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박통 시절의 일이다.
서울시에서 개최하는 행사장에 배치한 좌석 문제로 경찰서장들이 불만을 품고 현장을 떠나버린 일이 있었다.
급수로 따지면 구청장들이 서열상 상위 직급이지만 예우상 서장들을 구청장과 같은 자리에 배치해 오던 관례
를 깨고 구청장의 뒤 서울시 과장들과 같은 위치에 좌석을 배치한 것에 서장들이 불만을 나타낸 것이다.
구청장 뒷자리에 시청 과장들과 나란히 배치된 좌석을 본 서장들은 굉장히 화를 냈다고 한다. 심지어는
"어떤 자가 이렇게 좌석을 배치한 거야 다 잡아 넣어버려" 라고 했다고 했다. (당시 신문에 보도)
나중에 도는 얘기로는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박통이 진노했고 대부분 서장은 얼른 제 자리로 돌아왔지만
일부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한 서장은 그 일로 옷을 벗었다고 한다.
조직 생활을 하는 동물은 다 서열이 있게 마련이다.
이런 동물 세계에서의 서열은 우수한 유전자를 가진 동물의 씨를 번지게 해 생존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 수놈끼리 치열한 투쟁을 거쳐 승리한 수놈이 암놈을 차지해 씨를 퍼트리는 특권을
누리는 게 동물의 세계이며, 투쟁 과정에서 살아남으려면 남보다 우수한 체력은 물론, 지능과 투쟁심까지
고루 갖추어야 하니 무리를 이끄는 대장은 가장 우수한 유전자를 갖추었다는 검증을 거친 셈이기도 하다.
사람도 원시시대 짝 찾기는 掠奪婚이 대세였으니 동물의 세계나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이 모여 살게 되고 조직화 되고 분업화되는 과정을 거치며 우수한 유전자를 갖춘 강자라는 판단을
하기 위한 검증도 어렵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사회가 분업화되고 하는 일이 각자 다른 탓에 힘에 의한
투쟁처럼 우열이 뚜렷이 드러나지 않아 누가 더 강자인가를 구분하기도 모호해진 것이다.
앞집 아저씨는 교사이고, 옆집 아저씨는 공무원이고, 뒷집 아저씨는 가게를 경영한다고 치자,
누가 서열상 위이고 아래라고 비교해 판단한다는 자체가 불가능하지 않은가,
일부일처제는 지구상의 대부분 나라에서 채택한 짝을 맺어주는 공평한 제도이다.
강자라 하여 여자를 여럿 얻거나 약자라 하여 짝을 얻지 못하는 세상이 아니다. 누구나 하나의 짝에
만족해야 하고 이를 어기면 상당한 불이익으로 제재하기도 하면서까지 제도를 지키려 한다.
하지만,
자신의 강함을 드러내 좋은 짝을 찾자는 본능은 일부일처제라는 윤리적 테두리에 갇혀 억압된
것이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닌 것 같다. 이런 본능이 거칠 게 표현되면 바람을 피우는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고, 남보다 윗자리의 서열을 차지하려고 애쓰거나 남보다 이쁘게 보이려고 외모를 열심히 가꾸는
것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우수함을 나타내는 보다 순화된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잠재된 서열에 대한 본능은 생활 곳곳에 뿌리 깊이 내려있고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직장이나 군대 같은 강제 된 조직 사회는 그렇다 쳐도 가입 탈퇴가 자유로운 친목 단체에서도 서열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 동네 산악회를 가거나 헬스장 같은 곳에서도 모임이 있으면 나름의 강자들이
줄줄이 나와 축사를 하거나 격려사를 하고 지겹더라도 약자는 손뼉 열심히 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자신은 나름의 강자라고 생각하는 데 주최 측이 소홀히 대접하면 서두에 경찰 서장 같은 격한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이런 소속원의 반발을 잘 다스려야 조직이 발전하고 잡음도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돌아가는 단체로 해병 전우회를 꼽는 이들이 많다. 해병 전우회는 일단 제대를
하고 난 후 전우회에 가입할 때는 현역시절의 모든 서열을 접고 몇 기냐는 기준만 적용한다고 한다.
제대하고 나서까지 옛 상사에게 굽실거려야 한다면 아마 대부분이 그 조직을 외면할 것이다.
머리 좋고 구성원의 배경이 다른 검사나 판사는 사법연수원의 성적 등수가 서열의 기준이라고 한다.
기준이 명확하고 공평하면 소속원을 단결시키기가 쉽다. 입사할 때나 입대할 때는 내가 높았는데
퇴사할 때 혹은 제대할 때 다른 이가 높았다면, 둘은 나름 자기가 높다고 생각할 것이고 소속에서
받는 자신의 대접(서열)이 상대보다 못하다면 불만을 품게 돼 있는 게 세상사이다.
