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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ple01_next.gif이도연 소설가 문학서재

ㆍ작성자 이도연
ㆍ작성일 2021-01-07 09:57
ㆍIP: 175.xxx.88
《"설산 기행" 한남정맥을 걷다.》
《"설산 기행" 한남정맥을 걷다.》

이 도 연

바람이 차갑게 불어오는 언덕 위를 천천히 걸어올라 산기슭으로 겨울 산행을 떠난다.
눈바람이 극성을 부리던 며칠 전에 비하면 비교적 괜찮은 날씨다.
가을을 장식하던 많은 낙엽이 물기를 증발시켜 발아래 바스락거리는 가을의 잔해들이 겨울로 무장한 등산화에 부드럽게 밟힌다.
이리저리 마른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나무들이 바람 따라 바쁘게 춤을 추고 하늘은 적당한 구름과 바람이 어우러져 깊어가는 겨울의 정취를 느끼게 한다.

호젓한 산길을 느리게 걸어가며 명상에 잠겨 본다.
길을 걷는다는 것, 그리고 살아간다는 것, 정신없이 살다 보니 어느새 한 해가 가고 또 한 해가 시작한다.
되돌아볼 여유조차 없이 살아온 시간들, 얼마나 많은 의미와 명분으로 살아온 것이고 살아가야 하는가?
영겁의 긴 세월에 비교할 때 참으로 짧은 시간일 수밖에 없는 찰나였을 수도 있으나 돌이켜 보면 이미 지난 과거는 짧은 과거 속으로 흘러갔고 불투명한 황혼 길을 살아가야 할 앞으로의 여정이 더 길게 느껴진다.
어느 순간에 멈출지 모르는 시간과 안개에 싸인 계곡을 헤매는 여행이 될지도 모르지만,
지나간 기억들을 되돌아보면 후회와 질곡의 순간들이 가슴을 메이게 한다.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은 순간이고, 아프고 시린 악업들이 더욱 마음속에 꿈틀대며 발걸음을 무겁게 한다.
지나온 순간들의 연속성 위에 나머지 미래의 순간을 살아가야 하기에 더욱 힘겨워 하는 가 보다.

오솔길을 걸어가며 내가 쓰고 있는 인생의 역사는 무엇인가? 자문을 한다.
그 옛날 통일신라시대를 살았던 혜초의 인도 여행기 왕오천축국전(최초의 여행기)은 교통수단이 전무했던 시대에 두 발로 황무지와 사막을 건너고 산맥을 넘어 인도와 중앙아시아를 넘는 4만 킬로의 고된 여정을 여행하면서 그는 어떤 마음과 어떤 생각을 했을까?
역사 속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인 고구려 유민 출신 당나라 장수 고선지는 중국 대륙을 넘어 서역을 지나 파미르고원과 힌두쿠시산맥을 넘어 유라시아 비단길을 정벌한 인물이 갑자기 생각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조그만 돌멩이가 구르는 산기슭 비탈길을 오르면서 숨을 헐떡이며 걷는 길이 내가 가고 있는 길이라면 한없이 초라한 내 여행길이 부끄러워 하늘을 볼 수가 없다.

중 원 대륙을 호령하는 기상이 이나 불법을 구하겠다는 일념은 아니더라도 작은 일들로 마음의 조바심을 내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소리에 몸이 움츠리는 나약한 심성은 떨쳐 버리자! 다짐한다.
한걸음 걸어가는 발끝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들풀처럼 살아가야 할 미생의 삶과 역사 일지라도 심성을 다하고 온 마음으로 나를 찾는 여행을 해야겠다.
산 정상에서 솔잎을 가르며 불어오는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니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식혀주어 시원한 느낌이 상쾌하다.
발아래 내려다보이는 도시가 한눈에 들어와 내 품에 안긴다.

