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창작문학예술인협의회/대한문인협회-수필

ㆍ작성자	박정근
ㆍ작성일	2015-05-06 14:36

ㆍIP: 183.xxx.242

수박서리 이야기

수박서리 이야기 글 / 박 정근

휴일에 필요한 용품이 있어서 시내에 있는 마트로 장을 보러 갔다. 어느새 과일 판매대에 등장한 싱싱한 수박을 보면서 어린 시절의 추억 하나가 생각나 혼자 빙그레 웃으며 한통을 집어 들었다.
내가 학창시절을 보낸 곳은 경부 고속도로와 호남 고속도로가 모이기도 하고 다른 방향으로 갈라 지기도하는
회덕 분기점에 인접한 들말 이라는 지명의 작은 마을이었다. 동네 앞쪽에는 갑천이라는 금강의 지류가 흐르고 있고 지명이 말해 주듯 넓은 들판을 앞마당 삼아 자리한 비교적 넉넉한 인심의 평화로운 시골 마을이었다.

우리 마을 강가에는 유난히도 많은 땅콩 밭과 수박밭이 있었다.모래가 적당히 섞인 토질이 땅콩이나 수박을 재배하기에 적합하기 때문이었다.그때만 해도 강물이 맑아서 여름이 오면 강가로 나가 멱을 감기도 하고 물고기를 잡으며 까까머리 녀석들은 하루해가 저물도록 강가에서 놀며 무더운 여름날을 이겨내고 있었다.물놀이가 워낙 운동량이 많아서 쉬 배는 고파오고 손만 뻗으면 닿을듯한 거리에는 탐스럽게 익어가는 수박이 지천 이었지만 사방이 훤히 틔어있는 높다란 원두막의 주인 할아버지는 괜한 헛기침과 긴 곰방대로 놋 재떨이를 두드려가며 수박밭 근처에는 오지도 말라며 엄포를 놓으시니 그 많은 수박도 그저 그림의 떡일 수밖에 없었다.

그날도 대여섯 명의 까까머리 녀석들은 온종일 물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배고픔에 지쳐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갈증과 허기에 지친 녀석들에게 달콤한 수박을 그저 침만 흘리며 바라볼 수밖에 없다는 것은 고문과도 같았고 도저히 그 달콤하고 시원한 수박의 유혹을 참지 못할 것 같았다.
오늘밤에 수박서리 하자는 한 녀석의 갑작스러운 말에 녀석들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번지더니 집으로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옹기종기 모여앉아 오늘밤의 수박 서리를 모의하기 시작했다.
어느덧 해가 지고 날이 어둑어둑해지자 문제의 그 녀석들이 수박밭이 내려다보이는 강둑에 하나 둘 모여들어 배를 깔고 납작 엎드려 원두막의 동정을 살펴보고 있었다.그러나 그날따라 밤하늘에는 유난히 밝은 달이 두둥실 떠올라 강가를 환히 밝히고 있었다.

녀석들의 작전은 대충 이런 것이었다.
겁이 많은 세 녀석은 밑에 있는 도랑에 숨어 있다가 밭에 들어간 녀석들이 수박을 따서 굴려주면 그 수박을 챙겨서 준비해간 정부미 포대에 담아 약속된 장소에서 기다리는 것이고 배짱좋고 달음박질 잘하는 네 녀석은 수박을 따서 도랑으로 굴려 주고는 주인 할아버지를 반대 방향으로 유인하며 도망치다가 약속된 장소로 모이는 나름 그럴듯한 작전이었다.그러나 그날따라 유난히도 밝은 달빛은 수박밭에 숨어드는 것을 여전히 방해하고 있었다.수박을 굴려 주기만 기다리는 녀석들은 도랑가에서 애를 태우고 있었지만 밭으로 숨어 들어갈 녀석들은 아직 수박 근처에도 갈 수 없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침묵을 깨고 한 녀석이 조용히 말했다. 동네 형이 알려준 대로 옷을 홀라당 벗고 알몸으로 모래밭을 기어 들어가면 감쪽같다고 속닥거리자 녀석들은 선택의 여지 없이 서둘러 알몸이 되었다.
그 선택이 어떤 결과로 돌아올지는 생각지도 못한 체 녀석들의 서리가 드디어 시작되었다.달빛이 밝기는 했지만 홀랑 벗은 몸으로 납작 엎드려 기어가니 도무지 사람인지 모래인지 모르게 정말 감쪽같았다.그렇게 살금살금 기어가서 수박 대여섯 통을 따서 도랑으로 굴려주고 살금살금 밭을 나가려는 순간 이상한 소리를 눈치채신 주인 할아버지의 고함 소리가 천둥처럼 들려오고 밝은 손전등이 수박밭 구석구석을 환히 비추기 시작했다.순간 작전이고 뭐고 덜컥 겁이 난 녀석들은 걸음아 나 살려라 뿔뿔이 흩어져 삼십육계 줄행랑을 쳤다.

