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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금주 김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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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 채영제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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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ㆍ작성자 |
채영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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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ㆍ작성일 |
2018-01-31 16: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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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샛디이야기. 12
샛디이야기. 12
*
- 베일에 쌓인 외삼촌의 정체 -
아버지는 새어머니에게 파출소에 갔다 온 이야기를 하였다. 그리고 역시 남자는 남자야! 는 등으로 칭찬을 하였다.
숙부에게 연락도 오기 전인데도 파출소에서 경찰관들에게 얼마나 호랑이를 잡아 놓았던지 파출소장이라는 경위가 외삼촌에게 쩔쩔매며 시종 “예, 예.” 하며 대우를 하였고, 그의 면전에서 깡패 놈들의 뺨을 사정없이 한 대씩 올리면서 앞으로 한번만 더 우리 동생을 건드리면 그때는 아주 죽여 놓겠다고 엄포까지 놓더라는 것이다.
그것은 보통사람, 누구나 할 수 있는 처사는 아니었다.
외삼촌의 정체는 베일에 쌓여있는 것 같았다.
가정도 없는 사람이 언제나 하얀 양복에 백구두를 깨끗이 차려입고 다닌다는 것도 그렇지만, 어느 날 갑자기 몇 개월씩 행방이 묘연하였다가 또 다시 나타나서는 호기 있게 행동하였고, 자기의 신상에 대한 무수한 이야기 중에서 단 한 번도 군에서 제대를 하였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것 하며... 하여튼 나는 아무래도 외삼촌이 그냥 새어머니의 말대로 날건달은 아니고 무언가 어떤 권력기관에서 또는 어떤 비밀스런 기관 같은 데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짐작만 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얼핏 스치고 지나는 가는 이야기꺼리가 있었다.
누이는 당시 대신동에 있는 K여고를 다닐 때였다. 학교를 파하고 동무들과 전차를 타고 충무동 로터리에 내려 충무국민학교 앞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단팥죽 집에서 단팥죽과 풀빵을 사 먹게 되었는데, 그날 광명극장 앞에서 외삼촌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날은 흰 양복이 아니라 까맣게 염색한 미제 군용잠바를 입고 까만 나이방(선글라스)을 끼고는 처음 보는 사람 두서너 명과 같이 건달꾼으로 보이는 청년 십여 명을 모아다 놓고 무언가 일장 연설을 한 후에 모두 트럭에 태워 어디론가 가더라는 것이다.
또, 몇 년 전인가... 어느 비바람이 미친 듯이 부는 가을날 오후였다. 거리에는 전혀 인기척이 없었고 들리는 것은 오로지 바다에서 강하게 불어오는 광풍이 판잣집 양철지붕을 마구잡이로 집어 뜯는 듯한 앙칼진 소리를 내었다가 다시 전봇대에 걸린 전깃줄을 미친 듯이 탄주하여 이히히힝...하고 귀신울음 같은 음산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파도는 쓰시마(對馬島) 쪽에서 수도 없이 밀려와 남부민동 방파제를 강타하였는데 마치 우리가 피난길에서 보았던 쌕쌕이의 폭격과도 같이 검푸른 물보라가 하늘 끝까지 치솟았다가 떨어졌다.
누이와 나는 다락방에 엎드려서 영화에서조차 볼 수 없는 거대한 자연의 장관을 감상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이제 갓 말문이 트인 어린 강욱이가 다락방으로 기어 올라와 자꾸만 밖으로 나가자고 잡아끄는 것이다.
- ……. 새야. 새야 (형아, 형아) ... 서부. 서부…….
우리는 얘가 왜 이러나 하고 강욱이의 뒤를 따라가 보았다.
우리 동네, 바닷가 바로 옆에 나란히 서있는 판잣집 귀퉁이에서 웬 남자 서너 명이 모두 누리끼리한 바바리코트를 입고 서부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카우보이모자를(아마 강욱이는 언젠가 우리와 같이 본 서부영화 속의 카우보이 모자를 쓴 사람들 멋진 모습에 감동을 받아 서부, 서부라고 하며 우리들을 이끌었음을 알 수 있었다) 푹 눌러쓰고는 무엇인가 수군수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 중 한명이 우리가 자기네들을 빠끔히 쳐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란 시늉을 하며 안주머니에서 무엇인가 꺼내려고 하였다.
이때 그 옆에 있는 남자가 그것을 만류하며 우리들을 향해 선글라스를 벗고는 싱긋 웃었다. 외삼촌이었다.
그리고 빨리 집으로 들어가라는 듯 손짓을 하였다.
