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토순이 죽었어.” 퇴근 후 약속된 술자리 중,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아들 녀석이 놀란 듯 흐느끼는 목소리에 가슴 한쪽이 철렁 내려앉는다. 태어나 처음으로 사별이라는 아픔을 경험한 아들, 평소 그렇게도 애지중지 챙기던 토끼 아니 여동생이었는데 …

5년 전쯤인가 보다. 둘째 녀석이 자기 엄마를 조르고 졸라, 애완용 토끼 한 마리를 식구로 맞이하던 날, 난 호통부터 치고 말았다. 어릴 적에 토끼를 키워 보았기에 그리고 토끼의 습성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아연실색을 했다. 당장 물리라고 호통을 쳤다. 하기야 평소 애완견도 냄새나고 털 날린다고 질색하던 집사람이었다. 아이들이 그렇게 졸라도 못 들은 척하는 집사람이었는데, 둘째의 끊임없는 애원에 하는 수 없이, 못 이기는 척 들어 주시로 했나 보다. 잘 키우고 청소도 열심히 하겠다고, 애걸복걸하는 아들 녀석의 성화에 나도 하는 수없이, 조건을 달아 걸었다. 토끼장에서 반드시 키울 것, 청소는 아침저녁으로 꼭 할 것, 아빠 잔소리 나오지 않게 알아서 할 것을 다짐을 받고 토끼를 새 식구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하얀색 털에 앙증맞은 까만 눈을 가진, 우리 가족이 된, 토끼를 우리는 토순이라 이름을 지어 주었다. 평소 말이 별로 없던 큰아이도 토순이와 알 듯 모를 듯한 대화를 하며 동생 다루듯 친근감이 더해가고, 둘째 아이는 더 말할 나위가 어디 있으랴, 그리고 집사람도 동물을 그리 탐탁지 않게 대하는 성격인데 차츰차츰 정을 준다. 주먹 크기보다 조금 큰 녀석은 거실이며, 이방 저 방 뛰어다니며 아이들과 집사람의 관심을 한껏 누렸지만, 나에게는 천덕꾸러기나 다름없는 토끼일 뿐이었다.

아이들은 인터넷에 토끼 기르는 법 등을 검색하여, 애지중지 잘 키우는가 싶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아빠와의 약속은 먼 이야기 되어간다. 토순이를 토끼장 밖에서 키우는 빈도가 차츰차츰 늘어가는가 싶더니, 어느 사이 내가 없을 때는, 아예 거실에 내어놓고 방목 수준이다. 물론 내가 있을 때는 눈치를 보는 듯했으나, 내가 없을 때는 같이 데리고 놀다, 토끼장 밖에 내어놓고 학원에 간다. 퇴근이 나보다 늦는 집사람인지라 퇴근 후, 배설물이며 어지러운 청소는 서서히 내 담당이 되어간다.

아이들에게 몇 번이고 야단을 치며 경고를 하였지만, 그 당시뿐이다. 불쌍하고 갑갑할 것 같아 가두어 둘 수 없단다. 쑥쑥 자라나는 토순이는 6개월이 지나자 덩치가 강아지 수준이다. 털갈이 때면, 온 집안에 털 날리고 오줌은 얼마나 독한지 바로 닦아내지 않으면, 거실 마룻바닥에 스며들어 얼룩이 진다. 퇴근하면 고약한 냄새 때문에 창문을 다 열어젖히고, 청소하는 일들이 반복되어간다. 토순이를 잡아 토끼장에 넣을라치면, 미물도 사랑과 관심을 둬 주는 사람한테는 따르지만, 내가 잡을라치면 30분은 숨바꼭질을 해야 한다. 이방 저 방 숨어들고 소파 밑 침대 밑에 숨어들어 청소기로 어름 장을 놓으면, 깡충깡충 약 올리듯이 잘도 피해 다닌다. 결국은 제풀에 지쳐 내가 포기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이들이나 집사람이 부르면, 어디에 숨어 있다가도, 냉큼 달려오는 녀석이 나만 오면 숨기에 바쁘다.

2년이 지나면서부터는 아이들은 토순이를 아예 토끼장에 가둘 생각들을 안 한다. 집사람도 이제는 아이들 편에 서서 아이들의 의견을 충분히 이해한다며, 토순이를 어린아이를 대하듯, 퇴근 후면 바로 토 순이를 찾아

“오늘 하루 잘 놀았어. 보고 싶었다. 토 순아”라며 쓰다듬어 주고 토순이 와 대화하며 말벗이 되어간다. 난 빈말 삼아 나한테 그렇게 했으면 사랑받을 거라고 은근히 질투 어린 이야기해 보지만, 우리 딸 우리 딸 입버릇처럼 되뇌며 토순이에 대한 사랑은 깊어만 간다. 이젠 아예 밤이 되면 큰아이 작은 아이 할 것 없이 방문을 삐죽이 토순이가 들어 올 수 있도록 열어 두고 자는 사태에 이르렀다.

