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창작문학예술인협의회/대한문인협회-수필

ㆍ작성자	이도연
ㆍ작성일	2020-11-18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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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강아 낙화암을 기억하는가?

백마강아 낙화암을 기억하는가?

이 도 연

마곡사에서 잘 정돈된 도로를 사십여 분 달려 백제 고도인 부여의 부소산성에서 저물어가는 가을 오후의 햇살을 바라보며 길을 걷는다.
이곳은 능산리 고분과 궁남지, 부소산성 등 백제 문화의 보고로 백제역사유적지구로 되어있다.

부소산성 입구에는 넓은 잔디가 완만하고 편안한 능선으로 이어져 백제의 수도 사비의 우물터와 수로 시설 및 저수조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어 그 시대의 수로 시설을 가늠할 수는 있지만 정확한 모습은 사진으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으며 아직도 백제 문화유산 발굴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잔디광장 같아 보이지만, 관북리 유적이라 부르는 이곳에는 백제의 왕궁지 후원으로 성으로서 방어선과 대형 전각, 연못과 3개의 백제 시대 우물터가 남아 있고 주변에서는 당시의 수도를 상징하는 수부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쌓아 놓았다.

천년의 세월과 백제인들이 혼이 깃들어 있는 기와 조각이 시대를 뛰어넘어 내 손안에 있다. 당시의 물건을 만져 볼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감동이다.
손안의 질감은 단지 차가운 무기체인 기와 조각일지 모르지만 나의 몸 안으로 뜨거운 백제인들의 기운이 빗살무늬와 연화문 꽃잎으로 피어나 아득하게 스며들어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부소산성 입구에는 멋스럽고 독특한 모양의 건물이 있다. 백제 문화와 자료를 살펴볼 수 있으며 각종 행사 및 전시를 할 수 있는 갤러리가 있다.
갤러리 아래에는 조선시대 동헌과 객사가 오백 년 전 당산나무 아래 몇 채가 남아 있으며 조선 시대에도 이곳은 중요한 지방 행정 중심지였던 것이다.
때마침 사비성에서 과거 보는 장면을 재현하여 학생들이 복색을 갖추고 행사를 하고 있는 모습이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는 듯하였다.

고란사 낙화암 이정표를 따라 부소산성을 오른다.
완만한 능선으로 이어지는 황톳길 주변은 만추의 가을임을 증명하듯이 온통 곱게 물든 단풍으로 가득하고 숲에서는 싱그러운 가을의 향기가 가슴 깊이까지 스며든다.
여기저기 울타리를 쳐 놓은 곳에는 아직도 땅속 깊이 잠자고 있는 백제문화 발굴을 위한 표지를 세워놓았다.

오르고 내리기를 몇 번 하면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자 능선 끝에 정자가 보인다.
백마강(白馬江)이 휘돌아 흐르는 단애 위에 커다란 바위가 있고 그곳에 정자를 세워 백화정(百花停) 이라는 현판을 달아 놓았다.

서기660년(백제의자왕 20)나당 연합군에 의해서 백제가 함락당하자 적에 손에 유린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여 백마강에 몸을 던진 삼천 궁녀의 넋이 흰 꽃으로 피어난 백화정이 바로 그 유명한 백제의 마지막 의자왕의 궁녀들이 떨어져 꽃이 된 낙화암(落花岩)이며 낙화암에 날리던 백화는 백마강에 피어났다.

계백의 죽음은 의로웠으며 삼천 궁녀는 백화로 피어나고 꽃으로 아름다웠다.
백마강을 바라다보며 수녀님 두 분이 합장하고 백화로 승화한 삼천 궁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기도하는 모습이 경건하고 아름다워 울컥하는 마음이 들어서 나도 모르게 눈을 감고 묵념을 한다.

