서 라면봉지를 윗부분만 조금 뜯어서 면을 봉지에 부셔 넣고 스프와 첨가 건스프를 섞어서 뜨거운 물을 부어놓았다가 어느 정도 불면 먹는 ‘뽀그리’를 즐긴다고 하지만, 그건 요즘 군에는 석탄을 진흙에 섞어서 때는 난방용 페치카가 없기 때문 일 것이고, 우리 시대의 군에서는 모두들 잠든 한 밤중에 전투용 그릇인 반합을 냄비로 사용해서 페치카에 몰래 끓여 먹던 라면이 정말 맛있었는데, 간혹 일직사관이나 군 간부들에게 들키면 한밤중에 옷을 홀딱 벗고 팬티바람에 연병장을 몇 바퀴 돌거나 보급과 선임하사가 가끔씩 점호시간에 반합의 상태를 점검하여 라면을 끓이느라 페치카의 열기로 페인트가 연소 되어 망가진 반합이 적발되면 연대책임으로 전체 기합을 받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치카와 반합이 어우러진 한 겨울밤 라면 국물맛의 유혹을 쉽게 떨쳐버리지 못하곤 했었다.

전역을 한 후에도 나는 라면을 주식이나 부식으로 집 안팎에서 즐기는데 더욱 더 라면을 찾는 건 과음한 다음날 해장용으로 먹기도 하지만, 나는 조금 못된 버릇이 있어서 잔칫집을 갔다 오거나 밖에서 식사를 하며 술을 마시고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면 다시 허기를 느끼고 늦은 식사를 챙겨 먹는 버릇이 있다.

그 일이 벌어진 때는 경기도의 한 아파트단지에 살던 10몇 년 전의 일이다.

그날도 밖에서 술 한잔하고 밤 늦게 집에 들어 왔는데 역시 허기를 느꼈다.

나는 전과 같이 아내에게 라면을 끓여 달라고 했는데, 아마 그날은 아내가 몹시 피곤했었는가 보다.

날보고 “회식을 할 때는 밖에서 저녁을 확실히 해결하고 와야지 밤늦게 집에서 뭘 또 차리라는 거예요?”라고 하면서 침대에서 일어날 생각도 않고 귀찮으니 그냥 자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라면을 먹으려 했다가 그냥 자기는 서운하기도 하고 속도 허전하여 몇 번 강요 반 부탁 반 라면을 끓여 달라고 보챘다.

하지만 아내는 몇 번의 애원에도 아랑곳 하지않고 정 라면이 먹고 싶으면 직접 끓여 먹으라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에이~ 잠깐 좀 일어나 끓여 주지……’하며 주방으로 나갔다.

할 수 없이 적당한 냄비를 선택해 물을 부어 가스렌지에 올려 놓고 라면과 같이 먹을 김치를 챙기는데 갑자기 뱃속에서부터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아니? 내가 늦은 밤에 직접 라면을 끓여서 먹으려면 뭣하러 결혼했어?’

이런 생각이 들자 내가 통제하기도 전에 갑자기 내 두 손은 막 물이 끓으려는 냄비를 들어 렌지 뒤쪽으로 난 환기용 창문으로 내 던져 버렸다.

그걸로 분이 안 풀려 눈에 보이는 냄비들과 그릇, 후라이펜등 대여섯 개를 창문 밖으로 냅다 집어 던져 버렸다.

내 던져진 그릇들은 내가 살던 아파트 12층에서 뒤쪽으로 ‘휘~잉. 휘~잉’ 날아가더니 이내 화단의 잔디밭으로 떨어져 버리고 ‘퍽! 퍽! 퍼퍼퍽!’하는 둔탁한 소리만 어두운 밤공기를 가르며 벽을 타고 내가 사는 12층으로 되돌아왔다.

그제서야 뭔가 잘못 되어 가는 느낌과 소리를 감지한 아내가 방문을 열고 나와 나를 보며 “뭐야? 뭣하는 거예요? 왜 그래요?”하고 놀란 눈으로 묻는다.

