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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ple01_next.gif김복희 수필가 문학서재

ㆍ작성자 김복희
ㆍ작성일 2020-12-23 19:50
ㆍIP: 125.xxx.48
눈 위의 그림자

살짝 눈이 쌓인 어느 추운 겨울날 아침을 먹고 집에서 웅크리고 있느니 아침 운동 겸 겨울 풍경을 감상하자고 산책길에 나섰다. 아무런 생각 없이 열심히 걷다 보니 길 위에 소복이 쌓인 눈 위에 아무런 흔적이 없는 것이 너무 아름답고 깨끗해 보여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이곳저곳 풍경을 담다 보니 내 발아래 형체 아닌 형체가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 폰카를 대고 보니 또 하나의 풍경이 나타났다. 알고 보니 그것은 내가 만들어낸 예술품이란 것을 깨달았다. 내가 움직이는 대로 똑같이 연출하는 나의 형상 그림자가 하얀 눈 위에 연출하는 무대였다.

세상의 지저분함이 보기 싫어 하얀 눈으로 색칠을 해준 자연에다 내가 새로운 형체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 형체를 만든 것은 자연의 힘을 빌려서 내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닌가?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해 보니 대자연의 아름다움과 그 속에 손재하는 나의 아름다움이 뇌리를 스쳐 간다. 존재하는 것 같으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것, 잡힐 것 같으면서도 잡히지 않는 것, 분명히 보이는데 존재하지 않는 것, 실상(實像)인가 허상(虛像)인가 알 수 없는 것이 그림자인 모양이다.

그러다 보니 내가 연출해 낸 것이 그림자인데 이 그림자가 실상인지 허상인지 만들어 낸 사람이 알 수 없다면 나를 연출한 존재가 나를 볼 때 실상으로 보는지 허상으로 보는지 알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실상으로 보인다면 존재하는 존재일 것이고 허상으로 보인다면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된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림자를 내가 존재한다고 보면 존재하는 것이 되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되는 것이다. 결국, 존재하고 존재하지 않고 하는 것은 내 마음에 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살아가면서 행복하다, 행복하지 않다고 하는 것도 결국 내 마음에서 정하는 것이요, 무엇을 하고 싶다 하고 싶지 않다는 것도 다 내 마음에서 결정하며, 가지고 아니 가지고도 내 마음이요, 모든 결정은 내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모두 다 내 뜻대로 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니 그렇지는 안일 것 같다. 그림자를 어떤 형체로 만들 것인가? 하는 것은 내 마음이라고 하지만, 그 그림자를 만들고 아니 만들고는 나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림자를 만드는 데는 필수적인 조건을 갖추어야만 만들 수 있다. 즉 빛이란 것이 있어야 그림자를 만들 수 있지 빛이 없는데 내가 그림자를 만들고 싶다고 해서 만들 수는 없다. 그러고 보니 무엇을 하고 아니하고, 만들고 아니 만들고는 거기에 따른 필수 조건들을 갖춰야 할 수 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열심히 노력하며 사는 것도 이런 필수 조건들을 더욱 많이 갖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무엇을 만들고 아니 만들고는 자기 마음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가 우선 되어야 한다. 이처럼 만들 수 있는 조건을 다 갖추었을 때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무엇을 해 보고자 하는 것은 하나의 허황한 꿈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즉 필요 없는 허욕으로 고민과 갈등만 가져다줄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의 허상에 불과한 그림자도 빛이라는 필수 조건이 있어야 하는데 실상을 만들어 내려면 허상을 만드는 것보다 더 많은 조건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이런 실상을 만들기 위하여 무던한 노력을 하고 공을 들인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나는 오늘 문득 눈 위에 있는 내 그림자를 바라보면서 자연의 아름다움에 흠 푹 취하면서 무한한 실체를 만들어 내는 인간으로 태어나고 살아온 것이 얼마나 행복한 존재인가? 다시 한번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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