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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금주 김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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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훈 수필가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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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ㆍ작성자 |
김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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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ㆍ작성일 |
2019-03-30 05: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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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일그러진 씨방새
김상훈
"우주 상회(雨酒商會)"
바뀐 간판 이름이었다. 한자를 보곤 실소를 금치 못했다. 비 오는 날 술을 마시면서 대체 무엇을 판다는 것일까. 누군가 또 무식한 조 사장을 살살 꼬드겼을 터였다. 필경 유식한 박 부장 짓 같았다. 상사(商社)라는 명칭이 필요했다면 사단법인 승인이 필요했을 터였고 승인을 받으려면 거기에 상응하는 서류가 필요했을 터인데 거의 백수 모임이나 다름없는 이 조직이 무슨 이력이 있다고 승인을 얻을 수 있으랴. 우주 상회를 통틀어 가방끈이 가장 긴 박 부장은 한 때 모 국회의원 보좌관이기도 했다. 국회의원과 군의원 선거까지 치르면서 조 사장은 돈의 위력을 실감했을 것이고 출근 때마다 마치 조폭들처럼 좌우로 서서 인사하는 직원들을 보곤 거하게 흐믓하였을 것이다. 그 맛을 떨칠 수가 없어 선거 때 임시로 모였던 동네 후배들 모두 직원이라는 명목으로 채용했다. 각자 자영업을 겸하고 있으니 봉급은 용돈 수준이었지만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불만을 품지 않았다.
이 시대에 참 기가 찰 노릇이지만 업무라는 것이 고작 출근도장이나 찍고 조 사장 호출이 있으면 모였다가 저녁이면 주구 장창 음주가무로 일과를 마치는 게 고작이요 월급이라는 명목으로 용돈까지 주니 이 같은 직장이 지구 상에 어디 있으랴. 한 마디로 어느 졸부가 돈을 줘가며 병정놀이를 하고 있는 셈인데 직원들은 공짜로 술 마시고 돈까지 받으니 좋고 조 사장은 꿈도 꾸지 못했던 직장 상사 노릇을 할 수 있으니 서로 원하는 바를 채워주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우주 상회였다. 장난기가 발동한 박 부장이 번개처럼 떠오른 간판 이름 우주 상회, 직원들이야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지만 무식한 조 사장을 배려한다는 차원에서 무조건 멋진 상호라고 추켜 세웠고 우주 상회는 간단하게 우주회(雨酒會)로 불렸다. 완벽하게 비 오는 날 술 마시는 모임이었다.
초대받아 간 날 창문을 통해 살그머니 안을 들여다보니 조 사장을 정점으로 직원들이 회의 석상에 둘러앉았고 그는 한참 열을 올리는 광경이었다. 희미하지만 내용은 비교적 정확히 들렸다.
" 한다 한다 헝게 너머들 하구망~ 아, 먼넘의 술들을 요리 찌끄러 부렀댜? 요본 달 술값이 이천 만원이여, 이 천! 하, 얼척 읎네잉~ 암턴, 너~~무들 마셔! 어이, 장 과장 워티기 생각혀? "
무슨 대답을 어떻게, 뭐라고 할 수 있으랴. 일 년 삼백육십오 일을 거의 본인 주도 하에 이뤄지는 밤무대 생활이고 어느 땐 휴일조차 직원들을 불러내 퍼마신 주범이 바로 본인이었다. 이런 타박 한두 번 들어본 바가 아닌 듯 직원들 표정은 대부분 심드렁했다. 직장 아침 회의가 한 달 술값 질타라니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었다. 글도 모르는 조 사장은 펼쳤던 장부를 신경질적으로 덮곤 잠시 휴식을 선언했다.
복도로 나오는 직원들과 마주쳤다. 그들의 입에서 탄식처럼 쏟아져 나오는 단어는 한결같이 "씨방새"였다. 자판기에서 뽑아낸 커피를 홀짝이며 나도 덩달아 씨방새 맞지 뭐, 했다. 직원들끼리 사용하는 조 사장 별명이었다. 그의 별명이 당나귀에서 씨방새로 바뀐 지 몇 달쯤이었다. 별명을 오래 사용하면 눈치챈다는 이유에서였다.