그렇게 한 시간쯤 지나서야 약속 장소인 인적 없는 강둑 아래로 모여든 녀석들은 주먹으로 내리치고 무릎으로 깨서는 빨갛게 익은 달콤한 수박을 밝은 달빛 아래에서 맛있게 먹으며 입가에 환한 미소를 지어가며 큰일 이라도 해낸 양 성공적인 수박 서리를 자축하고 있었다.
그렇게 수박 서리가 탈 없이 끝나는가 싶었는데 갑자기 손전등이 번쩍 번쩍거리며 둑에 벗어놓은 옷가지를 손에든
할아버지가 지게 작대기를 휘둘러 가시며 이놈들 하시며 다가오고 있었고 녀석들은 기겁을 해서 혹시라도 얼굴을 들킬까 싶어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린 체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뒤도 한번 못 돌아보고 도망치기를 십여 분 뭔가 허전하다 싶어 두리번거리다 보니 아뿔싸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못한 알몸 이었다 어쩔 수 없이 까까머리 네 녀석은 급한 데로 까칠 까칠한 호박잎을 따서는 겨우 앞섶만 가리고 집으로 숨어 들어가며 녀석들의 수박 서리는 한밤의 나체 질주 극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려야 했다.

동이 터올 무렵 온 동네가 다 들리도록 수박밭 할아버지는 동네 한가운데 있는 우물가에 챙겨온 옷가지를 빨래 널듯 널어놓고 옷 임자 나오라며 노발대발 역정을 부리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온 동네가 소란스러워 지고 무슨 일일까 나가 보셨던 어머니께 멱감다 옷이 강물에 떠내려갔다고 거짓말 한 것은 물론 남의 수박밭 서리 한 것까지 모조리 들통이 난 녀석들은 부지깽이로 호되게 얻어맞아 종아리엔 수박 무늬보다 더 선명한 회초리 자국을 남겨야 했다. 더위에 긴 바지를 입을 수도 없고 그 꼴로 밖에 나가면 옆집 혜선이도 놀려댈 것이 분명하니 어쩔 수 없이 집안에서 무료하게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는데 옷을 벗지 않아 들키지 않은 녀석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담 너머로 혀까지 날름날름 약을 올려가며 강가로 멱 감으러 가버리고 집안에 붙잡힌 네 녀석의 그해 여름은 이제껏 지내온 여름 중에 가장 더운 여름을 지내야 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수박밭 할아버지는 누가 수박 서리를 한 겄인지 마음만 먹으면 금방이라도 다 알아낼 수 있었지만 그 정도의 경고로 마무리를 지으신 건 아마도 할아버지 또한 서리의 재미를 이해하시는 것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요즘은 서리가 무언지 모르는 아이들이 더 많을 것 같고 서리를 했다가는 그 정도의 경고로 끝나지 않고 경찰서로 끌려가 법적인 처벌은 물론 금전적 배상까지 해야 한다는 사건기사를 본 적이 있으니 40세 전후의 남자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경험이 있을 서리의 추억도 이젠 먼 옛날의 흘러간 이야기일 뿐이니 각박하고 잔재미 없는 세상이 된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데 ...,
이 수박 서리에는 큰 비밀이 하나 숨어있었다.
수박을 정부미 포대에 담아서 옮겨간 녀석 중에는 수박밭 할아버지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을 하시는 그 댁 큰 손자도 끼어있었다.

백낙은

2015-05-06 15:57

박정근 작가님. 본래 충청도 양반이셨군요.
갱상도도 그랬는데 충청도도 그랬나요? 나는 수박 서리를 안해봐서 그런데 지금 듣고 보니 진짜 재미 있었겠네요. 수박 밭 주인에게는 미안하지만 말입니다.
순사들 찾아와서 잡아가면 어쩔려구 이실직고를 한답니까?
마지막 비밀은 더 쇼킹 하네요. 수박밭 큰 손자까지 있었다니 말입니다.
그 때는 그래도 웃을 수 있었는데 지금은 각박해져서 그런지 절도죄가 되겠지요.
털어 놓는 김에 다른 짓? 까지 다 털어 놓으세요. 속 후련하게...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평안하소서.


박정근	백낙은 작가님 안녕하세요~^^ 네~ 충청도가 고향입니다. 제가 태어난 곳은 청주 근처 내수라는 곳입니다. 운보 김기창 화백의 갤러리가 있는 그 곳이 제가 태어난 집입니다.공소시효가 지났으니 마음놓고 고백을 해봅니다 ㅎㅎㅎ 작가님이 남은 여죄까지 털어 놓으라 하시니 속죄의 마음으로 그렇게 하겠습니다 함께해주셔서 감사드리며 늘 평안하시길 기원드립니다~~^^	5/8 08:21

김경렬

2015-05-07 03:30

수박서리!
재미 있습니다.
옛날 우리들 시절은
간식이 없던 시대라서
밭에서 서리를 많했었지요
콩서리.옥수수서리.청년들의 닭서리.~~~
인심이 순박했던 시절의 일화들.....
저는 읍내에 살아서 기회가 없었던것이 아쉽기도 합니다.
즐겁게 배독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박정근	김경렬 작가님 안녕하세요~^^ 서리 요즘은 많이 사라진 추억의 한장면 입니다 설사 들킨다 해도 호된 꾸지람 정도로 끝내셨고 돌려 보내시며 서리한 과일을 서너개쯤 들려 보내주시던 정스러운 시절이었습니다.작가님 연배의 서리는 어떤 모습인지 갑자기 궁금해 집니다 ㅎ 함께해 주셔서 감사드리며 늘 평안 누리시고 고운 글향 맘껏 지피시길 기원 드립니다 작가님~~^^	5/8 08:34

서수정 2015-06-10 11:51	수박서리 읽는 내내 입가에 꼬리가 치켜 올랐습니다 어릴적 친구들과 화양동 계곡에 놀러가서 수박 서리를 한번 한 적이 있었습니다 밤 새 잠안 자고 기다리다 새벽녘이 되어서 수박 한통을 따왔는데 정말 꿀맛이었습니다 어린시절 행복한 추억 한페이지 열수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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