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이게 뭐야?”

“아이구 정말”

“와!!!”

우리는 제각각 탄성인지 한탄인지 모를

한마디씩을 거친 숨이 가득한 입안에서 뱉어내었다.

흘림골에서 앞사람의 뒤통수만 따라

어렵게 어렵게 올라 선 등선대 올라 가는 마루턱.

내려도 올라 가지도 않고 가득 메워선 산객들을

부비고 올라 서서 고개를 바짝 세워 등선대를 올려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등선대에 오르고 있거나

이미 올라서서 커다란 성취를 이룬 것 같이

뽐내며 거만하게 계곡을 내려다 본다.

알몸을 드러낸 계곡들은 참 많이 부끄럽겠다.

몇몇 산악 대장들이 이미 등선대가 포화 상태이니

포기하고 하산하라 권한다.

과연 바라본 등선대는 사람의 단풍으로 물들어 있다.

아마 차례를 기다린다면 족히 한 시간은 할애 해야 하겠지.

‘등선대’

한문으로는 어떻게 쓰는지 모르겠으나

아마도 신선이 되어 오르는 봉우리(登仙臺)라는 뜻이리라.

그러니 저 어려움을 뚫고 많은 사람들이 저길 오르겠지.

최소한 신선이 된 것 같은 기분이라도 품고 내려 오려고.

우리는 그냥 내려 갈란다.

아직 이승도 다 못 즐겼는데 어찌 벌써 등선한단 말인가?

우리라는 단체는 아내와 나,

그리고 아내의 초등학교 동창 세분과

한 분의 부군인 박형으로 구성된 6인조 임시 산객 단체.

아내의 초등학교 동창들이 의기 투합 되어

우리의 산행에 동참하게 되었는데 박형이 서열상

오늘의 산악 대장이고 나는 부 대장겸 촬영 기사.

오늘 봉사만 신나게 하다 오겠군.끌~

징징거리는 시계의 알람 성화에

쉽게 떨어지지 않는 눈을 떠서 배낭을 챙기고

등산화 풀어진 끈을 고쳐 매며 부산하게 집을 나선 새벽.

사당동에서 아침 7시에 설레는 마음으로

미리 선약해 놓은 산악회 버스에 올라 타고 어둠을 걷어 내며

달려서 이곳 한계령을 넘으니 이미 시간은 11시 가웃.

흘림골 등산로 입구가 바로 저 앞인데

선착한 산악회 버스들로 좀처럼 나아 갈 수 없다.

할 수 없이 입구를 한 모퉁이 남기고 내려서 걸어 갔다.

산을 오르기 전 용변을 보고 신발끈을 옥 조이고

등산 스틱도 조절을 하며 마음을 다잡는다.

과연 오늘의 설악산은

우리에게 어떤 절경을 내놓고 자랑질 할 텐가.

입구부터 산객들로 가득 찼다.

하지만 2년 전 아내와 둘이 왔을 때도

이렇게 많은 인파에 휩쓸리며 걸음을 옮겼고

더군다나 입장료를 징수 했었으니 입장권 구입하는데도

한 차례 전쟁을 치러야 만 했었다.

한발 또 한발 우리는 앞사람의 그림자를 놓칠세라

서둘러 따라 밟으며 산을 오른다.

마치 공연을 보기 위해 줄을 서서 입장하는 것 같다.

그런데 2년 전 왔을 때는 갓 입산 통제가 풀려서

원시림을 걷는 듯 한 삼림구간도 제법 있었는데

그 후 집중호우가 한계령을 고립 시킬 때

이곳의 계곡과 자연림들을 휩쓸고 동해로 내빼서

이제는 인간의 힘으로 자연의 커다란 상처들을

철제 구조물과 시멘트로 군데 군데 덧붙여 놓았다.

충치로 치아가 몇 개 뽑혀져 나가

별수 없이 틀니를 박아 놓은 것처럼 많이 아쉽지만

그래도 눈으로만 잡을 수 있는 저 멀리의 기암과 계곡들은

이 곳이 이 나라의 제일 단풍 절경임을 애써 말하고 있다.

철계단과 가파른 암석길을 더듬어

산의 정갱이에 올라 서서 뒤 돌아 보니

가뭄으로 물이 마른 여심 폭포가 부끄러워하며 앉아있다.

여인의 성기를 닮아서 불려지는 여심 폭포는

입산이 통제 되기 전에는 신혼여행의 필수 코스였다고 하며

이 폭포의 물을 받아 마신 신혼들은 잘 생긴 아들을 낳는다는

다소 우스운 이야기가 존재 하고 있는데

올해는 물이 말랐으니 폐경이 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아쉽지만 그래도 디지털 카메라에 폐경된 여심을 담는다.

올해의 설악 단풍은 오래 지속된 가뭄으로

나무들이 이파리까지 수유하지 못해서 오구라 붙은 것들이 많고

제대로 채색된 단풍은 그리 많지 않은데

그래도 군데 군데 당단풍들은 제 몸에 불 질러 놓고

우리들을 맞이하고 있다.

“이야! 정말 아름답다. 붉게 타는 저 단풍!”

우리는 그들의 수고로움에 경탄으로 답을 해 준다.

계속해서 오르고 오르니

싸늘한 날씨에도 땀줄기는 내 등짝을 타고 내리는데

가물은 설악에 이 땀이라도 공양하고 갈 꺼나?

