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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ple01_next.gif김복희 수필가 문학서재

ㆍ작성자 김복희
ㆍ작성일 2020-12-26 08:00
ㆍIP: 125.xxx.48
진눈깨비
 
오늘도 여지없이 만 보를 채우기 위하여 걷는다. 이달만 버티면 걷기 시작한 지가 만 2년이 되는데 30년을 걷게 다고 목표를 세운 지 2년 동안 독하게 지켜왔으나 그래도 1년에 네댓 번은 빠진 것 같다. 오늘은 새벽부터 눈비가 오락가락한다. 등산화를 신고 우산을 챙겨 열심히 걷는다. 인도를 따라 원형 육교도 건너고 도로도 건너 하천을 따라 산책로를 열심히 걷는다.

오늘은 눈비 덕인지 평소도 별로 많지는 않았지만, 산책로가 유독 한가해 보였다. 그래도 우산을 들고 음악을 들으며 걷는 아줌마도 만나고 말총머리를 한 날씬한 여자 한 분이 마라톤을 하는데 뒷모습이 삼국지에 나오는 적토마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길게 묶은 갈색 노랑머리가 말총머리보다 더 치렁거리며 착 붙은 바지에 비친 허벅지와 장딴지의 근육이 윤기가 번지려 한 적토마보다 더 아름답게 보여 노인네 혼자 부끄러움인지 부러움인지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돌아오는 길에는 함박눈 같이 내리는 진눈깨비가 내 시야를 가려 내 눈에 비치는 사물을 아롱거리게 만들면서 땅에 떨어지며 녹아 없어지는 모습이 백 년 도 못살고 가는 우리네 인생같이 허무하게 느껴진다. 힘없이 녹아 없어지는 진눈깨비를 맞으며 걷다 보니 나도 모르게 지난날의 향수에 젖어 들었다.

초등학교 시절 ‘못 살겠다 갈아보자? 갈아봤자 별수 없다’라는 선거 벽보가 떠오르고, 중학교 시절 고등학교 형들의 몽둥이가 무서워 운동장에 끌려나가 ‘ㅇㅇ선생 물러가라’고 목이 터지게 외쳐대던 4·19가 생각나며 반공을 국시의 제1호로 삼고로 시작되던 일곱 조항의 혁명 공약을 못 외워서 방과 후에 남아서 외운 다음 하교했던 중학교 3학년 시절. 흉년의 가난에 울어야 했던 60년대 초 고등학교 때 기억이 스쳐 간다. 그런 속에서도 묵고 또 묵어 대학에 들어가니 1학기 기말시험을 보는 중간에 3선 개헌 반대 데모로 인해 시험을 보다 말고 군대에 들어가 투표용지도 받아보지 못하고 끝난 3선 개헌 투표의 암울한 기억과 제대하고 복학하여 입대하기 전 데모로 인해 받은 F 학점을 채우기 위하여 4학년 마지막 학기까지 애를 먹었던 일을 쉽게 잊히지 않았다., 대학을 다니던 동안 3선 개헌 반대 데모와 유신 반대 데모로 4년 동안 한해도 온전히 학교생활을 하지 못한 학사님이 되고 만 것이다.
 
이런 가난과 혼란한 사회 속에서도 열심히 살다 보니 이제는 세계 10대 경제 대국이 되었으며 잘사니 못사니 해도 세계 어느 나라보다 살기 좋은 나라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이 나라도 가보고 저 나라도 가 보니 우리나라보다 살기 좋은 나라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데 아직도 무엇인 부족해서 이렇게 신세타령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천년은 못산다지만 백 년의 인생도 길지 않은가? 땅에 떨어지면 녹아 없어지는 진눈깨비에 비한다면 내 인생 70은 얼마나 길고도 긴 세월이 아니던가? 여기에다 재수가 좋으면 30년을 더 덤으로 준다니 이 얼마나 축복이고 행복이겠는가? 나는 오늘도 그 30년의 덤을 얻기 위하여 열심히 걷고 또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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