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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ple01_next.gif이도연 소설가 문학서재

ㆍ작성자 이도연
ㆍ작성일 2022-03-17 11:31
ㆍIP: 175.xxx.88
병고 끝에 깨달은 육신에 대한 죄책감
병고 끝에 깨달은 육신에 대한 죄책감

이 도 연

아주 오래전 태고의 유전적 혈류가 사람의 본성을 만들고 나무의 뿌리가 빨아올린 똑같은 수액을 먹고 피어난 꽃이나 열매가 나무의 종류에 따라 다른 것은 참으로 신기하다
똑같은 수액을 먹고 자란 것이 왜 다른 꽃으로 열매로 번성하고 유전하는 것일까?

원초적인 물음에 존재하는 나는 어떤 특질에 의해서 조합된 단백질로 이루어진 DNA 집합체 인가?
내 몸에 내가 알지 못하는 내가 있어 나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세월은 보이지 않는 내 삶의 원초적 자아이며 유전학적 형질인 것이다
그것은 통제할 수 없는 나로 보이지 않는 혈류의 흐름이 만들어낸 자연의 복제판이다.
스스로 자임하며 그렇게 생각하고 위로했다.

보이지 않는 것은 공원묘지 양지바른 언덕에 내 인류의 마지막 기원이자 나의 직계 계층 유전적 소산의 모태인 부모님 묘소에 물을 일이다.

그러나 그러나
한참이라는 긴 터널을 지나 짧게 남은 아직은 예측할 수 없지만 얼마 남지 않은 세월 앞에서 보이지 않는 본능의 지배라고 생각했던 것들 그것 만이 다가 아니었다는 것을 어느 날 극심한 육신의 고통 끝에서 문득 깨달었다.

육신의 관리를 맡고 있는 의사라는 근엄한 표정의 선생님은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사십 년 전쯤이나 해보았을 늙은 얼굴로 단순하고 똑같은 질문과 행동을 하지만 (최소한 내가 보기에는) 병명은 사람마다 다르게 말하고 고지서를 발부하는 대단한 우리 동네 의사 선생님의 표정은 언제나 교과서의 표정 같다.

두 계단쯤 내려가 일층에서 만나는 수다스러운 약사님 처방전을 바라보며 밝게 웃는 그분은 내가 반가운 것인지 처방전을 보내온 위층 형님이 고마운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나는 처분만을 기다리는 환자일 뿐이다.

두통과 오한 복통을 수반한 몸의 반항은 항생제와 또 다른 약물의 조화로 며칠을 싸우다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러나 히포크라테스 후예님이 처방한 병명과 관계없이 만성적으로 알아온 고질병이 나도 모르게 나의 육신에서 행방이 묘연해졌다
아주 오랫동안 나와 함께 했던 사소하지만 까칠하게 신경 쓰였던 뾰루지 같은 존재가 주소지 이전도 하지 않은 체 증발하듯이 사라졌다.
그것은 공원묘지의 잠들어 있는 내 최상위 선조의 영향도 아니요 히포크라테스의 처방에 들어 있는 항생제의 권능도 아닌 듯하다.

유년 시절부터 주변인에게 보고 배워서 어른은 이래야 하고 남자라면 해야 하는 일련의 부적같이 행하는 엉터리 주술사의 마법에 걸려 오랜 시간 배우고 행했던 것 때문인 것이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던 소년은 어른의 흉내를 냈고 사람들은 칭찬을 했다.
직장에서는 술 잘 먹는 사람이 일도 잘하는 법이야 동서고금에 없는 말도 안 되는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여린 위장에 호기롭게 부어버린 술은 다음날 고통을 수반한 느릿한 육신의 변화를 경험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더욱더 빠르게 움직였고 그들은 고개를 끄떡이며 웃었으며 나는 고통을 잊어버릴 수 있는 최면에 빠졌다.

이후 꾸준히 장복하면 보신이 된다는 우스갯소리를 하며 삶의 매 순간 온갖 핑계거리를 만들어 지속적으로 복용하고 나만의 방법으로 즐겼다.

주님과 단절은 하늘의 주님이 아닌 내 이성의 주님이며 젊은 날의 객기에 힘을 싫어 주던 만용의 주님이었다.
주님과의 결별은 육신의 복통과 두통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멀리했던 것이지만 돌이켜 생각 하건대 단순한 주님에 대한 습관이 아니었다.
학교에서 배우지 않은 나의 어른들에게서 배우고 따라 했던 습관의 씨앗이었다.

유전적 혈류의 증표라고 생각했던 증거들 그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지난날의 내 행동의 진화이며 그들을 향한 꾸준한 답습이었으며 지금 이 순간 어디선가 또 다른 나를 복제하고 답습하고 있는 누군가가 있을지 모를 일이다.
그것은 잘못 입력된 습관과 망상의 코드이다.

옳지 않은 생활 습관을 발뒤꿈치 굳은살이 되도록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깨달은 것은 내 영혼을 담은 육신에 대한 모멸이었고 학대였다
이 땅의 많은 산과 들을 오르내리고 이름 모를 도시를 배회하며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동행했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긴 여행 끝에 지쳐 버린 육신은 언제나 몸살을 알았고 당연한 것으로 알았다.
그것은 심각한 오류로 어렵다 힘들다 지쳐가는 내 몸에서 보내는 신호를 알아듣지 못한 무지의 결과였음을 안다.

지나온 날보다 살아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이 순간에 너에게 정말 미안하다는 말을 하기에는 늦은 감이 없지 않다 만, 영혼의 안락만을 위하여 육신의 아픔을 저버린 무모하고 어리석은 존재인 내가 죄스럽다.
그러나 이제라도 내 영혼과 오랜 시간 말없이 함께한 지치고 병든 너에게 감사와 경의를 표하며 미안하다 미안하다 이제는 최선을 다해 너를 어루만지고 위해주고 사랑하리라 이제 와 속없는 다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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