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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염경희 수필가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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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ㆍ작성자 |
염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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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ㆍ작성일 |
2023-08-21 21: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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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숭아 익어 갈 무렵이면
글 / 염경희
엄동설한 칼바람에 깊은 잠자리에 들었던 만물이 기지개를 켜면, 아득히 먼 곳에서 봄바람 타고 귀에 익었던 기침 소리가 들려온다. 아버지가 계신 곳에도 봄이 온다는 기별이 갔을까 궁금하다. 그곳에서도 기침하시느라 매일 아침 고생을 하고 계신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찬바람이 나기 시작해서 긴 긴 겨울을 보내고 봄바람이 일어 꽃망울을 터트릴 때까지 아버지의 고질병인 해수(海獸)는 끊이질 않았다.
직장에서 인사이동으로 평생 나고 자라서 생활했던 곳을 벗어나 장호원에 와서 살다 보니 어릴 때 먹던 복숭아가 많이 생각난다. 아주 어렸을 적에 울안에 있던 복숭아나무 두 그루는 군것질거리가 없을 때 유일하게 효자 노릇을 톡톡히 했다. 분홍색 꽃이 피기 시작하면 진한 향기는 온 집안에 퍼져 봄이 왔음을 알렸다. 점점 해수(海獸)로 병이 깊어져 끝내 병석에 자리보전하신 아버지는 복숭아나무에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것을 보는 것이 하루를 보내는 유일한 낙이었다. 몇 개가 달렸는지, 몇 개 떨어졌는지, 얼마나 익어 가는지, 쪽문 열어 놓고 하루 종일 복숭아나무만 바라보셨다.
몸을 맘과 같이 움직이지 못하니까 복숭아나무에 익어가는 복숭아를 딸 수 없어 바라만 보다가 오빠들이 들에서 들어오면 따라고 해서 몇 개 안 되지만 식구들이 촛불 켜 놓고 먹다가 벌레를 씹은 일도 있었다. 기겁을 해 뱉어내면 벌레도 약이 된다며 괜찮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제일 말랑하고 큰 것은 할머니와 막내인 나에게 주셨고, 나머지 식구들은 못나고 벌레 먹이를 주신 후에 나머지 최고로 무지라기 복숭아는 아버지가 드셨다.
누워서 복숭아나무만 바라보신 아버지는 동네 아이들 목소리가 들리면 누구라도 따 갈까 봐
기침 소리로 망을 보셨다. 그렇게 지켜 낸 복숭아를 가족부터 챙긴 것이 지금 생각하면 너무 가슴이 아리다.
이곳 장호원은 본래 복숭아가 특산물로 유명한 곳이라 여러 종류의 복숭아를 실컷 먹고 있는데, 눈으로만 잡수시던 복숭아! 지금 아버지가 살아 계시면 얼마든지 사드릴 텐데 안타까운 마음뿐이다.
아버지가 심한 해수(海水) 병을 앓게 된 동기는 다음과 같다.
아버지는 19세에 가장이 되셨는데 할머니와 엄마, 아버지 세 식구가 살고 있을 때 6·25전쟁이 났고, 피난길에 큰 기와집에 먹을 것을 찾으러 들어갔다고 하셨다. 그 집 방안에는 피난길에 오르지 못한 노부부가 나란히 누워 숨져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두 분 중에 한 분이 움직일 수 없었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입장에서 한길을 택한 것 같았다고 말씀했던 기억이 난다. 여기저기서 총소리는 들려오고 마음이 다급해 노부부의 얼굴만 천인지, 이불인지 모르는 물건으로 가려 놓고 광에서 쌀 한 말 남짓 메고 도망 나와 보니 포 소리가 코앞에서 들려 그 길로 임진강 물속으로 숨었다고 하셨다.
추위와 물속에서 떨었던 것이 감기로 이어지고 해수(海獸) 병을 앓게 되어 아침이면 기침 때문에 두어 시간은 고생하신 기억이 난다. 새벽 서너 시면 잠에서 깨신 아버지는 옷을 입는 시간이 꽤 긴 시간이 걸렸다. 기침이 한번 터지면 다리 한 짝 끼고 기침하고 또 한 짝 끼고 기침하고, 연이은 기침 소리에 새벽잠을 설칠 때면 짜증이 나 이불을 뒤집어쓰곤 했다.
