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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ple01_next.gif이도연 소설가 문학서재

ㆍ작성자 이도연
ㆍ작성일 2020-11-13 08:55
ㆍIP: 175.xxx.88
부평 "캠프마켓" 81년 금단의 땅 가을에 서다
부평 "캠프마켓"
81년 금단의 땅 가을에 서다

이 도 연

그 좁은 철문 하나 여는 것이 그리도 어렵고 힘들었을까?
캠프마켓 개방 기념행사에서는 금단의 땅 개방식을 위한 상징적 의미로 철문을 열 수 있는 열쇠 전달식이 있었다고 한다.
81년 만에 조그마한 열쇠로 철망을 여는 순간 시민들의 환호와 감격으로 금단의 땅이 열린 것이다.

1939년 일제 강점기 일본의 아시아 대륙 침략의 전진기지로 무기 제조를 위한 일본육군 조병창 기지로 사용되다 광복 이후 1945년 주한 미군의 군수지원사령부인 에스컴(ASCOM)시티 로 사용되었다.

에스컴은 우리나라 전역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에게 군수물자를 보급하는 미군의 한반도 주요 전략 거점이 되어 2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 기지로 탈바꿈하였다. 결과적으로 부평과 인천의 삶에 엄청난 변화를 주면서 부평의 도심권에 드넓은 금단의 땅으로 오랜 세월 남아 있던 곳이다.

이후 베트남전이 발발하고 미군의 승리가 어렵게 되자 자국의 직접적인 피해가 없는 한 개입하지 않는다는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면서 2만 명의 미군이 철수하고 지금은 미 육군과 공군에게 빵을 만드는 공장인 캠프마켓만이 남아 있어 대부분은 폐허처럼 비어 있다.

나는 지금 깊은 감회에 젖어 금단의 땅에 발을 들여 놓고 캠프마켓 높은 울타리 안에서 평화로운 모습의 담장 밖 아파트들을 바라본다.
에스컴의 주소는 샌프란시스코 켈리포니아(APO 901 San Francisco California)로 우리땅이지만 우리땅이 아니다.
울타리 안과 밖은 다를 것이 없건만 아픔의 역사는 선명하게 선을 그어 놓았고 도심 한편에 북방한계선과 다름없는 높은 철책으로 넘을 수 없는 선을 구획하고 사람들의 발길을 끊었다.

2002년에 반환이 결정되었지만, 반환 작업 절차상의 이유로 일반인들이 여전히 출입할 수 없었던 곳이었다. 그러나 지난 2019년 12월 11일 정부와 주한 미군과의 합의가 이루어지고 올 10월 14일 드디어 일부이기는 하지만 캠프마켓 B구역을 81년 만에 개방하기에 이르렀다.

가을 햇살이 눈부시게 은행잎을 흔드는 아침 금단의 땅을 향해서 건물과 건물 사이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곳에서 나고 자라면서 유년 시절부터 지금까지 도심 한가운데 높은 담장 안의 저곳은 언제나 갈 수 없는 이방인의 땅이었다.

높은 담장 넘어는 우리 땅이 아닌 치외법권의 땅으로 존재했고 어린 시절 캠프마켓 건너편 신촌 거리에는 미군 전용 술집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었다.
미군들이 주둔하면서 부평 일대는 그들을 상대로 하는 위락 시설과 새로운 문화가 생겨나고 물자가 풍부해지면서 삶의 질도 높아진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유흥가의 이른바 양공주라고 불리는 접대부들과 미군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가 넘쳐나고 사회적 편견으로 이들의 인권은 바닥에 떨어지는 등 사회적 폐단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어두운 면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신촌 일대에 20여 개의 클럽이 생기면서 우리나라 대중음악의 산실이 되어 이름만 들어도 알만 한 가수 현미, 키보이스 윤항기 등 유명 밴드들이 이곳에서 왕성하게 활동하였고 명성을 크게 얻던 음악인들을 배출하였다.

그 시절 내 눈에 비친 번쩍이던 비어 홀 간판은 별천지였으며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팝송은 취기로 가득하고 술에 취해 거리를 활보하는 미군들이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파란 눈의 미군이나 유난히 검은 피부의 흑인 병사를 마주칠 때면 왠지 모를 두려움과 호기심을 느꼈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한 시절의 영광을 뒤로하고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베이지색이나 회색빛 건물들은 외벽에 페인트가 들떠 벗겨져 있었고 커다란 건물마다 1160. T1890, 등의 고유 번호가 메겨져 있다.
건물의 출입구는 안전상의 이유로 굳게 닫혀 있었으며 벽면에 내부 구조와 건물의 용도를 적어 놓았으나 좀 더 연구해볼 가치가 있다고 한다.

81년간에 걸쳐 금단의 땅에서 뿌리를 내린 은행나무나 느티나무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고목이 되었고 푸른빛으로 쏟아지는 가을 햇살 위로 가지를 뻗어 이 땅을 지배하는 약육강식의 논리나 정치적 상황은 전혀 상관없이 만추의 가을에 홍조로 물들어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

단풍으로 곱게 물든 고목과 건물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의 가을은 마치 영화 세트장처럼 미국적이기도 하고 때로는 고풍스럽기까지 하였으나 사람이 오랫동안 다니지 않아 길 양쪽으로 잡풀이 무성하게 자란 길을 걷다 보니 격동의 세월을 살아낸 흔적의 발걸음과 역사에 대한 끝없는 반문과 질문을 하고 싶어 진다.

이 땅의 81년의 세월 동안 이곳에서 어떠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느냐고 묻고 싶지만, 아직도 길 건너편 건물들은 굳게 닫혀 있고 높은 담장 위에 철조망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다.
철조망 담장 아래 녹슨 구조물과 마치 폐허 같은 건물 옆에 속절없이 피어 있는 들국화가 아름다워 감성이 무르익어가는 가을날이 더욱 시리고 안쓰러워 가슴이 아린다.

이제 얼마 안 되는 공간을 개방했지만, 이제부터 시작이다. 우리나라 나의 고장에 수없이 많은 일제강점기의 흔적들과 힘없고 나약했던 이 땅에 일본군 조병창 기지와 미군정 군홧발 흔적들이 사라지고 우리 근 현대사에 흑역사로 쓰인 어두운 골목처럼 굴곡진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공간들이 하루빨리 정리되어 나머지 부지들도 조속히 반환되길 바란다.

아울러 우리 민족의 아프고 암울한 역사 청산이 이루어지길 바라며 각계의 전문가와 시민들의 의견을 수렴해서 흑역사를 뒤로하고 행복한 공간으로 다시 태어나 시민의 품으로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금단의 땅에서 푸르른 가을 하늘을 바라보며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피어날 그 날을 힘차게 응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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