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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ple01_next.gif이경옥 수필가 문학서재

ㆍ작성자 이경옥
ㆍ작성일 2021-01-09 17:40
ㆍIP: 175.xxx.237
늑대가 산다.
2. 늑대가  산다.

어둑어둑해진 골목길을 나선다. 딱히 무언가를 하려고 나선 길은 아니다. 조금 푹하다 느껴진 밤공기가 좋아서, 평소보다 더 커진 달이 사방을 대낮 같이 밝혀서, 그대로 두기엔 아까운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기 아쉬웠다고 할까.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일. 자연을 자연으로 마주하기엔 나는 너무 속세에 물들었다. 새해가 되어 많은 걸 계획해도 실상 이루지 못할 것을 알기에 답답해진 마음, 달의 정기라도 받아볼까나 하는 것, 요것이 팩트지.

걸을 때마다 앞집 콘테이너 그림자로 응달진 도로엔 아직 녹지 못한 눈이 밟혀 뽀드득 신음을 한다. 깨끗이 씻은 보드라운 살결처럼 보송보송한 눈송이들이 납작 눌리면 체중을 실은 발자욱 하나 또렷하게 태어난다. 길을 잃은 곳엔 띄엄띄엄 목적지를 정한 길이 생기고 발가벗은 나뭇가지 사이로 달빛이 비추면 무늬마다 반짝이며 생기가 돋는다. 아무것도 티나지 않는 길을 찾는 것은 무한의 발자국이 남는 일. 이렇듯 누군가 뿌려둔 눈의 설계는 몇 개의 발자국으로 쉽게 길을 찾는다.
어깨를 맞댄 봉우리를 향해 손지붕이 쌓이고, 멈췄던 밤공기 자욱하게 산등성이 휘감아 돌면 묵향 풍기는 중심에 우뚝선 나는 수묵화 한 폭으로 남는다. 총총거리는 별 몇 개 소심하게 띄운 수묵화는 이승과는 다른 몽환의 세계를 연다. 상상이란  지상의 시간을 지운다.  잃어버린 時界의 자유로운 영혼은 붙박힌듯 멈춘 육체를 버려둔 채, 달빛을 향해 떠오른다. 욕심을 지워낸 영혼의 무게는 가벼워 부푼 달 속을 모두 차지해도 혼자라는 사실은 허전하긴 매한가지. 짝이라도 찾아 절구질이라도 해야하나 속을 드러낸 산세를 훑는다. 길 잃은 토끼 한마리 꼬셔볼까 하여..

가로등이 무색해진 고요한 동네. 걸음조차 걷는 것을 잊은 공간에 어디선가 하울링이 들려온다. 눈을 뜬 육체는 스산한 울림에 영혼을 불러들이고 뒤를 돌아 눈위에 새겨진 이정표를 찾는다. 밝았던 허공은 금새 어둑해지고 바람결 따라 눈꽃이 날린다. 바짝 여민 옷깃 안으로 눈꽃의 화살은 쏟아진다. 수묵화는 살아났다. 평온하던 몽환의 세계는 깨어지며 공포의 지상을 소환한다. 우뚝 솟은 봉우리는 나를 향해 다가오고 멀리서 들려오던 하울링은 점차 가까워진다. 바빠지는 걸음은 새로운 길을 만들고 목적지는 바뀐다. 숨이 가빠온다. 한기와 열기가 교차된다. 눈꽃은 순간의 반짝임으로 눈물로 진화한다. 겁 없던 밤의 산책은 겁 많은 여인을 죄인으로 만든다. 자신을 피해자로 만든 가해자는 결국 자신이다. 빨라진 발걸음이 불완전 교차를 이루며 미끄러진다. 죄없는 엉덩이는 수백톤의 무게로 짖눌린다.

고요속의 외침, 아무도 듣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저 앞에 멀뚱히 선 검은 그림자. 낭군님. 꺼이꺼이 웃는다. 추가로 한마디를 보탠다.
"쇼를 해라 아주~"
젠장, 쪽팔려. 이래서 눈 내린 밤엔 함부로 싸댕기면 안된다. 달빛에 홀리지 마라. 산토끼? 개뿔, 쥐한마리 없으니 환상은 집어 치우자. 누구를 위한 산책인가? 얻은 것은 빨랫감과 엉치뼈의 뻐근함, 낯익은 자의 비웃음, 그리고 또 한 번 깨달은 이불 밖의 위험함.. 쩝.

문득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이 모든 사단의 원흉인 하울링이 더이상 들리지 않는다. 분명 소름끼치도록 길었던 저음의 소리가 귓가를 파고 들었었다. 어디로 숨어들었는지 다시 적막강산이다. 단 하나의 움직임. 집앞 가로등 아래 서있는 낭군님이 손짓. 어기적거리며 걸어야 하는 거리 대략 2미터정도. 눈은 지랄맞게 퍼 붓는다. 점퍼의 모자를 푹 눌러쓰고 무겁고 아픈 걸음을 뗀다. 하나, 둘.. 바닥에 꽂힌 시선은 앞을 보지 못한 채, 세월과 네월을 찾는다. 갑작스럽게 검은 물체가 시야에 담긴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드니, 낭군님의 등이 눈 앞에 주저 앉는다. 얼떨결에 업힌 나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지어진다. 차갑던 옷깃의 온도가 점점 오른다. 가슴에서 퍼지는 두근거림이 업힌 등에 메아리친다. 메아리의 속도가 빨라진다. 이런, 무거운가보다. 미안해죽겠다. 그만 내려다오. 털썩.

그 때,

하울링이 들린다. 길고도 깊은 울림. 두꺼운 점퍼 속, 온 살갗을 훑고 작은 봉우리를 수도없이 밀어 올린다. 하얀 눈꽃 사이로 비릿한 웃음을 짓는 늑대를 본다. 눈빛이 마주쳐 온다. 자취를 감췄던 달은 저 눈빛에서 몰락하고 있었다. 이 밤을 잡아먹던 늑대가 곁에 서 있다. 그랬다. 분위기 잡고 홀로 산책을 하려던 나의 영혼은 혼인신고서에 도장을 찍던 그 순간 이미 지구를 탈출했다. 잠시 깜빡하고 있었다. 나는 껌딱지를 달고 살았다는 걸. 굵고 짧아진 하울링이 정수리에서 퍼진다.

"자기야~ 늦었다. 자러 가자"

어이쿠.. 내 곁에 늑대가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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