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장마에는 비가 내리지 않아 걱정이 많았는데 다행히 올해는 장마가 이름값을 하는 것 같다.
세상의 모든 이치는 어떤 원칙에 따라 주기적으로 반복 하기 때문에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그런 주기에
길들여 있고 상당히 불편한 일도 별로 의식하지 않고 잘 적응하며 살아가고 있다.
추운 곳은 추워야 하고 더운 곳은 더워야 한다. 극지의 기후가 따뜻해져 얼음이 녹는다고 걱정이지
따뜻해 져서 좋다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다. 한꺼번에 쏟아붓는 장마도 그런 의미에서 보면 오히려
마음 놓이는 자연의 선물이다.
도시 사람들은 집안에만 있으면 비가 내리든 말든 별로 느낌이 없게 마련이다.
소운도 서울 아파트에 있을 때는 남이 알려준 문자 덕에 비가 오는구나 할 때가 많다.
그것도 부엌 쪽에 난 작은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봐야 정말 비가 오는구나, 하고 실감하게 된다.
비가 내리면, 마음이 편안해져 오는 느낌은 나만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비가 오면 마음이 편해진다.
이런 편안함에 대해 생각해 보니, 아마도 나와 세상 사이에 뭔가 커틴을 친 것 같은 그런 안도감 같은 것이리라,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게기가 있다. 언젠가 호우로 인해 큰 피해가 난 해가 있었다.
강원도 쪽은 도로가 유실되어 교통이 한동안 끊어질 만큼 많은 비가 내렸는데, 그 무렵 소운은 평창 집에
머물고 있었다. 도로도 끊기고, 전기도 끊기니, 당연히 수도도 끊겼다. 처마에 물통을 놓고 빗물을 받아 화장실
을 사용해야 하고, 밤이면 촛불을 켜야 하는 암흑 속에서 문득 편안하다는 안도감 같은 걸 느꼈다.
서울을 떠나 있어도 뭔가 나를 옥죄는 막연한 불안감이 늘 있었다.
뭐가 잘못되었다고 벌금 딱지도 날아오고, 쥐꼬리만 한 일을 두고도 세무신고가 어떻고 이런 자잘한 소속에
따른 의무가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외에도 밖으로 연결된 통신은 언제 무슨 소리로 나를 찾을지 모르는
세상과 연결된 어떤 끈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우리의 삶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간혹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주민등록도 말소하고 깊은 산 속에서 세상과 인연을 완전히 끊고 살면 마음이
편안해 질 것 같다는 생각,
수해를 입어 세상과 단절된 봉평 집에서 맛본 해방감, 나를 찾는 전화도, 오고 갈 교통도 없고 찾는 이도 없는
아, 행복한 해방감!
지금 사는 양평 집은 재미있는 곳이다.
문명의 이기라 할 전철이 천둥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곳이지만 밤이면 개구리 울음소리가 요란한 곳이기도
하고 몇 걸음 거리에 큰 판매시설이 있지만, 사람 왕래가 거의 없는 한적한 곳이기도 하다.
팔만 뻗으면 도시이고 움츠리면 적막 산천이랄 수도 있는 정말 멋진 곳에서의 삶이 소운은 행복하다.
소운의 집은 울타리도 없다. 주말이면 어쩌다 지나치는 등산객이 마당에 들어와 나물을 캐기도 한다.
경계가 없으니 딱히 주거 침입이라고 우기기도 민망해서 그냥 지켜보기만 한다.
봄철에는 아주머니들이 -야 쑥이 많네, 아저씨 좀 캐 갈게요- 쑥, 관심도 없으니 그냥 캐 가도 될 판인데.
아저씨라고 불러주는 황송한 호칭에 기분이 좋을수 밖에, -맘껏 케 가세요-
소운의 침실 창은 길가에 맞대어 있다. 울타리가 없으니 지나가다 들여다보면 보이는 그런 구조이다.
평상시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고 주말에 등산객이나 혹 지나다니는 길이니, 보이지 말라고 갈대 발을 사다가
드리웠다. 이게 또 환상이다. 갈대발을 통해 보이는 풍경도 멋지지만 발 사이로 부는 바람이 정말 좋다.
좋은 것도 잠깐, 자다가 도둑이라도 들면 어떡하지? 서울 사람 아니랄까 봐 사람 무서운건 여전하다.
비 오는 날, 맹꽁이가 창 아래서 요란하게 울었다.
맹꽁이인지 확인한 바도 없고 맹꽁이를 가까이에서 본 적도 없지만, 개구리 소리와는 완연히 다른 소리에
맹꽁이 소리라고 생각하고 들으니 정말 맹꽁이 소리가 이럴 거라는 생각이 들어 빗소리에 섞여 들리는
맹꽁이 소리가 올 장마가 가져다준 또 하나의 값진 선물이라고 기분 좋게 해석했다.
막내딸이 내방에 들렸다가 이 소리를 듣고는 "아빠 무슨 소리여요?" 묻길래 "맹꽁이 소리"
자신 있게 대답했더니 동물 사랑이 유별난 막내는 "맹꽁이요, 나가 봐야지"
사실 나도 궁금하기는 했던 차라 귀를 쫑긋 세우고 밖으로 나간 막내를 기다렸다.