나는 씩씩거리며 “이 시간에 라면도 안 끓여주는 사람과 내가 뭣하러 결혼해서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하고 방으로 들어 가 ‘쿵’하고 문을 닫아 버렸다.

화는 안 풀리는데 사태를 파악하고 따라 들어 온 아내는 나에게 닦달한다.

“아니~ 라면 끓이다 냄비를 던져버리면 어떻게 해요?”

나는 화가 난 목소리로 “시끄러워! 그냥 자라며? 그냥 잘게!”하고 이불을 뒤집어 써 버렸다.

아내는 울면서 누가 잘못했던지 간에 그릇을 찾으러 가자고 애원하는 것이었다.

혼자 갔다 오라고 하니 껌껌하고 무서워서 혼자는 못 가겠고 내일 아침에 가면 이웃들에게 창피하니 지금 같이 그릇을 찾으러 가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실랑이를 하며 침대에 조금 누워 있으니 화도 풀리고 오히려 내가 욱하고 돌발적으로 한 행동에 후회도 되었다.

그래서 아내와 나는 내가 그릇들을 던진 지 한시간여가 지난 자정이 넘은 시간에 랜턴을 들고 아파트 뒤쪽의 화단으로 가서 주섬주섬 그릇들을 찾아 들고 혹시 누가 볼세라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 왔다. (조금만 참을 걸~~.)

던졌던 냄비나 후라이펜은 여기 저기 약간씩 우그러지고 찌그러지고…….

이튿날 아침 출근하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누군가 “어젯밤 뒷화단에 뭐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던데 못 들었어요? 뭐였지?”하는데 나는 못들은 척 그냥 조용히 있다가 내릴 수 밖에 없었다.

그 후 아내는 그 찌그러진 그릇들을 버리지도 않고 삼사년을 더 사용하였다.

그 당시는 다니던 회사에서 명절이나 연말에 직원들에게 주던 냄비나 그릇들을 포장도 안 뜯고 장롱 위에나 싱크대 위의 수납장에 쌓아 놓고 살았었는데, 나에게 그날의 못된 행동을 잊지 말고 함부로 화를 내지 말라는 무언의 경고였는지 오래도록 사용을 하여서 내가 가끔 저녁에 라면이 먹고 싶을 때면 그 찌그러진 냄비들이 나를 원망하며 꾸짖어대곤 하였었다.

더 좋은 냄비들을 사줄 테니 그만 버리라는 내 말에도 고집스럽게 사용하며 심리적 보복을 하던 아내는 그 아파트에서 이사를 하면서야 흉물스런 그것들을 주방에서 퇴출시켰다.

지금은 동물성 기름이 인체에 끼치는 영향이 해롭다 하여 식물성 기름인 팜유로 라면을 만들지만, 라면이 처음 나왔던 그 시절에는 재료에 닭기름을 썼었는데, 자주 고기를 못 먹던 어려웠던 시기인지라 닭기름의 그 고소함은 국민들의 식욕을 부추기는데 탁월한 능력을 보여줬었다.

이제 향수에 젖은 세대들을 위해 지난 5월에 닭고기 국물이 우러나는 깔끔한 맛의 ‘삼양라면 더 클래식’ 이라는 신제품이 출시 되었다는데, 아직까지 나는 먹어 보지도 못했을 뿐더러 슈퍼에서 구경도 못했는데, 내일도 밥은 먹기 힘들 테니 앞의 마트에 나가 그 신제품이 있는가 물어보고 있다면 몇 봉지 사서 내일 저녁식사로 즐기며 옛 라면의 추억에 푸~욱 빠져봐야겠다.

밖에는 갑자기 예보에도 없던 장대비가 쏟아진다.

이렇게 갑자기 비가 많이 내리면 바다와 강가로 놀러 간 아이들 일정이 모두 엉망이 되어버릴 텐데…….

잇몸의 통증은 빗소리를 가르고 달려오는 요란스런 뇌성에 놀랐는지 내 잇몸 속으로 더욱 깊숙이 파고든다.

“아이구~ 아야!”

2009년 8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