나는 그 남자가 그때 안주머니에서 꺼내려는 것이 혹 권총이나 칼 같은 것이 아닐까 하고 지레 짐작이나 상상도 해보았다.
*
밤이 깊었다.
어느새 “찹쌀-떠억... 망개-떠억...” 하는 소리가 멀리 사라지고 밤은 절로 깊어만 가고 있었다.
외삼촌이 귀한 양담배 몇 보루와 양주 한 병을 들고 찾아와 대문을 두드렸다.
이미 통금시간이 넘어 야경꾼들의 딱딱이 소리가 멀리서 딱딱딱... 하고 들리고 있는데 외삼촌에게는 아예 통행금지라는 것은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새어머니는 “ 어휴, 고노무. 술, 술...” 하며 뾰로통하고 외삼촌을 향해 눈을 흘기며 부엌에 나가 안주거리를 장만하였다.
외삼촌은 지갑에서 은행에서 갓 나온듯한 빳빳한 100환짜리 두어 장을 꺼내 쥐어주었다.
외삼촌은 아버지와 연배 차이는 비록 있어도 가히 멋진 술친구라고 할만 했다. 두 분이 한번 입에 술을 대면 꼭 끝장을 보고야 마는 것이다.
아버지는 외삼촌을 보고 물었다.
- 처남은 무슨 빽이 그리도 좋아 파출소장이 쩔쩔매는가?
외삼촌은 피식 웃으며
- 대한민국에서 이 홍기(洪起)를 모르면 간첩이디요. 그딴 건 더 묻지 마시라요. 오늘은 매부랑 갑자기 술 한 잔 하고 싶어 내레 불시에 찾아 왔시다. 으흐흐…….
처남남매간에 큰 전쟁을 마친 후 회포나 풀려는 듯 술자리는 끝날 줄을 몰랐다.
새벽녘에 새어머니는 다시 아버지의 부름에 잠에서 깨어 뒤안에서 잠자고 있는 닭 한 마리를 잡아 술안주로 올렸다.
새어머니는 우리 보기가 미안한지 술고래들이라고 흉은 보지만, 남편과 오라비가 정답게 술잔을 나누는 것이 그리 싫지만은 않은 듯하였다.
누이와 나는 그날이 마침 일요일이므로 빳빳한 100환짜리 만지작거리면서 큰방에서 들려오는 외삼촌의 거짓말 같은 이야기를 엿듣는 재미에 푹 빠지게 되었다.
- 1945년. 일본 눔 대갈통 위에 원자폭탄이 꽝하고 터지자 일본 눔들은 항복을 하였디요. 해방이 되어 좋긴 한데 내레 참 아깝게 되었디요. 관동군 헌병대 따까리를 하다가 비적(匪賊)놈들 많이 때려잡아 곧 정식 헌병으로 발령이 받을 장면이었는데 참 아깝게 되었시오.
- 일본군대에서 비적(匪賊)이라고 부르는 건, 우리 독립군도 포함된 건 아니오?
- 아니디요. 독립군은 상해에나 쬐끄맣게 있었고, 만주 벌판에 있는 것들은 전부 공산 비적떼야요!
- 김일성이도 만주에서 독립운동하였다고 하는데…….
- 으하하. 그게 바루 빨갱이들이 거짓말하는 거야요. 김일성이라는 놈은 김성주라는 젊은 아 놈인데... 1940년부터 로서아로 도망을 가서는 만주엔 얼씬도 안 했어요. 그런 놈을 무슨 독립가인양 추켜세우건 전부 빨갱이들 새빨간 거짓 술책이디요.
- 그러다 피난을 어떻게 용케했오?
- 해방 되구 고향 대동으로 떠억 가니 조만식 선생을 민족 지도자로 모셔야 한다고 떠들썩 했디요. 나도 비록 친일은 했지만 조만식 선생을 존경했시오. 그런데 얼마 후 로스께 새끼들이 피양에 들어오더니 어디서 데리고 왔는지 모르지만, 새파란 놈 하나를 내세워 만주에서 활약하던 김일성이라고 하지 안갓수! 내 참, 만주 김일성이라는 자는 그때 벌써 늙어 죽고 없는 것을 세상 텬지가 다 아는 사실인데 누가 그걸 믿갓수? 그래서 나도 반대했지요. 그러니 어느 놈인지 내가 헌병대 개노릇을 했다고 내무서에 꼬시르는 바람에 도망오지 않으면 안 되었지요. 그때 잡혔으면 꼬딱없이 빨갱이 놈들에게 죽었을 게유. 흐흐흐.