"아빠, 내가 나가니까 소리가 뚝 그쳤어요," 나도 그랬지만 영 실망스러운 표정이다.
그렇다. 사람인 나도 사람이 무서워 창틀을 낑낑대며 짜 맞췄는데 하물며 맹꽁이가 감히 사람 앞에서
소리를 낼 리가 있겠는가? 그 이후로는 맹꽁이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빗소리에 화음으로 들리던 멋진 소리를 듣는 호사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장마는 아직 끝나지 않았단다. 비가 많이 내리면 이 녀석 또 창문 밑에서 멋진 소리를 낼지 은근히
기대된다. 이 장마가 끝나면 불볕더위가 잠시 기승을 부릴 거고, 머잖아 춥다고 창문도 닫게 될 것이다.
어느 돌아가신 스님 말씀이 생각났다. -살아서 이 장맛비를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을까-
여름 소묘, 소운/박목철
닫았던 창문을 활짝 열었다.
마음의 창도 같이
갈대 발 사이로 산 바람이 불고
여름 소리도 들려오고,
풀독이 무서워 버려둔 텃밭 잡초 사이로
빨강, 노랑, 방울토마토 몇 알
내 푸념 들었나 보다
"녀석들 모종값도 안 나오게 생겼네,"
안 매운 고추 종자 가려 심었었는데
앙상한 새끼손가락 녀석들
주인 게으름에 독 올랐다.
한입 베어 물고 나도 딸도 딸꾹질 했다.
갈아엎어야겠네
텃밭의 여름은 벌써 지나보다,
정찬열
2016-07-10 22:15
`박목철` 님이 선택한 답글 입니다. 늘상 반복해 읽어도 실감나는
보배로운 좋은 글에 잠시 마음
한자락 놓아봅니다. 소운작가님!
"여름 이야기"에 덧붙인" 여름소묘"
강원도 하면 때로는 우기에 시달리고
겨울이면 폭설 에 길이 막히고
봄철이면 대형 산불에 참 염려되는
곳으로 만 알았고 우리가 사는 전라도가
재앙이 제일적어 살기좋은 곳이라 생각했든
편견이 방황합니다.^^
늘 건안 하시고 즐거운 한주 되시기를 기원 드립니다.ㅋ^ㅋ^
김경렬
2016-07-09 19:36
어이구!
정말 재미있습니다.
단숨에 숨도 안쉬고 읽어 내렸습니다.
상큼한 웃음 가득 선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더위에 건강 하시기 바랍니다.
백낙은
2016-07-09 21:11
소운 작가님.
비가 내릴 때 마음이 가라앉는 경험이 저 혼자만의 느낌인 줄 알았습니다.
지금 사시는 양평 집을 여기 앉아서 그려보니 정말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전철소리는 빼고 말입니다. ㅎㅎㅎ
제가 사는 집에도 제가 파 놓은 조그마한 연못이 있는데
밤이면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린답니다. 때로는 고라니 울음소리도 들리고요.
울타리도 없고 갈대 발 걸어 놓으신 집 구경 했으면 좋겠습니다. ㅎㅎㅎ
소운님. 정말 멋진 곳에서 그 행복 날마다 배가 시키며
행복한 삶 영위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박목철
2016-07-10 10:23
《Re》김경렬 님 ,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다행입니다.
사실 요즘 글쓰기가 싫어서 한동안 쓰지 않았습니다.
평생을 보고서나 평가서 같은 딱딱한 글을 써 왔기에 문학적 글은
내키지 않을때가 많습니다.
그래도 써야지 하는 마음으로 한번씩 의무로 쓴답니다.
슴하고 덥습니다.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박목철
2016-07-10 10:28
《Re》백낙은 님 ,
저는 딱히 이게 내집이다 하는 곳이 없은지가 오랩니다.
봉평에도, 서울에도, 양평에도, 세 곳에 생활도구가 다 있습니다.
코스트코에서 준 커다란 쇼핑 주머니에 짐을 싸들고 다니곤 했습니다.
어디서도 눌러앉게 되지 않아 하루 이틀이 지나면 또 짐을 꾸립니다. ㅎㅎ
요즘은 양평에서도 글을 쓸 때가 많습니다.
언제나 따뜻하게 반겨주시는 방장님의 배려 감사 드립니다.
박목철
2016-07-14 10:39
《Re》정찬열 님
여름 행사 때 뵈어서 반가웠습니다.
작가님에 대한 소운의 감정은 늘 안타까움입니다.
얼마나 힘드실까? 작은 불편도 견디지 못하는 저로서는
댓글을 달아주시는 것 조차 부담을 드린것 같은 느낌입니다.
호남지방은 산세가 아주 평온하지요, 그래서 인심도 후한듯 싶습니다.
남쪽 사람에 비해 북한 사람들이 사나운것도 자연환경 탓이라고 합니다.
더운 여름, 더 불편하시지나 않을지 염려스럽습니다.
모쪼록 평안하시고 행복한 시간 되셨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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