드넓은 삼각주에 펼쳐진 들판을 가로지르며 낙화암을 감싸고 돌아 둥근 원을 그리며 백마강이 그림같이 흐르고 강물 위에 둥실 떠 있는 황포 돛배는 유유히 강을 거스르고 멋진 풍경 속으로 흘러간다.
"백마강 고요한 달밤에 고란사의 종소리가 들리어 올 때 구곡간장 찢어지는 백제 꿈이 그립구나!"
옛날 구슬프게 불러보던 백마강의 노래가 나도 모르게 절로 나온다.

낙화암 아래 백마강에서 부드럽고 낭랑하게 들리는 스님의 독경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온다.
200m 정도 가파른 언덕 아래로 내려가면 강 수면에 맞닿은 곳에 황포 돛배 선착장이 있고 그 위로 고란사가 암벽을 기대여 포근하게 자리 잡고 있다.

부소산성 끝자락 백마강 기슭의 조그마한 고란사는 백제의 고찰이며 백제의 마지막 혼이 담겨 있는 숨결이 느껴진다.
극락보전(極樂寶展)이 강물에 튕겨 오르는 빛으로 반짝인다.
나와 남이 없는 곳에 스스로 존재하니 모두가 공이로다. 법화 향기 가득한 도량에 맑고 밝은 달빛 아래 석가모니불 임하시니 참된 마음 고요하고 온전히 자취는 없지만, 공도 색도 아닌 부처님을 뵙고 나니 대도(大道)를 깨달아 세상사 번잡한 일 하나 없고 찬란한 빛이 더하는구나! 백마강 흐르는 물은 그냥 그렇게 또 흐르고 흐르건만 언제 다시 이곳에 서 볼까?

고란사는 마곡사의 말사로 백제 말기에 창건한 절로 추종하며 절 뒤에 바위틈 고란정(皐蘭井)에는 달고 맑은 샘물이 지금도 찰랑거리며 샘솟는다.
위쪽 바위틈에서는 희귀식물인 고란초(皐蘭草)가 자생한다.
고란초가 자생하는 곳에 절을 세워 절 이름이 고란사가 되었고 고란정(皐蘭井)이 되었으며 고란초가 되었으니 고란사(皐蘭寺)가 고란초이고 고란정이 고란초이며 고란사이니 그들은 모두 같은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고란사는 백제의 왕들을 위한 정자였다고도 하며 궁중 내불전(內佛展) 이었다고 전하기도 한다. 물 한 바가지를 떠서 시원하게 마시며 백제의 왕이 마셨을 물이라고 생각하니 물이 아니라 역사의 뒤안길을 흐르는 세월을 마시는 것 같았다.

고 란사 옆에 있는 영종각(靈鐘閣)에서 타종을 하자 울려 퍼지는 종소리는 낮고 묵직하며 가슴 깊은 여운으로 울리고 종소리 중심에는 낙화암에서 백화로 승화하여 백마강에 몸을 던진 삼천 궁녀의 혼을 부르고 그들의 넋을 위로하는 소리가 들린다.

오늘도 백마강은 말없이 유유히 흐르고 계백의 황산벌에는 수많은 사람의 삶의 터전이 되어 있으며 나라를 구하고자 식솔들을 버리고 전장에서 초계와 같이 목숨을 버린 계백 장군이나 강에서 절개를 지킨 궁녀들을 기억하기에는 너무도 오랜 세월 저편으로 흘러오고 흘러갔다.

강 수면을 가르는 황포 돛배도 그날을 기억하지 않는 무심천을 흐르고 떠갈 뿐이나 삶의 질곡 속에서 살아남은 비류의 미추홀에서 태어난 백제의 후손이자 이 민족의 자식으로 오늘을 살아오고 있는 나는 깊은 감회에 젖어 낙화암 절벽 아래 고란사에서 한동안 말없이 수 세기 전에 흐르고 흘러갔을 백마강을 바라보며 또 다른 강물의 시간 속으로 걸어간다.

“시간혁명”인류의 조상인 사피엔스의 후손들에게

공주 "마곡사" 가을 풍경 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