일체 무식하지만 돈은 있고, 직원들은 있으니 사장 노릇은 하고 싶고, 몇 년간 병정 놀이를 하니 그 맛을 잊을 수는 없는 그에게 얼렁뚱땅 기분 맞추려니 자존심이 상한 직원들이 생각다 못해 지어낸 별명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에서 싹둑 잘라버린 통칭 당나귀였다. 아예 학교 문턱도 가 본 적 없는 조 사장이 그 우화를 알 리가 없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장 과장의 친절한 설명인즉슨, 당나귀는 곧 임금님을 뜻하는 것이므로 사장님을 곧 임금님처럼 모시기 위해 지었다는 취지를 듣곤 그 말에 도취된 조 사장의 건배사는 늘 술잔을 높이 들고 있는 힘을 다해 외치는 당나귀~! 였다. 그 건배사가 지금은 씨방새로 바뀐 것이다. 상상만 하여도 콧물이 터질 코미디였다. 상상해 보라. 술잔을 높이 들고 일제히 소리치는 씨방새~! 를.
곧이어 경리의 부름에 나도 함께 들어갔다. 반색을 하며 반기는 조 사장과 박 부장의 인사를 받고 자리에 앉았다. 연중 행사처럼 나가는 외국 여행에 관한 토의였다. 뚜렷한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조 사장은 꼭 나를 동반하고 다녔다. 딱히 거절할 이유나 명분도 없었다. 왕복 비행기표와 숙식비를 모두 그가 지불했다. 나는 그저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유럽은 꿈도 안 꾸고 오로지 동남아 일대만 다니는 여행이지만, 그 이유도 실은 비용 절감 차원과 코쟁이 나라는 무조건 거부하는 조 사장 때문이었고 한국 화폐와 달러를 쥐고 흔들어대는 포만감이며 가난한 나라에 대한 얕봄이었다. 예전에 섬나라 원숭이들이 기생 관광차 한국에 오는 일과 너무나 닮은꼴이었다.
몇 나라를 지명하곤 한창 갑론을박하던 조 사장이 갑자기 말문을 막곤 아주 신경질적이고도 몹시 화가 난 표정으로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 어이, 김 과장! 나가 쪼까 궁금헝거시 있는디 씨방새가 진짜루 먼 뜻이여? "
지목당한 김 과장은 물론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다들 서로 눈치를 보며 머뭇거렸다. 모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짧은 틈새에 나는 그들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올 것이 왔구나. 눈치챘나? 누가 말한 건가? 그때 괜히 바튼 기침을 연발하던 박 부장이 나섰다.
" 저.... 사장님요. 그기 마 이렇심더. 사람이락 카모 사람마다 와 조상들이 안 있십니꺼? 바루 그거라예. 사장님도 조상이 안 기십니꺼. 새도 조상이 있닥 캅니더. 그라이까네 새의 조상을 조상새락 카고 그 조상새의 조상새를 씨방새락 카능 기라예. 이바구 딱 정리해가 한 마디로 임금, 회장, 뭐 대빵 이런 뜻잉 기라예 "
어렴풋이 기억나는 영화 속 대사였다. 그것도 사뭇 진지한 어조로 말을 하니 제법 그럴듯하게 들렸다. 찌푸린 미간이 슬며시 펴지며 조 사장의 안면 근육이 풀어졌다. 참 간단한 사람이었다.
" 그려? 긍게 나가 시방 대빵이다 요말이여? 아하, 근디, 이쁜이 요 상녀러.... 아니, 고 쌀매들년은 왜 욕이라고 뻑뻑우기능 겨? 거 참. "
이쁜이라고 지칭하는 여자는 조 사장의 네 번째 여자였다. 최근에 헐례 붙은 사이였다. 주말이고 하니 다들 시원한 맥주나 한잔 하자면서 일찌감치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바닷가 근처 음식점에서 우리는 평소보다 더 높이 술잔을 들고 목이 터져라 외쳤다. 조 사장이 씨방새~! 하면, 우린 모두 우렁차게 위하여~! 를.
참으로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니고 있는 것이 삶의 형태라고는 하지만 웃음 뒤에 찾아오는 저 진한 페이소스(비애)...... 꼭 찰리 채플린의 전용물만은 아닌 듯싶다. 그는 지금도 부산 근교 소도시에서 전형적인 졸부의 모습으로 잘 살고 있다.
- 벌목당한 기억 사이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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