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창작문학예술인협의회/대한문인협회-수필

ㆍ작성자	김복희
ㆍ작성일	2020-12-26 07:41

ㆍIP: 125.xxx.48

삶과 죽음

지난 11월까지 밭에서 1년간 재배한 농작물을 거두어들이는데 정신이 없었다. 해보지도 않은 농사일을 나이 먹어서 해보니 그리 쉽지만은 않다. 더구나 시대에 맞는 농기구를 사용하여 농사를 짓는 것도 아니고 재래식 농기구를 사용하여 노년의 무례함을 달래기 위한 농법이니 알만하지 않은가? 시간 나는 대로 삽이나 쇠스랑으로 땅을 파 감자, 고구마, 참깨, 땅콩밭을 2~3백 평 일구어 농사를 짓고 나머지 600평은 트랙터로 로터리만 치고 밭이랑을 손수 만들어 콩과 깨 등 농사를 짓고 있으니 노인네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특히 허리도 안 좋은데 쭈그리고 앉아 고구마를 캐고 땅콩을 캐는 데는 며칠이 결렸으며 특히 서리태(검정콩)나 메주콩을 터는데도 도리 개를 만여 번은 더 뚜드린 것 같다. 힘이 들면 좀 쉬었다 하면 되건만 고집이 이를 악물고 누가 이기나 시험이라도 하는 듯 참고 일을 했는데 겨울이 되어 고작 한 달 쉬고 보니 봄이 그립고 밭에서 농사짓던 때가 그리워진다.

정초 몰아치는 한파를 이겨 내겠다고 늙은이가 마스크를 하고 털모자에 두꺼운 오리털 잠바를 입은 채 새벽 산책하러 나가 두어 시간 열심히 걷고 아침 식사를 한 다음 집에 있자니 온몸이 쑤신다. TV를 켜 봤자 눈만 아프고 재미도 없다. 뉴스를 보면 세상 돌아가는 것이 짜증만 나고 영화나 연속극도 재미가 없다. 식구라야 단 세 식구인데 모두 다 아침을 먹고 나면 자기 일을 차자 나가니 혼자 책상 앞에 앉자 컴퓨터에 매달려 시간을 보낸다. 그러고 보면 점심때라 찬밥 한술 냄비에다 물을 부어 푹 퍼지게 끓여 김치 한 포기 꺼내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 하며 점심을 때운다. 내가 밥을 끓여 먹는 것은 반찬이 별로 필요 없고 소화가 잘되기 때문에 직장에서 퇴직한 후 겨울이면 혼자 해 먹는 나만의 별식이다. 이처럼 혼자 밥을 먹기 시작한 지도 벌써 8년째가 되었다. 여름에는 농장에 가서 도시락을 혼자 먹고 겨울에는 집에서 끓인 밥을 혼자 먹는다. 사랑스러운 마누라가 있지만, 그가 곁에 있으면 오히려 방해되어 떨어져 있는 것이 속이 편하다. 이런 생활이 나만 겪는 것인지 아니면 내 세대가 겪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날씨가 추워지면서 하루 근 이만여 보 걷든 걸음 숫자를 줄여 보려고 했지만, 하루 시간 보내기가 너무 지겨워 오후에 다시 산책길로 나선다. 늙은이 거름이라 그런지 대다수 사람은 나를 앞질러 간다. 다른 사람이 앞질러 간다고 허둥댈 것도 없고 내 걸음 나는 대로 허리를 꼿꼿이 펴고 無念(무념)에 빠진 채 걷고 또 걷는다. 이왕 나왔으니 못 걸어도 만 보는 채워야 하지 않나. 그러다 보면 새벽 만 보 오후에 만 보 이만 보가 되는 것이다.

얼마나 살겠다고 이 추운 겨울에 입에서 품어 나오는 입김이 눈썹을 하얗게 만들었는데도 걷고 또 걷는다. 하긴 내가 이렇게 열심히 걷는 것은 5년 전 밭에서 일하다 허리가 삐끗하여 시술을 받았지만 고치지 못하고 다시 1년 후 수술을 받은 다음부터 거의 빠진 날이 없이 만 보 이상 걷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습성이 되어 이제는 2만 보가 넘게 걷는 것이다. 이렇게 걷다 보니 허리가 튼튼해져서 그런지 농장에서 일하는 데 별로 부담이 없고 등산에도 자신이 생겼다.

그러나 이렇게 걷다 보면 별별 생각을 다 한다. 초기에는 허리 병을 낫겠다고 힘든 것을 참으며 주로 지난날을 회상하면서 걸었는데 1년이 가고 2년 3년이 가다 보니 이제는 無槪念(무 개념)으로 걷는다. 처음에는 같은 길을 두 시간씩 걷는다는 게 무척이나 지루하여 걸음걸이 숫자도 세어보고 또 음악도 들으면서 걷기도 하고 지난날의 추억을 회상하며 걸었는데 이제는 이도 저도 다 지친 것인지 두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알지 못하고 매일매일 반복한다. 올해는 작년보다 정초부터 걸음 숫자가 많아진다. 나이가 거꾸로 가나 알 수는 없지만 걷기 시작한 후 허벅지 근육이 단단하게 변하였다.