그렇게 어렵게 등선대 오르는 입구에 당도하니

주위에는 언젠가 보았던 서산 앞 바다의 바위에 붙은

굴껍데기처럼 등산객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오르는걸 포기 하고 

카메라 메모리스틱에 담아서 내려 갈 수 밖에 없다.

이제는 오르는 길은 거의 없고 사람이 살고 있는

낮은 해발의 세상으로 내려 가는 일만 남았다.

앞길을 내려다 보니 기암 괴석의 협곡 사이로

화려한 등산복들이 단풍과 어우러져 가을을 수놓고 있다.

많은 인파에 밀려서 내려가면서도

그냥 찰나로만 즐기기엔 너무도 아까워 연신 셔터를 눌러 댄다.

앞을 한 컷 뒤 돌아 보며 한 컷 그대를 한 컷

그리고 멀리 있는 저 바위산 절경을 당겨서 또 한 컷.

아내는 앞서 걸어 가며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이야기꽃을 피우기에 여념이 없다.

제법 많이 내려 와서 가을 햇살이 따사로운 곳에

자리를 펴고 둘러 앉아 소찬에 식사를 했다.

각자 싸온 밥과 반찬 그리고 막걸리와 안주들…….

아내는 항상 자기 몫의 캔맥주를 한 개 사오는데

오늘은 동행이 여럿 있는지라 두 개를 준비 했고

내 전용인 막걸리도 역시 두 개를 준비 했는데

모두들 맥주는 사양하고 막걸리로 잔을 들이 민다.

결국 내 산행의 정량인 막걸리 한 병도

내 식도를 넘어 가지 못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인파에 막혀 허둥대던 지난 산행이 상기되어

일행을 추슬러 하산 길에 올랐다.

오색약수에서 버스가 출발하는 시간이 오후 4시이니

지금 2시를 지나고 있는 시간에 출발 한다면

다소 여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도 잘못된 계산,

즉 오산인걸 알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몇 줄로 내려 가고 오르는 길이 군데 군데 외길이 되면서

인파의 병목현상을 이뤄 차례 기다리기를 수십 분씩 해야 하는

그런 구간들을 만나니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고

그런 곳을 두어 군데 지나고 나니 마음이 바빠진다.

그래도 내 두 눈과 카메라의 한 눈은

설악의 가을을 놓치지 않으려고 열심히 스케치 한다.

어렵게 내려 서는 12폭포는

지나온 반대편 흘림골 가뭄에 비해 수량이 꽤있는 편이라

졸졸 거리며 우리 곁을 앙증맞게 따라 나선다.

단풍들도 계속 수유를 받은 탓에 검붉기도 샛노랗기도 하다.

서두르는 내 걸음에 비해 갈 길은 멀다.

드디어 주전골에 닿으니 수량은 더욱 많아 지고

이제는 막히는 구간이 없을 거라 생각하니 다소 여유로워 진다.

‘주전골’은 옛날 도둑들이 숨어서 위폐를 제조하던 곳이라

‘주전골’이라는 이름표를 달게 되었다고 한다.

철계단과 암석 계단을 번갈아 가며 내려 오니

저 앞 개울가에 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보인다.

드디어 오색 약수에 당도한 것이다.

2년 전 산행 때는 여기 어디선가

산행으로 피곤한 발을 차가운 물에 담그고

산행을 정리하며 서로의 피로를 깨끗이 닦아줬었는데

오늘은 4시가 다 되어서 그냥 지나침이 조금 아쉽다.

그런 상념에 잠겨 있는데 핸드폰이 아내를 부른다.

산악 대장의 출발 시간이 다 되었는데

어디까지 내려 왔냐는 확인 및 재촉하는 전화다.

거의 다 왔다고 금방 도착 된다고 했다.

그런데 모두들 용변은 보고 가야 한다고 한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산행 에서는

용변은 정말로 힘겨운 전투다.

여성에게는 더 많은 인내를 요구한다.

어렵게 용변을 보고 나니 시간은 4시를 훌쩍 넘겼고

발길을 재촉하여 버스에 당도 하니 30분 가까이 늦었다.

가차없이 엘로우 카드다.

“죄송합니다” 하고 머리를 긁적이며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우리 뒤에도 두어 분이 더 당도하고

결국 그때까지 연락이 안 되는 두 분의 손님은 버려두고

버스는 야속하게 오색 약수를 떠난다.

(1시간 뒤에 산악 대장이 통화로 시외버스를 예약하고

두 분은 무사히 귀가 길에 올랐다고 한다.)

밀려 오는 어둠에 쫓겨서 오다 보니

어느새 어둠은 우리 버스를 까아만 망토로 덮치고

결국 헤드라이트로 어둠을 들추며 서울에 도착하니 9시경.

올해의 극심한 가뭄으로

단풍이 그리 경탄할 만큼 물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설악의 가을은 도심에 갇혀 살던 우리들에게

한 없이 마음을 열고 자연을 맞이하라 권하고 있다.

이제 설악에는 머지 않아 서설을 뒤집어 쓰고

눈 산행을 즐기는 산객들을 맞이 하겠지?

처연하게 분화장 하고 슬픈 눈빛으로 손님을 바라보던

어느 겨울 그 카페의 아네모네 마담처럼 그렇게…….

2008년 10월 19일 설악산 흘림골~오색약수 산행을 한 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