- 그럼 걸어서 3.8선까지 내려왔겠군?
- 맞아요. 그렇디요. 내무서원들이 집에 찾아와 장독대까지 뒤진다는 소리를 쟈 (양어머니)한테 듣고 오마니한테 인사도 못 드리고 그길로 냅다 산으로 달아나 개성까지 내려왔디오. 낮에는 산속 바위틈에서 자구 밤만 되면 눈에 불을 켜고 살갔다구 기어오니 꼬빡 3일이 걸렸수 다레... 크흐흐흐. 3. 8선에 오니 국군이 떡 버티고 서서 통행증을 내놓으라는 거야요. 그래서 온갖 말로 통사정을 하여도 어림 반 푼어치도 없었어요. 그렇게 설레발을 치고 있는데 저쪽서 “ 거 홍기 아니가?” 하는 게 아니겠소. 그래서 깜짝 놀라 바라보니 예전 만주에서 같은 헌병대에 있던 동료가 대위 계급장을 떡 붙이고 있는 게 아니우. 아, 지금 생각하면 역시 하늘이 이 홍기(洪起)를 죽이지 않고 도운 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친구도 나와 같은 보조원이었는데 해방이 되고 바로 국방경비대에 지원하여 대번에 어깨에 대위를 달았대요. 어쨌든 그 친구가 내 생명의 은인이기는 은인이디요. 그때 그 친구가 그랬어요. 만주에서 일본군 헌병대에 있던 김창용이한테 찾아가라고 하더라고요. 김창용이라면 내레 잘 알 디요. 내 번개 같은 주먹 솜씨며... 숨어 있는 빨갱이들을 척척 잡아내는 솜씨며... 그래서 바로 서울로 들어와 물어물어 찾아갔디요. 김창용이가 나를 척 보더니 허허 웃어요. 만주에서 펄펄 날고 기던 내레 완전히 거지꼴로 자기 앞에 떠억 나타났으니요. 바로 부관을 시켜 같이 동대문시장에 나가 옷 한 벌 사 입혀라 합디다. 흐흐흐 그래서 바로 김창용이 부대에 주저앉아 놀다가 전쟁이 터지자 바로 일등상사 계급장을 떡 붙혀주면설랑 특임헌병을 하라 하더군요.
- 특임헌병 ?
- 야. 헌병은 헌병인데 좀 특수한 임무를 띠는 헌병이디요. 에... 예를 들문요. 아군 중에 숨은 빨갱이를 잡아내는 일이나, 전장에서 무단 탈영하는 놈들을 사살하는 일이나, 적지에 침투하여 요인을 저격하는 일을 특임헌병이 했디요. 그래서 특임은 언제나 맨 마지막에 기관총을 들고 따라가디요…….
- 하하, 나는 남으로 피난을 오고 처남은 반대로 북진을 하였괘 ?
- 그래요. 우리 집도 그래요. 그런데 오마니는 연로하셔서 쟈만 혼자 내려오게 해서 너무 안타까워요. 불쌍한 애야요. 매부가 많이 사랑해 주셔요.
- 그러면 아군을 따라 어디까지 갔다 후퇴하였나?
- 야, 북진하는 11사단을 따라 영변까지 갔더랬어요.
- 영변이면... 개성과 해주, 황주, 사리원, 평양을 거쳐서 갔겠구먼?
- 잘 아시네요. 그래요. 영변은 사방팔방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도시는 중간에 포옥 꺼진 데 있더구만요.
- 그놈, 중공군들만 없었다면 통일이 되고 지금쯤 나도 진남포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 텐데... (아버지는 한숨을 후하고 쉬었다)
- 아마, 매부네 가족들도 모두 다 죽었을 거야요. 그만 잊어버리세요. 우리가 북진하면서 보니깨니 개성부터 시작하여 평양까지 빨갱이 놈들이 후퇴하면서 쏴 죽인 시체가 새끼줄에 묶인 채 길거리에 쭈욱 가면서 널려 있었어요. 정훈장교들이 대충 세어보더니 10만 명 정도가 되었대요. 빨갱이 놈들은 인간이 아녜요. 잡히면 모조리 죽여야지, 무슨 제네바 협정에 의해... 무슨 인정에 끌려... 살려놓으면 반드시 살려준 쪽을 오히려 악착같이 따라와 죽여요. 지금 형무소에 있는 놈들도 전장에서 잡는 즉시 모조리 다 죽여 없애야 했는데... 살려놓았으니 저것들은 나중에 큰 우환일 꺼예요. 두고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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