이래저래 강자 지향의 본능 때문에 기분 상하는 사람도 많은 게 현실이다.
모임에 참석해 보면 나름의 강자에게 꽃을 달아 주거나, 격려사나 축사의 기회를 주기도 한다.
기껏해야 천 원 내외의 꽃 한 송이 때문에 기분 상하는 사람이 있다면 딱한 일이다.
자신이 속한 種, 또는 家系에 우수한 씨를 퍼뜨려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게 하려는 본능이 남긴 서열
의식은 지금 세상에서는 필요하지도 않고 정신 건강상 도움 될 일도 없는데 끊어내기가 어렵다.
조직을 이끄는 지도자는 수백 만년 동안 쌓이고 쌓인 서열 의식을 이해하고 자존심 상하는 사람이
되도록 없도록 지혜를 짜내야 우수한 지도자이다. -공정한 기준은 불만을 잠재우기도 한다-
또, 각자의 처지에서 보면 강자라고 인정받아 봐야 의미 있는 보상도 없다.
장수의 비결은 맘 편히 사는 것이라 하지 않던가, 죽은 소크라테스보다 산 돼지가 낫다는 말은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 글쓴 이 본인의 생각입니다. 생각이 다르다 하여 비난의 대상은 아님을 이해 바랍니다.
김경렬
2019-02-15 02:57
개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이 생각 납니다.
우선은 살아 있는 자체가 더 좋다는뜻인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니 그럴 수 있겠지요.
올려주신 조직과 서열에 대한 방담에 공감을 하며 박수를 보냅니다.
항상 건강 하시고 행복 하시기 바랍니다.
박목철
사실 이런 글은 올리는 게 아닌데 이런 종류의 글을 쓰던 버릇이 남아서 버릇을 쉬이 고치지 못한답니다. 글을 쓰다보면 할 말을 다하지도 못하면서 입니다. 눈이 하얗게 덮힌 창 밖을 보니 겨울도 아쉽습니다. 남은 겨울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김경렬 작가님,
2/19 16:24
김상화
2019-02-16 12:17
계급에 대해 예리하게 파헤친 글 공감입니다
조직에서의 계급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른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출세를 하려고 안감힘을 쓰나 봅니다
존경하는 작가님
이전 봄인가 봅니다. 버들강아지가 솜털을 달고 올라왔습니다
그런가 하면 봄 내움을 싣은 바람이 불어와 향기도 줍니다
放談 잘 읽고 갑니다.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박목철
김상화 작가님께서는 각종 모임에 많이 참가하시지요? 작가님은 좋은 대접을 받으시니 다행입니다. 나이들어 무시당하면 정신 건강상 해롭답니다. ㅎㅎ 이제 겨울도 막바지 인듯 싶습니다. 못조록 건강하시고 멋진 산행기 많이 쓰시기 바랍니다. 출판 하실날을 기대 해 봅니다. 작가님,
2/19 16:27
김상훈
2019-02-19 03:18
예전에 [따이한 클럽]이라는 모임을 주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연령상 제가 월남 파병을 했던 것은 아니지만.
모여서 만날 술이나 마시고 밤무대(노래방)만 설 것이 아니라
그래도 대한민국 어느 한 구석엔 민간인들이
조국을 생각하자는 취지로 만든 모임이었습니다.
(뭐 결국은 술이나 마시고 밤무대만 주로 섰지만)
그때 정한 룰이 뭐였냐 하면
사회적 신분은 일단 다 개털이다.
여기서는 누구를 막론하고 한 살이라도 많으면
무조건 형님이다, 였습니다.
처음엔 좀 막히는 듯하더니 소통이 되고부터는
그것 이상 편한 방법이 없더군요.
누가 뭐라해도 인생 선배를 누를 수는 없다는 취지였지요.
대충 놔두면 사회적 신분을 내세워
나중엔 개족보가 될 판이어서 아예 싹을 잘라버렸지요.
문득, 갑질이라는 단어가 떠오르고
수컷의 본능대로 움직이는 아류들이 떠오르고
삼권 분립이 어쩌구저쩌구 떠들면서도
그 삼권을 뭉개버리는 요즘의 정치적 상황이 떠오릅니다.
잘 읽고 갑니다.
박목철
저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계시는군요, 어느 조직이던, 연장자 순이 가장 무난한 서열 방법이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제 원칙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살았습니다. 회사에서도 수위나 운전수 이런 분들과도 친하게 지냈습니다. 저보다 연장자이면 형 대접을 확실히 하곤 했답니다. 이런 기준이 확실치 않으면 서로 자신이 강자라고 행세하려 하더군요, 성의 있는 댓글 감사드립니다. 댓글 일일이 달기가 쉽지 않지요, 수필 방이 많이 발전할 것 같습니다. 행복한 날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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