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12월 들어

처음으로 겨울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바람이 사뭇 사납다.

이 비가 내리고 날씨는 급강하 한다고 하니

가뜩이나 경제가 나라의 곳곳에서 벌거벗고 신음하고 있는

어려운 이 시절에 내 마음이 더욱 시렵다.

이런 날은 그저 따끈하고 향기로운 국화차 한잔하면서

일상을 떠나 작가의 향기를 따라 한 권의 책 속으로 빠지고 싶다.

어떤 책을 볼까 이것 저것 뒤적이다 보니

좀 전에 올려 놓은 찻물이 ‘식- 시~익’ 거리며

하얗게 질려서 가쁜 숨을 몰아 쉬고 있다.

렌지의 불을 끄고

말린 국화꽃 몇 송이 옹기 종기 모여있는 다기에

천천히 찻물을 따라 넣는다.

마른 국화꽃이

추운 겨울의 외출에서 들어와 뜨거운 목욕물에 담근 듯

구부렸던 제 몸을 맘껏 부풀리며 까르륵 웃어 댄다.

찻잔에 국화차를 쪼르륵 따르니

따라 나선 산국의 그윽한 향이 온 방안을 휘 젖고 다니며

나를 재촉하여 지난 가을의 산야로 이끌고 나간다.

내 마음은 어느새 들국화가 흐드러지게 피고

단풍이 곱게 단장한 가을 들녘에 머물러

창 밖의 어수선한 겨울은 내 몸에서 툴툴 털려 나간다.

국화는 절개나 의지가 매우 강한 사람은

어떤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이겨내는걸 이르는 말로

‘국화는 서리를 맞아도 꺾이지 않는다’ 라는 속담이 있고

고려 충숙왕 때 중국으로부터 전해졌다고 되어 있으며

매화, 난초, 대나무와 더불어 사군자로 불리어 지고

특히 국화는 고고한 기품과 절개를 지키는 군자에 비겼으며

중국의 도연명(陶淵明)도

‘국화는 군자와 불가분에 관계에 있다’ 라고 예찬 하였다 한다.

매년 가을축제의 주인공이 되는 국화는

종류가 세계적으로 200여종이 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는 감국(甘菊), 산국(山菊)을 비롯하여 구절초, 쑥부쟁이 등

10여종의 들국화가 들에 혹은 야산에 자생하고 있다.

지난 가을 충북 영동에 잠시 머무를 때

횡간 ic 부근의 백화산 반야사(般若寺)를 들린 적 있었다.

그 사찰과 문수암 주변의 가을을 여유롭게 둘러 보고 내려오는 길에

경내의 찻집에서 국화차를 한잔 마시며 국화향을 음미 했었는데

그때 향이 너무 좋아 그곳 보살들이 직접 말려 포장한 국화차를

한 봉지를 사왔었다.

국화의 종류를 물어 보니 감국(甘菊)이라고 하였었는데

대부분의 국화차는 이 감국을 말려서 만든다고 한다.

그날 저녁에 내가 머무르던 숙소의 주인장 어르신께

사온 국화차 봉지를 보여 드리며 차 향을 말씀 드렸더니

그 집 초막 주위에 널려 피어 있는 꽃들은 산국(山菊)이며

국화 중에 가장 향이 진하고 야생국화 중에는 최고라고 하신다.

감국(甘菊)은 꽃의 지름이 2.5㎝정도고

산국(山菊)은 그보다 더 작아서 1.5㎝에 불과하며

꽃의 크기로 분류하는 대륜, 중륜, 소륜 중에

둘 다 소륜국화(小輪菊花)에 해당한다.

영동을 떠나오기 전날에 어르신은

초막 주변에 가꾸고 있던 개량 패랭이, 마가렛 등

야생화 몇 포기와 함께 산국을 낫으로 잔뜩 베어 주시며

모두 가져가라고 하셨다.

