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일들과 나눈 이야기

오늘은 저녁나절 쯤 해서 과일이나 좀 살까하고 마트에 갔습니다. 요즈음 백화점이나 마트에 가면 눈도 즐겁고 코도 즐겁습니다. 거기에 더하여 입도 덩달아 즐거움을 한 아름 안고 돌아옵니다. 울긋불긋 오색 빛으로도 오히려 모자랄 만큼 다양한 옷으로 치장한 온갖 과일들이 그 맛과 향으로 치장하여 저마다의 자태를 뽐내고 있습니다. 오감이 황홀할 지경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과일 가게를 가서 보면 그 수많은 과일들이 마치 자기 얼굴을 자랑이라도 하는 것처럼 환하게 웃고 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오늘날은 온 세계가 한 집안이 되어 과일가게 식구들의 얼굴이 훨씬 더 다양한 모습으로 꾸며지게 되었습니다.

“어서 오세요. 저를 보러 오셨군요. 눈이 부시지요? 코도 즐거우시지요? 잠깐만이라도 좋으니 저와 함께 사진 한 장 찍어요. 제발 다른 곳으로 가지 마세요. 만남은 반갑지만 이별은 슬퍼요.” 라고 노래하며 마치 나를 붙잡는 듯합니다.

“저를 사 가시면 결코 후회 같은 것은 안하실 거예요. 아니 행복하실 거예요.

제가 당신 가족들의 건강을 책임져 드릴게요.”

이렇게 나를 유혹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속성상 여러 가지 과일들을 둘러보고 난 후에라야 마음을 정하곤 합니다. 다 둘러보고 난 다음에 다시 거기에 와서 아까 그 과일을 고르더라도 그렇습니다. 이런 나를 보면 그 과일들이 “피이...” 하고 속으로 비웃을 것만 같습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보면 정말로 그런 것 같습니다.

사실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우리 사람들은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고 생활에 도움을 얻기 위하여 농작물들을 심고 기릅니다. 가축이라 하는 것도 실상은 우리의 경제생활에 이로움을 얻기 위하여 기르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나도 다 늙어서야 겨우 몇 뼘만큼이나 될 만큼 좁지만 놀고 있는 땅을 얻었습니다. 거기에 채소와 몇 가지 과일을 길러서 먹고 있습니다. 그저 소일거리이니 더 바랄 것도 없지만 그렇습니다. 이것도 농사라고 아침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밭 나들이를 하고 있으니 개근상은 따 놓은 당상입니다. 채소들이 얼마나 고맙게 생각할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아니 어쩌면 식물들도 주인의 발걸음 소리에 잠을 깨어 성장을 할지도 모른다며 단정 짓고 싶습니다.

내가 어렸을 적 가계에 도움을 얻고자 돼지 한 마리와 닭 서너 마리 정도를 길렀던 적이 있습니다. 끼니를 못 때우고 굶기를 밥 먹듯 할 때였으니 겨우 부엌에서 나오는 구정물을 먹고 자란 검은 돼지는 추석 명절이 돌아오면 팔려 나가서 목숨이 끊길 때 내 눈물샘은 마를 순간이 없었습니다.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나는 도망쳐 들어온 방에서 숨어 울었습니다. 겨우 너 댓 마리 되는 암탉은 알을 받아 열 개의 달걀을 솜씨 좋은 어머니가 지푸라기로 엮어 꾸러미로 만들고 학교가면서 가게에 가서 용돈을 만드는 유일한 수단이기도 하였습니다. 돼지와 닭에게 먹이를 주는 일은 허리 아픈 할머니 몫이었습니다. 허리가 뒤로 넘어가신 할머니는 양 손을 허리 뒤쪽에 받치고 먹이를 주시는데 나는 항상 모른 체만 하였습니다. 그런데 할머니만 마당에 나오시면 돼지는 고래고래 고함을 더 지르고 닭들은 쫄쫄 할머니의 뒤만 줄지어 따라 다녔습니다. 나는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식물이나 동물이나 거름도 주고 잡초도 뽑아주고 물도 주고 밥도 먹여주는 등 저에게 정성을 들이는 사람에게만 그들도 정을 주고 이익도 주고 고마움도 나눈다는 사실을 그 때에는 몰랐었습니다.

얼마 후 할머니께서는 이 세상과 이별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긴 세월을 함께 살았기 때문에 정이 더 많이 들었었고 항상 함께 살 것만 같았던 할머니였는데 그만 돌아가신 것이었습니다. 나는 돼지와 닭을 바라보면서 뜨거운 눈물을 더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은 식물이나 동물이나 각자 자신의 생명을 살아가는 것은 각자 자신의 문제일 뿐입니다. 또 사람이 그들에게 정성을 다하면서 기르는 일도 따지고 보면 자신의 이익을 위함이지 농작물이나 가축을 위하여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결과는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관계로 생을 이어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사실 자체를 모르쇠하며 사는 경우가 더 많지 않을까 하는 점입니다.

사실 그들은 우리 사람에게 갚을 생각만 하고 살지 우리 사람들에게서 받을 생각은 일체 하지 않을 것입니다. 동물이나 식물이 사람에게 바라는 게 무에 있겠어요? 나는 이 나이 먹도록 농작물이나 동물들이 우리 인간에게 원하는 일은 사랑해 달라는 생각 말고는 다른 어떠한 것도 있다는 말을 일찍이 들어본 바가 없습니다.

사랑해 달라고, 어서 사다가 맛있게 잡수시라며 생글생글 웃고 있는 저 과일들을 생각해 보세요.

주인에게 배고프지 않게만 해주면 그 뿐, 예뻐해 주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개, 고양이, 토끼, 등 동물들을 다시 생각하여 봅니다. 어디 동물들 뿐이겠어요. 각종 화초와 채소 그리고 울창한 숲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우리 인간에게 바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정을 가진 동물들은 그저 먹이와 사랑만을 바랄 뿐이고 식물들은 그저 베풀기만 할 뿐 어쩌면 그 흔 하디 흔 한 사랑타령도 안 하고 있는 줄은 다 알지 않습니까?

주기만 하여도 행복한 그들과 받아야만 하는 인간의 이기심이 함께 겹쳐서 나의 머리를 혼란스럽게 합니다. 그래도 이 순간만큼은 한 지혜를 얻었다는 뿌듯함에 감사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