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창작문학예술인협의회/대한문인협회-수필

ㆍ작성자	김상훈
ㆍ작성일	2019-04-16 22:33

ㆍIP: 220.xxx.2

오월 같은 여자

김상훈

바람의 방향이 속내를 들킬 것 같은 눈부신 햇살이었다. 바람의 등을 타고 남단 끝자락에서 다가올 오월의 신부는 예전에 그랬듯, 이번에도 필시 화장기 없는 얼굴로 나타날 것이었다. 이를테면 틀에 머리인 양 말아 올린 먼 산봉우리의 휘부윰한 톤이 그랬고 유예된 빛이 없는 푸른 바다 색깔이 그랬다. 현기증이 날 정도로 맑은 바람이 내 기억마저 쓸어버리는 아침이면 해를 어깨에 걸머진 산의 키가 훨씬 낮아 보였다.

빛으로 둥근 갓을 쓴 오후, 어느 곳에서나 눈을 들면 까만 도포 위로 아지랑이에 눈시울이 아렸다. 너울춤을 추는 아지랑이를 보면서 나는 사막 한가운데를 지나가는 낙타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신기루가 나타나듯이 어디선가 불쑥 아카시아 향기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저녁나절이면 고금(古今)의 비밀을 간직한 낙조가 차고 비는 자연의 이치를 상영했다.

사나흘, 올망졸망한 작은 어촌에 머물면서 나는 이와 비슷한 느낌의, 오월 같은 여자와 마주쳤다. 단정한 입성에 다소곳한 몸가짐, 별것 아닌 말 건넴에도 특유의 우물거리는 소리로 귓불이 발개지곤 했지만 용기를 내 쳐다보는 눈빛은 고즈넉한 호수처럼 그지없이 조용하고 맑았다. 그런데 그녀의 몸에선 제철도 아닌데 왜 산국화 꽃 향기가 났을까.

붉은 벽화 그리는 저녁나절, 바닷물에 반쯤 몸을 담그고 먼 시선으로 수평선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듯 꺽꺽 우는 여자를 보았다. 눈에 익은 헤어스타일과 옷이었다. 제철도 아닌데 산국화 향기가 나고 몸 태가 나고 눈빛이 마치 오월 같았던 그 여자였다.

평소 궁금했던 그녀에 대한 의문이 차츰 풀리기 시작했다. 머리통만 한 탁배기 잔을 단숨에 비우자 그녀의 입술 끝 막걸리가 강원도 사투리로 뚝뚝 떨어졌다. 녹슨 문고리가 유독 눈길을 끌었던 허름한 술집에서 탁자를 가운데 두고 마치 나는 무슨 잡지사 기자라도 되는 양 메모지를 들고 마주 앉았다. 그녀의 말을 적는 게 아니라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저 위아래로 줄긋기만 하는 그런 메모지였다.

마을 나들목이 츠렁 바위 칼 벼락인 홍천 어딘가가 고향이라는 그녀는 다락 밭에서 죽도록 일만 하다 까막눈으로 열여섯에 시집가던 첫날밤, 그 길로 야반도주했단다. 평생 그녀의 도시는 꿈이 아니었다. 존재적 내상만 키운 감옥이었고 찔레꽃 자지러지게 피면 돌아올거나 애끓는 엄니에겐 죽도록 갚을 빚이었다.

막서리 밥으로 연명하다 흘러 흘러 남단 끝자락까지 오면서 떠도는 팔자에 무슨 이름표가 있겠느냐며 두 번 만난 남정네가 모두 모진 뱃놈이고 바다에서 죽었다 했다. 턱수염 까실한 마지막 남정네가 미치도록 그리워 꺼이꺼이 울던 그녀 뒤에서 까닭 모를 서러움으로 나도 모르게 눈물이 그렁거렸던 것이다.

상황을 잃어버린 그녀의 얼굴에서 생에 대한 기막힌 손사래가 보였다. 산국화 꽃 향기와 입술 끝 막걸리 사투리가 혼합돼 그동안 각인되었던 이미지가 마구 흔들렸다. 지극히 감성적으로만 느꼈던 그녀의 겉모습과는 달리 투박하기 이를 데 없는 그녀의 생을 훔쳐본 나로선 그 감성 때문에 무엇인가가 더욱 끓어올랐다. 양면성 아니라 너무나 상반된 것들의 충돌 같은 것이었다.

