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창작문학예술인협의회/대한문인협회-수필

ㆍ작성자	이석희
ㆍ작성일	2016-10-13 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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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눈을 맞으며

하얀 눈을 맞으며

운명처럼 간직한 역마살 덕분인지 전혀 생소하기만 한 충청도까지 오려고 임용고사를 보았습니다. 20여 년 전에 그만 두었던 교직에 다시 돌아와 퇴임을 하고 이곳 충주 땅에서 7년이라는 꽤나 긴 시간을 살았습니다.
늙기는 했어도 제 엄마 아빠 정도면 아이들을 믿고 맡길 수 있다고 여겼는지 그 당시 구미에 직장을 둔 아들 내외가 아이들을 돌봐 달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시인도 부인도 못하고 마치 병원에 가도 그만 안 가도 그만인 배앓이 환자처럼 어정쩡하게 있다가 드디어 이사를 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짐을 옮기고 나자 이내 기온이 오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충주에서보다는 무척 더울 거라는 예상을 뒤엎고 지난 봄과 여름은 그리 덥지 않은 계절을 보냈습니다. 그래도 여름 한낮이면 무쇠 가마솥처럼 뜨거운 땡볕이 무섭습니다. 그러나 이내 옷깃을 여미게 하는 소슬바람이 붑니다. 이어서 오후면 슬쩍슬쩍 한기를 느끼면서 가을인가 했더니 그만 추위가 엄습하는 겁니다. 아무리 보아도 충주에서 느끼던 그것이나 별반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게 나이 탓인 지는 모르지만 조금 엄살을 더하여 이야기하자면 충주보다도 더 추운 품인 것 같이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헐벗고 굶주린 서민의 삶을 생각하면 좌우지간 나는 비록 춥더라도 어디다가 대놓고 말할 처지도 아닌 주제라고 봅니다. 그러다 보니 그저 혼자서 끙끙 앓으면서 그 동안 안 입던 내복을 다 꺼내서 입고 버티고 있는 중입니다.

나는 항상 말했습니다. “겨울이면 좀 겨울다워야 하는데 요즈음은 눈이 안 오니까 겨울의 그 하얀 감상이 떠오르지를 않는단 말이야.” 이렇게 투덜대며 불만을 토로하곤 했습니다. 그보다 더 남쪽으로 왔으니 이제 눈은 저 먼 나라의 일 같이만 생각되었습니다. 그저 그렇고 그런 희망 사항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나의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불만 섞인 생각을 마치 비웃기라도 하는 것 같은 조짐이 보였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갑자기 날이 어두워지는가 싶어서 하늘을 쳐다보았습니다. 갑자기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에서 새하얀 함박눈이 쉼 없이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날은 그 흔하디흔한 겨울바람도 한 점 없는 날이었습니다. 그렇게 내린 눈은 한 시간이 채 지나기도 전에 길바닥은 온통 새하얀 눈이불로 덮였습니다. 길 가에 서 있는 자동차며 나뭇가지를 비롯하여 온 세상이 모두 하얗게 변해가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내가 어렸을 적에 보았던 전라도 시골 마을의 겨울 눈 풍경을 만끽하고 있는 듯 하였습니다. 나의 터무니 없는 소망이 지금 내 입장에서 배부른 소리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겨울을 맞이하는 이기적인 나에게는 소박한 불만이 있었습니다. 어릴 때에 흔히 보았던 것처럼 가느다란 나뭇가지 위에 소복소복 내려앉은 그 복스러운 모습을 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가지가 눈의 무게를 겨우 버티고 있는 듯한 그 가냘픈 아름다움에 젖어들 수가 없다는 것이 우선 큰 이유입니다.

여기에 하나 더 욕심을 부립니다. 장독대 위에 장독의 모양 따라 솟아 있는 하얀 솜뭉치를 이제는 다시 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만들어 내라고 어린아이가 떼쓰듯 하는 엉뚱한 투정인 것입니다. 그 옛날 동심의 나래를 펼 수가 없다고....
그래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하염없이 내리고 있는 눈을 바라보면서 어린 시절로 돌아갑니다. 어린 시절 갖고 놀았던 장난감 자동차의 추억처럼 소중한 무엇들을 더듬어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녹이 슬대로 슬어버린 그 잣대로 측정한다는 게 벌써 쓸 데 없는 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 그런데 여기 좀 보세요. 글쎄 여기서도 볼 수가 있어요. 큰 나무 둥치, 가느다란 실가지 할 것 없이 못 이길 만큼 가득가득 눈을 싣고 있는 겁니다. 와! 놀랍습니다. 이 광경이 나를 저만치 반세기 전에 맛보았던 추억의 시계 바늘로 돌려놓고 만 것입니다.

나는 그 솜뭉치 같이 예쁜 눈꽃에게서 눈을 뗄래야 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오래도록 눈을 맞추고 절간의 돌부처처럼 서 있었습니다.