특히, 토순이는 작은 아이를 좋아했는데, 작은 방에 살다시피 한다. 방문이 닫혀 있으면, 열어 달라 두 발로 긁고 하면서 난리가 난다. 작은 아이는 토순이를 끼고 자기도 한다. 안 봐도 뻔하지 않은가! 이불에 오줌을 싸고 온 방엔 토순이 지지에다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다. 이불에 오줌을 싸면, 아무 군소리 없이 빨래하는 집사람이나 냄새나는 토순이를 데리고 자는 아이나,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작은 아이 침대는 토순이 오줌으로 얼룩져 버리기에 이른다. 이렇게 하루 이틀 생활하다 보니, 이제 나도 서서히 적응되어간다. 아빠를 무서워하는 토순이는 큰방엔 발길을 좀처럼 두지 않는다. 문이 열려 들어 올라치면 눈치를 살피고, 소리를 버럭 질러대는 아빠의 고약스런 성질을 토순이의 머릿속엔, 무서운 아빠 나쁜 아빠쯤으로 담아두었나 보다. 그리고 나를 더욱 경악하게 했던 것은 토순이의 물어뜯는 습성이다. 방바닥이고 벽지고 소파고 할 것 없이 이빨로 물어뜯어 엉망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콘센트 전기선을 갉다가 합선이 되어 털이 까맣게 타기도 했었다. 천지도 모르는 참 고약한 딸을 기르는 셈이다.

여름 휴가철에 처가 집에 가는데 나 빼고는, 모두 토순이를 데려가야 한다는 것이 우리 집 정론이다. 어쩌겠는가! 집사람은 물론 아이들까지 성화니 따를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처가에 가면 토순이 때문에 온 식구가 난리다. 처음엔 멋모르고 귀여워라. 하던 식구들도 똥이며 오줌이며 음식 만드는데 털 날리고 하니 얼마나 지저분하겠는가! 더욱이 집에서 애완견 키우는 것조차 질색하며 기르지 않는 처가인데 말이다. 토순이를 풀어놓으면 거실이며 주방이며 장인 방까지 드나들며 이불에 실례하는 가하면,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며, 이빨로 갉고 할퀴고 하여, 장인 장모님의 공포 대상이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장인 장모님 및 처가 식구들이다. 처가 집 식구들은 토순이가 옆에 올라치면 질겁을 한다. 해마다 휴가철이면, 토순이도 데리고 오냐고 걱정스레 물어보시곤 하고, 가끔 안부 전화를 하는 집안 친척들도 으레, 토순이는 아직 살아 있느냐고, 토순이의 안부를 당연시 묻곤 했다.

5년이란 시간 동안 이루 말할 수 없으리만큼, 사연도 많고 탈도 많았던 우리 딸 토순이다. 미운 정도 정이라 했던가? 나도 조금씩 정이 들어 토순이와 유대감이 쌓여갈 무렵, 초봄부터는 토순이는 사료든, 좋아하던 배추 잎이든 잘 먹지 않더니, 야위어간다. 집사람이 아카시아 잎이나 각종 채소, 사과 등 평소 좋아하던, 토순이의 먹거리를 잔뜩 준비해와 먹이려고, 온 정성을 쏟아도 토순이는 걱정하는 식구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름시름 야위어 간다. 그러던 토순이는 결국, 오빠의 흐느낌 속에 눈을 감았다. 술자리를 파하고 허둥대며 귀가해보니, 집사람은 눈시울이 붉어져 있고, 대학생이 된 큰아들도 눈물을 훔치고 있다. 작은 아이는 죽은 토순이의 눈을 감기려 애쓰며 넋을 달래며 울고 있는 모습이 애처롭다. 축 늘어진 토순이를 보는 순간, 나도 그만 울컥 눈물이 돈다. 미운 정 고운 정이 자그마치 5년이란 시간을 함께한 토순이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정이 깊이 들었다. 아이들은 생전 처음으로 사별을 경험해보았다. 두 아들의 마음은 그 얼마나 안타까울까 이해가 된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집사람과 나는 가까운 산을 찾아 우리 딸 토순이를 정성스레 묻어 주며, 좋은 곳에 잘 가라고 마지막 작별 인사를 했다. 토순이의 하얀 모습을 닮은 아카시아 향이 그윽하고 찔레꽃 향이 곱게 피어 있는 어느 산 양지바른 곳에, 우리 막내딸 토순이를 묻어주었다. 토순이를 묻고 돌아오는 길에 이름 모를 산새들이 토순이의 넋인 양, 슬피 울며 “엄마 아빠 잘 가시라”고 말하는 듯하여, 집사람과 나의 두 눈가에는 눈물 가득 고여 있었다. 아직도 우리 집 어딘가에 토순이가 있다는 착각을 가끔 하곤 한다. 퇴근 후, 텅 빈 집안에 들어서면 어딘가에서 쪼르르 달려 나올 것만 같아 나도 모르게 “토순아” 하고 부른다. 내 마음이 이를진대, 아이들이나 집사람 마음은 오죽하랴. 요즘 많은 가정에서 애완용 동물을 기른다. 많은 정을 주며 함께 생활하는 반려동물이자 가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