나이가 70이 넘어가니 세상에 관심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 정치가 어떻고 경제가 어떻고 다 남의 일 같으며 죽음도 두려움이 없다. 이 정도 살았으면 충분히 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으니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도 없다. 다만 병석에 누워 고통받지 않고 짧은 시간에 깨끗하게 죽어야 하는데 하는 마음뿐이다. 지난달에는 내 동갑 자리가 스포츠타운에서 열심히 헬스를 하고 목욕탕에 들어가 목욕을 하다 갑자기 숨을 거둔 모양이다. 아직 70 초반인 사람이 죽은 것이 안쓰러워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내 생각은 ‘참 그 친구 죽음 복은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헬스장에서 충분히 땀 흘리고 목욕탕에서 깨끗이 씻고 죽는지도 모르게 죽었으니 얼마나 멋진가? 죽음의 두려움이나 고통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이 세상을 하직한 것이 아닌가?

이 친구 죽음 소식을 접한 후 보름도 안 되어 이번에는 나와 모임을 두 개나 같이하는 친구가 쓰러졌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평소 여러 가지 성인병을 가지고 있어 몸 관리를 특별히 하는 친구인데 새벽에 자고 일어나 보니 쓰러져 있다는 것이다. 그 친구와 평소 대화를 나눌 때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살다 하루아침에 가야 할 텐데'라고 늘 입버릇처럼 말해 왔는데 그리되지 못한 모양이다.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왔다는 소식에 병문안을 나여 와서 좋은 소식이 있기를 기대하고 있는데 들여오는 말이 다시 중환자실로 옮겨 갔단다, 아마 회복이 어려운 모양이다. 겨울이라고 하는 계절은 노인들에게 저승사자인 모양이다. 이런 상황에서 또 인근 시에서 교직 생활을 했다는 또래 한 분이 쓰러졌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게 마음이 허전하게 느껴 젖다. 그리고 병문안 때 보았던 친구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려 마음이 심란해진다. 삶과 죽음이 무엇인지. 왜 세상에 태어나서 이런 갈등을 느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이런 갈등에 쌓인 나에게 어느 친구가 카톡방에다 서산대사 시비에 있는 "살아 있는 게 무엇인가?"라는 글이라고 올려놔 읽어보니 나를 되돌아보게 하는 글이라 옮겨 보았다.

이 보게 친구! 살아 있는 게 무언가?
숨 한번 들여 마시고 마신 숨 다시 뱉어내고
가졌다 버렸다 버렸다 가졌다.
그게 바로 살아 있다는 증표 아니던가?
그러다 어느 한순간 들여 마신 숨
내뱉지 못하면 그게 바로 죽는 것이지.

어느 누가. 그 값을 내라고도 하지 않는
공기 한 모금도 가졌던 것 버릴 줄 모르면
그게 곧 저승 가는 것인 줄 뻔히 알면서
어찌 그렇게 이것도 내 것 저것도 내 것,
모두 다 내 것인 양 움켜쥐려고만 하시는가?

아무리 많이 가졌어도 저승길 가는 데는
티끌 하나도 못 가지고 가는 법이라니
쓸 만큼 쓰고 남은 것은 버릴 줄도 아시게나
자네가 움켜쥔 게 웬만큼 되거들랑
자네보다 더 아쉬운 사람에게 자네 것 좀 나눠주고

그들의 마음 밭에 자네 추억 씨앗 뿌려
사람 사람 마음속에 향기로운 꽃 피우면
천국이 따로 없네, 극락이 따로 없다네.

생이란 한 조각 뜬 구름이 일어 남이요,
죽음이란 한 조각 뜬 구름이 스러짐이라,
뜬 구름 자체가 본래 실체가 없는 것이니
나고 죽고 오고 감이 역시 그와 같다네.

천가지 계획과 만가지 생각이
불타는 화로 위의 한 점 눈이 로다
논갈이 소가 물위로 걸어가니
대지와 허공이 갈라 지는 구나

삶이란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남이오
죽음이란 한 조각 구름이 쓰러짐이다
구름은 본시 실체가 없는 것
죽고 살고 오고 감이 모두 그와 같도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너무나 마음에 와닿는 글이라 그대로 옮겨 보았다. 죽고 사는 것은 숨 한번 쉬고 못 쉬고 차이인데 머 그리 아웅다웅 살려고 발버둥 치는가? 나에게 남은 인생이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헉헉 대지 말고 여유로움을 가지고 허~ 허~ 허~ 너털웃음 웃으며 건강하게 살다 미련 없이 가야겠다.

삶의 무게

부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