시골집에 방이 없어 할머니와 오빠들은 같은 방을 쓰고 막둥이인 나는 엄마 아버지와 방을 같이 썼기에 늘 상 겪는 일이었다. 지금 와 생각하니 철이 없어도 한참 없었다. 죄송하고 부끄러운 마음에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런 몸으로 아버지는 막내딸 초등학교 입학시키는 날은 당신이 시켜야 한다고 먼 길을 걸어서 갔던 기억도 난다. 하얀 광목으로 만든 코 수건을 곱게 접어 왼쪽 가슴에 달고 입학하던 그때는 유독 추위가 심했다. 입학 통지서를 받아 놓고, 벽에 걸린 달력 위에 숫자를 하나하나 지워가며,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던가? 색동치마 저고리와 색동 고무신을 밤새 몇 번을 갈아입고, 또 신어보고 했는지 모른다.
아침 끼니도 거른 채 한껏 단장하고, 고사리손으로 아버지의 손을 꼭 잡고 입학식으로 향했다. 가끔 기침이 시작되면 길가에 앉아 한바탕 기침하고 나서야 아버지는 발길을 재촉했다. 그래도 천방지축인 난 기쁘고 즐겁기만 해 한복 치마를 펄럭이며 아버지의 손 꼭 잡고 종종걸음으로 학교에 도착하였다. 여기저기서 친구들과 어른들의 작은 웃음소리가 까르르 까르르 들려왔고 모든 시선이 나에게 향했으며, 나의 옷차림에 운동장은 한바탕 웃음바다가 되었다.
어리둥절 둘러보아도 색동치마 저고리에 색동고무신의 옷차림은 나 혼자였던 것이었다.
그때야 아버지와 나는 웃음소리의 이유를 알았는데 아버지께서는 의연하신 채 풀어진 내 저고리 옷고름 고쳐 매어주시며 “춥다.” 하시며 목에 들렀던 목도리를 내게 메어 주시는 손의 떨림이 바르르 나에게 전해졌다.
한복에 색동고무신 차림으로 웃음꽃의 주인공이 되었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생활 형편이 녹록하지 않아 부모님께서는 막내딸 입학식 때 입을 옷은 있던 한복에 맞추어 색동고무신을 준비해 주셨다. 내가 부모가 되어 자식을 낳아 길러보니 그때 그 심정, 천만번 헤아릴 수 있고도 남음이다.
이맘때가 되면 복숭아가 먹음직스럽게 익어가는 계절, 아버지가 많이 생각난다.
기침에는 복숭아가 약이라는데 지금 살아 계시면 마음껏 드시고 병도 고칠 수 있었을 것이란 아쉬움이 크다. 눈길이 닿는 곳곳마다 빨간 복숭아가 줄을 지어 서 있다. 복숭아가 유명한 고장이라 복사꽃이 필 때부터 수확기가 끝나고 축제가 열리기 전에는 인력이 매우 부족해 웬만한 일터에는 사람이 없어 애를 먹는 처지다.
종류도 다양하기에 도대체 몇 가지의 복숭아가 있는가에 대해 지인을 통해 알게 되었다.
7월 상순에는 케이원과 당황도 나오고, 중순에는 조생 미백과 동막 조생, 하순에는 그레이트가 나와 한여름 과일로 인기 만점이다. 8월 초순에는 천중도, 하순에는 애천중도, 유명, 중황도, 명품왕, 앨바백도가 수확된다고 한다. 9월 초순에는 황귀비, 대향금, 중순에는 장호원 황도, 하순에는 양흥장, 이렇게 많은 복숭아가 제각기 맛이 다르고 지역 특산물로 유명하여 복숭아 축제가 열리는 날엔 인산인해를 이뤄 발 디딜 틈 없이 최고의 축젯날이 된다.
일 년 내내 비지땀 흘린 농부들이 결과를 얻어내고 함께 기뻐하는 날은 지역 주민들만이 아니라, 각 지역에서 몰려와 함께 즐기고 축하해 주는 날이다. 나 역시 제2의 고향으로 맺어 살고 있는 장호원이 자랑스럽다. 자랑스러운 고장에 와서 살고 있으면서 복사꽃이 필 때면 아버지 기침 소리가 들려오고, 탐스러운 복숭아 한 잎 베어 물으면 고향 집 울안이 그리워진다.
아버지가 계신 하늘나라에도 택배 길이 열리면 얼마나 좋을까?
눈으로만 잡수시던 복숭아를 많이, 아주 많이 보낼 수 있는데 하는 아쉬움에 그리움은 더 깊어져 가고 아버지의 기침 소리는 귓전에서 맴도는 밤, 오늘 밤엔 유난히 아버지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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