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창작문학예술인협의회/대한문인협회-수필

ㆍ작성자	김복희
ㆍ작성일	2020-12-26 08:03

ㆍIP: 125.xxx.48

추억

정원에 영산홍이 활짝 피고 개천에는 유채꽃이 활짝 핀 그 좋은 춘삼월이라! 자연의 아름다움을 질투라도 하듯 일본에서는 연이은 지진으로 사십여 명이 죽고 몇백 명이 다치었다는 뉴스 속에 한 이틀 비바람이 몰아치더니 오늘은 그야말로 춘삼월이라는 아름다운 봄볕이 나래를 펼쳤다. 라일락꽃이 고개를 내미는 따사로운 봄볕에 오늘도 내 몸을 맡겨 본다.

봄만 되면 그놈의 농사일에 미처 제대로 쓰지도 못하는 개미허리 힘으로 어설프게 농부 흉내를 내다 땅바닥에 주저앉은 것이 벌써 삼 년 차인데 올해도 여지없이 그 병은 다시 돋았다. 부지런 떤답시고 남보다 먼저 감자 심고, 옥수수 심고, 땅콩을 심었으면 며칠쯤 쉬었다 하지 무엇이 잘 낮다고 때도 이른데 참깨밭을 만들고 고구마밭을 만들어 놓았다. 그러고 나서 탈이 붙은 허리로 멀칭한 비닐 속에 갇혀 있는 감자 싹과 옥수수 싹이 애처롭게 보여 정신없이 구멍을 뚫어 주다 그만 허리가 뜻 금하여 땅바닥에 주저앉고 말았으니 그놈의 팔자가 고되기도 한 모양이다.

봄만 되면 밭에서 주저앉은 것이 벌써 삼 년 차인데, 처음에는 겁나서 이 병원 저 병원 정신없이 다니며 시술도 받고 침도 맞고 수술도 받았지만, 이제는 아픈 것도 면역이 생겼나 병이 이기나 내가 이기나 어디 한번 해 보자고 몸으로 버틴 시간이 나흘이나 되었다.

삼 년 동안 척추병과 싸우면서 얻은 지식은 척추 협착증이나 디스크 파열은 삼 개월만 앉지 않고 누워서 생활하거나 서서 생활하면 다 낫는다는 것을 수 없는 전문의 의사와 글에서 배워 왔으니 몸소 체험해 보자고 달라 들은 것이다. 하긴 나도 삼 년 전에는 시술도 받았고 그다음 해는 수술을 받았다. 이런 과정을 거친 후 철저히 관리는 하고 있지만, 조금이라도 허리에 무리가 가면 여지없이 신호가 오는 것이다.

그 무리라는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해보지도 않은 농사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고치지 못하는 이유는 성격 탓도 있지만 나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 환경이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즉 밭에서 일하고 있을 때가 나에게 엔도르핀이 가장 많이 생기고 행복을 느끼니 하루를 살다 죽더라도 즐거움 속에 살다가 죽으려니 별수가 없다. 그리고 척추병을 앓으면서 배운 것을 하나 더 말한다면 병원에 가서 수술을 받아도 삼 개월은 앉지 말고 서서 생활하든지 아니면 누워서 생활해야 치료가 제대로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고 보면 수술을 하지 않고 삼 개월만 집에서 잘 관리하면 허리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니 병원을 왜 가느냐는 논리를 터득한 것이다.

허리가 탈이 난 것은 지난 수요일이라 목요일 골프 약속도 취소하고 집에서 하루 푹 쉬고 나니 제법 부드러워져 금요일 오후에는 다리 근육 좀 보존하겠다고 매일 걷는 일만 보 걷기를 실천하겠다고 집을 나섰다. 춥지도 덮지도 않은 춘삼월 나뭇가지에 고사리손 같은 새싹이 아름답고 언덕 곳곳에 피어있는 이름 모를 작은 꽃들은 나를 집으로 들어가게 놔주지 않았다. 봄기운에 취한 나는 산책길이 너무 좋아 두 시간이 넘게 일만 삼천 보를 걸었으니 다시 허리에 탈이 난 것이다. 별수 없이 토요일과 일요일은 비가 온다는 핑계로 집에 박혀 집안에서만 침대와 텔레비로 시간을 보냈으니 속에서 열불이 났다.

오늘은 월요일이라 한차례에 많이 걷지 말고 나누어서 걸어 보자고 아침 먹기 전 천 오백 보를 걷고 오전에 육천 보만 걷자고 나간 것이 칠천 보를 넘기었다. 사흘 만에 집 밖에 나와 보니 봄볕이 하루하루 얼마나 변하는지 뚜렷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나뭇가지에 새싹들이 이제 제법 실록으로 변해있고 영산홍이 마음 놓고 화려함을 뽐내고 있으며, 녹색의 언덕에 작은 꽃들이 선명하게 자기 색깔을 드러내고 있다.

무아에 빠져 실개천을 따라 걷다 보니 나도 모르게 옛 추억에 빠져들어 버렸다. 내가 퇴임 직전 학교의 교장으로 재직하고 있었을 때다. 퇴임한 교장들로만 구성된 삼락회가 학생회관에서 열린다고 공문이 와, 출장이나 외출을 싫어하는 성격이지만 큰마음을 먹고 격려차 참석했다. 그런데 학생회관을 들어서는데 교육감이나 많은 퇴임하신 전임 교장 선생님들을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던 중 특히 반가운 사람이 눈에 띄었다.