“호호호...할아버지! 제가 그토록 예뻐 보이세요?”
“이 모습을 본 지가 아마도 반세기는 된 것 같구나. 좀 자주 보여줄 수는 없겠니?”
“그게 어디 제 맘대로 되나요? 그보다도 저를 알아보신 첫 번째 주인이신 것 같아요.”
“그렇구나. 정이 메마른 세상이 되어가는 거지.”

나는 녀석과 소리 없는 말을 주고받으면서 제발 ‘이 시간이 이대로 멈출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집을 나섰습니다.
“얘들아! 할아버지 나간다. 어서 따라 나온나...”
나가면서 등 뒤로 이 한 마디를 남긴 채 ‘동동동’ 계단을 뛰어 내려갔습니다.
나는 준비해간 고물 카메라로 그 멋진 모습들을 찍고 또 찍었습니다. 아이들도 덩달아 눈을 맞으면서도 신이 난 강아지마냥 좋아서 날뛰었습니다. 나는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을 카메라에 담기에 바빴습니다. 아이들은 생전 처음 보는 신기한 장면에 반했나 봅니다.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눈사람을 만들자고 외쳐댑니다. 아이들은 내 손을 잡아끕니다.

나는 우선 눈을 한 움큼 쥐어서 뭉쳤습니다. 그리고 손자를 향하여 힘껏 던졌습니다. 손자 녀석은 내가 던진 눈을 피하여 달아납니다. 나는 그를 쫓아갑니다. 눈 속에 넘어졌습니다. 전혀 아프지를 않습니다. 솜이불에 넘어졌으니 아플 리가 없습니다. 눈이 마치 새털처럼 포근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즐기기를 얼마나 계속하였을까? 시간의 흐름과 함께 날씨가 점점 추워지고 손이 차차 시려옵니다. 그래도 눈은 쉬지 않고 펑펑 내리고 또 내립니다. 나는 손자들의 재롱도 잊은 채 그 옛날 어린 시절 고향 마을의 소년이 되어 있었습니다.

백낙은 2016-10-13 10:24	이석희 작가님. 충주에 계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앞 부분을 보니 구미로 이사하셨는가 했습니다. 지금은 그 손주들이 커서 눈싸움을 하신 추억을 안고 계시군요. 제가 괴산 연풍교회에 있을 때는 자주 보았지만 이곳 포항은 눈이 잘 오지 않아서 눈싸움 경험이 아주 오래 되었답니다. 저도 동심으로 돌아가는 듯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은안하소서.

주응규 2016-10-13 13:54	이석희 작가님의 흰눈처럼 순결한 모습이 언듯 비취는듯 합니다 좋은 글 배독하고 갑니다 건강하시고 행복하십시요 그리고 좋은 글로 서재를 밝혀 주십시요

이석희 2016-10-13 15:21	《Re》백낙은 작가님 , 처음에는 대구에서는 다른 일하면서 살다가 학교로 오면서 충주로, 손자녀석 보아 준다고 구미로, 그게 아닐 것 같아서 접고 다시 충주로... 참 많이도 돌아다녔습니다. 허허허허 건강한 나날이 되시기를 심축합니다.

이석희 2016-10-13 15:26	《Re》주응규 작가님 , 정성을 다해서 격려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아직 햇병아리라서 그런지 글이 쉽게 쉽게 써지지를 않습니다. 열심히 한 번 해 보려고 각오는 하고 있습니다. 건강하세요.

정찬열 2016-10-14 15:15	이석희 작가님 어릴적 전라도 시골 마을 이란 대목에 눈이 번쩍 갑니다. 전라도 어디가 고향이신지 하고 말입니다. 저역시 크고 자란곳이 전라도 시골 이지만 그시절엔 눈도 많이도 내렸지요 추억어린 눈내리는 겨울 이야기 감사히 배독했습니다.

이석희 2016-10-14 15:54	《Re》정찬열 작가님 , 전주 주변인 완주군입니다. 집에서 전주까지는 이십여리의 거리였기에 다소 멀지만 걸어서 공부하러 다녔답니다. 눈 내린 아침길에 커다란 짐승 발자국을 보면 혹시 호랑이나 아닐까 오금이 저리기도 했지요. 그 시절이 그립습니다. 정다운 답글 감사합니다.

김상화 2016-10-15 06:56	이석희 작가님 안녕하세요 옛 추억을 떠오르게 하는 좋은 글 배독하고 갑니다 가을이 아름답게 익어가고 있습니다 작가님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작가님의 좋은 글 읽을수 있어 행복합니다. 이석희 작가님!

이석희 2016-10-15 07:27	《Re》김상화 작가님 ,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정다운 글 감사합니다. 짙어가는 단풍처럼 날마다 곱고 아름다운 꿈 속에 젖어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늘 편안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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