화장실을 다녀오겠노라던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니, 내가 그 어촌을 떠날 때까지 그녀의 모습은 종내 볼 수가 없었다. 남긴 흔적이라곤 그날 탁자에 놓고 간 그녀의 머리핀이 전부였다.

생이 부동의 함수라는 것은 거짓이다.

- 벌목 당한 기억 사이로 -

김상화

2019-04-17 00:17

`김상훈` 님이 선택한 답글 입니다.
아름다운 사월도 중순이 지나네요
무엇하나 뚜렷하게 남긴 것 없이 세월만 흘러갑니다
오월 같은 여자는 어떤 여자일까요?
아마도 김상훈 위원장님 마음을 사로잡는 여자겠지요. ㅎ
그러네요, 아마도 오월은 계절의 여왕이니 얼마나 아름답겠어요
장미꽃이 만발하지요, 라일락 향기를 풍기지요
우리가 삶에 가장 적당한 온도를 하늘에서 내려 준다니 오월은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 맞습니다
위원장님 밤이 깊었네요, 행복한 꿈 꾸시기 바랍니다


김상훈	작품 한 번 끝내면 종종 휙 바람 쏘이러 혼자 멀리 가버리곤 합니다. 수필집을 내기 2~3년 전쯤 이야기가 되겠네요. 지금도 가슴이 마냥 찡~해옵니다. 일착으로 반겨주셔서 참 감사합니다. 루스님 글 언제나 배독 잘 하고 있습니다. 고운 꿈 꾸십시오.^^	4/18 01:44

정찬열

2019-04-19 15:03

`김상훈` 님이 선택한 답글 입니다.
밤낮의 기온이 허락없이 주출대는 4월도
어느덧 중천을 넘어 석양으로 달리네요
5월이면 어느여성들이 들성이는 밤꽃향기에
아카시아 향기 그윽한 오월이 머지 않은날
수필작가 위원장님께서 올려주신"오월같은 여자"
찔레꽃도 자지러지게 피며는 그 오월을 마냥 기다림은
흔적없는 생의 부동의 함수라는 계절의 여왕 오월을
속절없이 다가 오겠지요
편안한 날 안녕하시길 기원 드립니다.


김상훈	우리 작가촌에 이사님과 몇 분이 활동을 안 하시면 정말 썰렁한 공간이 되겠습니다. 사실은 자발적 참여가 관건인데 이상하게 작가촌만 좀 늘어지는 느낌입니다. 몇몇이 열심히 한다고 되는 건 아니지만 그나마 튼튼한 기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늘 고맙고 감사합니다.	4/21 16:30

김종덕

2019-04-22 14:51

`김상훈` 님이 선택한 답글 입니다.
김상훈 위원장님, 안녕하십니까? 다가오는 오월, 그 속에서 볼 수 있었던 한 토막같은 인생이야기. 누구의 것이든 그 모두는 지문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고독한 삶에 한잔의 막걸리를 바치고 싶습니다. 건강하시고 행복하십시오.


김상훈	지나간 글이라 좀 망설이다 올렸습니다. 순전히 다음달이 5월이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ㅎㅎ 저 여인의 소식이 저도 무척 궁금합니다만 우리의 연은 아마 거기까지인가 봅니다. 다녀가심에 진심 감사드립니다.	4/23 02:06

김경렬

2019-04-26 05:59

그냥 지나칠뻔한 이야기를
이리도 맛깔 스럽게 펼치셨군요.
필력에 감동합니다.


김상훈	누구나 비밀 아닌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몇 개쯤은 간직하고 있으리라 봅니다. 저는 좀 뻔뻔한 구석이 있어서인지 수필집을 내면서 몇 개는 그냥 썼습니다. 방문 감사합니다.	4/26 20:43

장춘희

2019-05-01 10:29

그 여인이 그리 황망히 떠남은
선생님의 눈빛이 발목 잡힐 것
처럼 강렬했던가 봅니다.
참 안타깝습니다만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선생님의 가슴속에
애닮으로
살아 있어 다행입니다.
선생님은 죽을 때 까지
사랑을 하는 작가니까요.


장춘희	애닮픔	5/1 10:31

한유경 2020-03-01 01:18	처음 수필서재에 들어왔습니다 오월같은 여자라 해서 계절의 여왕처럼 아름다움만 생각하였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머리를 때리는 강한 느낌을 가지고 갑니다

노을, 참 이상도 하지

우리는 가끔 마주치는 황홀함으로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