그렇게 많은 국화꽃을 가져다 무얼 할까 하면서도

정성을 거절할 수 없어 밤을 새워 꽃대만 대충 훑는데

앵앵대는 꿀벌들과 어울려 왠 벌레들이 그렇게 많은지

산국의 진한 향기를 대변하는 것 같았다.

살고 있던 벌레들을 박정하게 내쫓고

대충 꽃대를 잘라 담으니 쌀 포대에 거의 차는 것이다.

서울의 집으로 돌아 와서

그 동안 밀린 일들을 하는 짬짬이 저녁마다

산국의 꽃만 따서 말리는데 크기가 와이샤스 단추만 한 게

어찌나 다닥다닥 붙어 있는지 몇 날 며칠을 따서 말렸다.

어느 정도 말린 국화꽃에

끓는 찻물을 부어서 우려내어 시음을 해 보니

향기보다 쓴맛이 너무 강해서 도저히 마시기 거북하였다.

고민 고민하며 방법을 달리 하고

여기 저기 문의 하면서 여러 번의 시행 착오를 거쳐

결국은 끓는 소금물에 2, 3분 살짝 데쳐서

식초를 희석한 물에 담갔다 말리니

이제야 산국의 진한 향이 제대로 우러나온다.

하지만 향이 너무 강해

다기에 그 작은 꽃을 10개 미만으로 넣어야

적당하게 우러난 산국의 은은한 향을 제대로 즐길 수 있었다.

가을의 상징이기도 한 국화는

서정주님의 시 ‘국화 옆에서’ 에서는

소쩍새 울고 천둥이 울고 무서리 내리는 중에도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님으로 피어 있어서

원숙한 중년여인의 불혹의 절대 미(美)를 대변하고 있다.

국화의 꽃말은 청순, 정조, 평화, 절개, 고결이며

그 중 감국이나 산국처럼 노란 국화의 꽃말은

‘짝사랑’이라고 한다.

본초강목(本草綱目)에는 국화가

‘오래 복용하면 혈기에 좋고 쉬 늙지 않으며

감기, 두통, 현기증에 유효하다.’ 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민간에서도 국화는

‘간장기능을 도와 시력을 회복하는 효과와 겨울철 감기 예방,

기침, 천식, 가래 해소, 후두염에 효과가 있다고 하며

혈액 순환을 돕고 머리를 맑게 해주는가 하면

지속적으로 마시면 노화를 방지한다.’고 전해지고 있다.

한 포대의 산국을 일일이 따서 말리니

팥알보다 작게 마른 꽃의 양이 족히 두 됫박이나 되는데

극히 조금씩만 다기에 넣으면 충분하여 내가 차로만 마신다면

아마도 한 5년은 국화차를 원 없이 즐길 수 있겠다.

그토록 양이 충분하니

더욱 풍성하고 여유로운 가을을 즐기기 위해

소주를 사다가 국화주를 담갔다.

전에 구절초로는 술을 담가 봤었는데 산국으로는 처음이라

술 익은 후에 향을 보며 양을 조절하여야 하겠기에

시험적으로 소주 큰 병 하나 분량만 담갔는데

이 국화주는 올해의 남은 달력이 낙엽 되어 떨어질 때쯤이면

그 향을 시음 할 수 있으리라.

조선시대에는

명기(名妓)들이 국화주를 담가서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가

사랑을 느끼고 진정으로 정인이 되고 싶은 문객에게 국화주를 권하여

여자로서의 수줍은 구애 표현을 간접적으로 하고,

풍류객도 국화주를 기꺼이 마심으로 서로의 마음을 맞추고

서로를 흠모하는 사랑노래인 애절한 시문(詩文)을 주고 받다가

밤새워 운우(雲雨)의 정분을 나누었다고 하는데

나는 국화주 그 향기로운 술을 누구와 같이 할까?

오늘 같이

겨울비가 추적 추적 오는 저녁에 즐거운 벗을 불러

보관된 가을향을 마시며 시심(詩心)이나 나눌까나?

2008년 12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