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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ple01_next.gif이인철 수필 소설 문학서재

ㆍ작성자 이인철
ㆍ작성일 2013-09-02 15:56
ㆍIP: 121.xxx.210
슈킹 (36 회)

  "그런데 강수현은 뭐야. 내 이름이 아니잖아?"
 
혹시 동인이 현수란 이름을 잘못 바꾸어 썼을 거라고 생각한 현우가

적이 놀라며 물었다.

 "앞으로 작업하다 보면 명함 줄 일이 많은데 진짜 너 이름인 강현수를

사용하면 큰일 나지. 이건 기본 중 기본이야."

 그 정도는 나도 알며 상식이 아니냐는 투로 동수가 목소리에 힘을 주며 말했다.

 "현수야, 난 이제부터 장동수가 아니고 박 부장이야. 박성식 부장이니까 잊지

않도록 해."

 그는 잘 입력해 두라는 뜻에서 현우를 향해 자기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현우는 도안된 동수의 명함에서 그리고 지금부터 자기를 박성식 부장으로

부르라고 한 그의 말에서 '박성식'이란 이름이 왠지 눈에 익었다. 곰곰이 생각한

끝에 임대계약서와 물품계약서에 동수가 서명한 이름이 바로 박성식이었던

것이 번쩍 떠올랐다. 그래서 명함의 이름을 위조주민증과 같은 박성식으로 팠고

그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들은 아직까지 나를 강현수로 알고 있고 동인은 현수의 성은 그대로 두고

이름의 앞뒤만 바꿔 수현으로 해서 명함을 새긴 것이다. 현우에서 현수로, 이제는

강수현으로 바뀐 자신의 운명이 웃어야 하는 건지 울어야 하는 건지 감이 오지

않았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현우는 그들이 모르게 의식적으로 쓴 웃음을 지었다.

 "현수 형, 이쪽 일을 하다 보면 불시에 상대방이 형의 신분증을 요구하는 경우가

가끔 있어요. 업자끼리도 그럴 수 있고 손님 입장에서는 자기의 중요한 서류를

맡겨야 하니 이해는 해야 되지요. 그런 일이 생기면 동수 형이 있을 때는 상관없지만

만약 혼자일 때는 지갑을 놓고 왔다거나 또는 펼치면서 주민증이 빠졌네 하는 식으로

액션을 취해야 해요. 절대 형의 신분증을 보여 주면 안 돼요. 아예 오늘부터 집에

놓고 다니시는 게 어때요?"

 고개를 끄덕이는 현우를 보고도 그는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현우는 자기

명함에 도안된 실장이란 직함이 왠지 주제넘게 보였고 어색했다. 실장이란 기업의

젊은 후계자나 전략부서의 책임자 등으로 어느 정도 레벨을 갖춘 이미지가 연상되는

직함으로 자신에게는 어울리지 않을뿐더러 상대방이 비웃을 것 같았다.

 "동인아, 동수는 나이가 좀 들어 보여 괜찮지만 나는 실장이란 직함이 좀 부담되네.

대리 정도면 어떨까?"

 "형은 참, 전에 형도 이 계통에 있어서 알겠지만 여기서는 만만한 게 부장, 실장이란

간판이니까 괜찮아요. 나이트글럽에서 웨이터들이 상무, 전무 감투를 쓰는 것과

매일반이에요. 그러니 신경 쓸 것 없어요."

 그러고 보니 1년 전 선배도 현우보다 불과 두세 살 위인데 부장이었고 다른

사채사무실에서 방문한 거래처의 젊은 사람들도 실장이나 부장으로 자기소개를

많이 했던 것 같다.

 "오늘 명함도 맡겨야 하니까 저 먼저 퇴근할게요. 형들은 내일부터 필히 양복에

넥타이 매고 정장차림으로 출근하세요. 이제는 이미지 관리도 중요하거든요."

 노트북을 가방에 넣고 외투를 걸친 그는 가볍게 손을 흔들며 사무실을 나갔다.

 "현수야, 너 얼마 있어?"

 "동인이가 준 돈 거의 그대로 있어."

 "오늘 우리 둘이 진하게 한잔 하는 거 어때? 동인이에게는 내가 내일 말할게. 현수

너랑 했다면 괜찮을 거야. 나보다 널 더 인정하니까."

 그의 눈이 애절한 눈빛으로 변했다.

 "미안하지만 이건 공금이라 안 돼. 대신 저녁 겸 반주나 하자. 이해해줘."

 그의 어깨를 살짝 치며 현우가 씩 웃자 멋쩍은 듯이 그가 머리를 끍적거렸다.

 어제 집기와 비품 정리가 끝나자 동인이 앞으로 사무실 경비를 맡으라며

그에게 얼마간의 돈을 주었었다. 오늘만 하더라도 그는 문구용품비와 간판 계약금,

점심 값 등으로 지출 된 비용을 금전출납부에 꼼꼼히 기재하였다.

 그들은 사무실 근처 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며 각자 소주 한 병씩을 마시고 헤어졌다.

현우는 평소 주량을 마셨음에도 꼭 찍어 말할 수 없는 무엇으로 인해 가슴이 답답해

왔다. 그래서 그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타려던 정거장을 지나쳐 한 정거장을 더

걸었다.

 하늘은 눈이라고 올 듯 잔뜩 흐려 있었다. 뚜벅뚜벅 걷는 그의 늘어진 어깨 위에

겨울 저녁의 긴 그림자가 힘없이 따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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