그분은 내가 강원도에서 처음 충남으로 왔을 때 근무하던 천안 주변의 시골 학교에서 교장으로 모시던 분으로 내가 대전으로 전출을 간다고 하자 끝까지 내신서를 써 주지 않고, 자기와 같이 천안에서 근무하자고 했던 분이었다. 그분은 자기가 먼저 충남의 일 번지 중학교라고 하는 학교로 전출 가셔 내가 천안 시내로 발령이 나자 자기네 학교로 나를 끌어다 놓은 분이기도 했다. 나는 그분과 같이 근무하는 동안 그 누구보다도 가까이 지냈다. 그리고 그때 나는 학교 일에 미처 가정일은 제쳐놓고 학교 일에만 열중하는 교사였다. 이런 교사를 어느 교장이 싫어하겠는가? 그러다 보니 가는 학교마다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사랑과 인정을 받으며 근무했던 사람이다. 강원도에서 충청남도로 전출할 때는 약주도 하지 않는 교장 선생님이 나를 보내는 것이 아쉽다면 3차까지 송별연에 참석해준 일도 있었다. 이런 나를 그분은 특별히 더 아껴 주셨던 모양이다.

교장 선생님을 발견한 나는 반가움에 달여가 인사를 하자
"아니 김 교장!" 하며 반갑게 맞아 주더니
"예끼 이 사람!"이라고 했다.
나는 반가이 웃다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때 다른 교장 선생님이 반갑게 인사를 하여 서로 인사를 나누는 사이에 그분은 저만큼 가버렸다. 나는 기분이 찜찜하기 그지없었다. 기분이 상한 나는 회의장에 들어가려다 그만두고 학교로 되돌아온 일이 있었다. 학교에 와서 곰곰이 생각해 봐도 내 머리로는 왜 그분이 그렇게까지 했는지 이해가 잘되지 않았다. 얼마가 지난 후에 깨달은 것은 내가 교장이 된 다음에도 자기를 근무할 때와 같이 모시지 않았다는 뜻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나는 혼자 속으로 웃었다. 그분을 모시고 있을 때 분명 나는 내 부모님보다도 더 잘 모셨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건 그분뿐이 아니라 내가 모셨던 교장들 모두 그런 정신으로 모셨으며 다만 그분과 같이 있을 때는 학교에서 맡은 일이 다른 사람보다 많아 조금 더 가까이했을 뿐이었다. 그때 또래 선생님들이 교장과 친하다고 나를 질투하고 시샘을 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나에게는 다른 생각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헤어진 후 15년 동안 두 번 정도 만난 것으로 기억되었다.

지난 세월에 같이 근무한 분들과 자주 만나 정분을 나눈다면 얼마나 좋으련만 나에게는 그런 시간을 가질 수 있는 환경이 못 되었다. 욕심 많은 성격에 남에게 뒤처지는 것을 싫어하니 가는 학교마다 학교 일에 정신이 없었다. 거기에다 가정에서는 늦둥이 아들을 두었는데 그 아이가 1급 중증 장애아이라 그를 키우는 집사람 눈치 보면서 학교 일에 정신없이 살다 보니 늙은 부모님도 제대로 모시지 못하는 생활을 하는 내 생활이 지난날 모셨던 상사라고 특별히 모실 상황이 안 된 것이다.

이런 환경 속에서 생활하는 나는 나를 따르던 많은 선생님과 만나는 것도 꺼렸다. 퇴직 후 나를 찾아온 선생님에게 '나는 잃어버리고 현재 모시고 있는 교장이나 교감을 잘 모시라고 충고한 사람이니 알만하지 않은가?'
그분과 생활했던 두 곳의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떠 올리며 젊었을 때 학교에 대한 나의 열정에 흐뭇함을 느끼며 지난날의 추억 속으로 빠져들었다.

‘교장이 배구를 좋아하여 전 직원이 다른 학교와 배구 시합을 하러 가면 나는 혼자 남아서 삼 학년 학생들을 지도했던 일’

‘전 직원이 학부모 초대로 일찍 하교하여 회식에 참석해도 혼자 학교에 남아서 삼학년 전체 반 학생들의 자율 학습을 지도하던 일’

'한국 민주시민 교육 충남 지부장을 맡은 그분과 같이 학교 수업을 몰아서 오전에 하고 전국 곳곳을 출장 다니던 일'

'교장, 교감 및 원로 교사들을 모시고 울릉도, 강원도 설악산, 무주 구천동 및 부산 등으로 여행을 다니던 일' 등이 한 편의 영화같이 머릿속을 스쳐 간다.

징그럽게도 바쁜 교직 생활이었지만 이제는 하나의 추억 속에 가물가물 사라져 가며 왜 그리 열정이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3학년 1반 담임, 윤리 주임, 충남 민주시민 교육회 총무부장에다 욕심이 많아 수업 시수는 같은 교과 교사 중에서 제일 많이 맡았으니 바보 같은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제는 모든 것이 하나의 추억 속으로 사라진 젊은 날의 추억이 된 것이다. 아마 그분의 연세가 지금쯤은 90이 넘었을 것 같은 데 건강은 어떠하실는지? 혼자 추억 속에 취하며 봄의 기운을 만끽해 본다.

추억의 도토리 밥

진눈깨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