눈이 내렸다. 밤새 꿈속에서도 눈이 내렸고 눈을 떠보니 눈은 아직도 꿈속의 풍경과 별반 다르지 않았고 지금도 계속 눈이 내린다.
겨울의 푸른 소나무 사이로 띠를 두른 안개는 하얀 능선의 절벽을 유령처럼 타고 오르는 설산의 깊은 품으로 걸음을 옮겨 한발 두발 설산을 오른다.
밤새 무희의 소맷자락처럼 펄럭이며 춤추듯 내린 눈이 온통 눈의 나라로 만들어 버렸다.
눈 덮인 산은 냉정하고 가파른 바람이 쉼 없이 불어온다.
차가운 공기를 한껏 부풀려 몰고 온 바람은 귀밑으로 칼날처럼 한기를 일으키며 지나간다.

등산로는 아슬아슬하게 자신의 한계점을 좁은 보폭으로 걸을 수 있을 만큼만 내어주고 산등성이의 눈들은 햇살에 번뜩이며 빛을 흩어놓아 분산하길 반복하며 계곡 사이로 스며든다.
등산로 아래 계곡은 깊고 아득하며 하얀 눈의 수렁을 이루어 깊이를 가늠하기 어렵고 고봉의 설산에 도사리고 있는 크레바스는 아니더라도 계곡 사이 바람이 일구어 쌓여 있는 눈의 깊이는 협곡의 형태를 이루어 입을 벌리고 미끄러지면 언제라도 삼킬 듯이 아른거리며 모든 것을 빨아들이기에 충분했다.

길은 험하고 다리는 눈길에서 중심을 잃어 수없이 넘어지고 구르기를 반복한다.
노란색 등산화를 쳐다보며 후회를 해도 소용없다. 아이젠을 차지 않아 폭설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기력하기 이를 대가 없고 굼벵이 느림보보다도 못하다.
인간의 오만을 자연은 절대 용서치 않는다고 입버릇처럼 외고 다녔으나 왠지 모를 자만심의 결과로 눈 속에 엉덩이를 몇 번이고 내어주고 곤두박질치며 걷는다.
매서운 바람은 습기를 잔뜩 머금어 얼굴을 스치며 볼을 얼리지만 등에서는 땀이 흐른다.
겨울 눈 산은 몸의 상태에 따라 서로 다르게 작용을 하지만 눈과 입의 리듬도 서로 다르게 반응을 한다.

입에서는 증기기관차가 높은 언덕을 오를 때 씩씩거리며 수증기를 품어 대듯 거친 숨을 토해내고 눈은 순백으로 뿜어져 올라오는 아름다운 설경에 어쩔 줄 몰라 한남정맥의 산맥과 높은 봉우리와 계곡의 깊은 골짜기를 흩어 보느라 정신이 없다.
순백으로 덮여 있는 산하는 아름답다 마른 가지를 서로 맞대어 산등성이를 물결처럼 수를 놓아 바람에 일렁이며 흙 갈색의 나뭇가지에는 한 뼘씩 눈이 쌓여 있고 바람에 흔들리고 햇살에 녹아 눈 폭탄이 되어 툭툭 우수수 떨어진다.

몸은 힘겨워 낡은 기관차처럼 헐떡이고 있어도 눈은 유명한 감독의 영화 스크린처럼 순백의 산하를 굽어보며 황홀경에 빠진다.
순백의 정점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희고 검은 흑백의 세상이며 느릿한 아날로그의 세상이다.
화려하지 않고 번잡하지 않으며 사치스럽지 않다.
지나간 세월 같은 풍경이 익숙한 사진처럼 한눈에 들어온다.
눈 쌓인 설산에 미끄럼을 타듯 넘어지고 구르며 자연 앞에 온전히 마음을 열어 꾸준한 인내심으로 발자국을 남기며 오늘도 눈길을 걷고 있다.

한 방울의 물감이 화선지에 번지면 예쁜 그림이 되고 추억이 되는 것처럼 세상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도 한 방울의 물감부터 시작됩니다.
세상을 아름답게 오늘도 살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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