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하루 종일 비가 내리더니 오늘은 무덥기만 한 일요일이다.

하지만 이제 올해의 장마가 시작되었다는 기상대의 발표가 있고 보니 앞으로 여러 날을 높은 습도와 동반한 불쾌지수와 인내의 겨루기를 하여야 한다.

예전보다는 장마기간이 길어진 탓도 있지만 장마는 동아시아지역 특유의 기상현상이라고 하는데, 예전같이 집중적으로 비가 내리기 보다는 우리나라 인근에 대기한 비구름들이 간헐적으로 많은 양의 비를 뿌리는 기간이 길어서인지 요 몇 년 전부터는 장마라는 단어 보다는 ‘우기(雨期)’라고 표현하기로 하였다는데, 아무래도 우기는 열대림이 밀집한 열대나 아열대지역에 더 어울리는 표현이고 우리나라에서는 그전대로 장마가 더 친숙한 단어라고 생각된다.

이제 이 지겨운 습도와의 전투가 끝나고 나면 우리나라 국민들은 너도 나도 승용차 트렁크에 물놀이 용품과 먹거리를 가득 싣고 산과 바다로 나가는 바캉스시즌이 돌아올 것이다.

내가 학교를 졸업하고 군을 제대한 후로는 매년 거의 모든 여름휴가를 빠뜨리지 않고 즐겼었는데, 그것도 통상 여름휴가일의 시작점에 누구보다 먼저 휴가를 떠나곤 하였었다.

사실 늦게 휴가를 계획하면 그 동안 어떤 예기치 못한 업무나 일상으로 인해 그 해 휴가를 가지도 못하고 여름을 보낼 수 있다는 우려도 있지만, 대개 휴가지인 해수욕장이나 계곡의 물가들이 휴가철 장사를 막 시작하는 시점이라 손님도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숙박시설 이용료나 물가가 저렴하기도 하고, 피서지 홍보를 위한 상술로 상인들이 친절히 손님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종 장마가 덜 끝나서 물에도 못 들어가고 숙박시설에서 토종닭 백숙이나 삼겹살에 소주를 마시고 하루 종일 늘어지게 낮잠만 잘 때도 있었으나 돌이켜 보면 남보다 이른 휴가는 실보다 득이 훨씬 많은 휴가였었다.

바캉스(vacance)는 그 외래어의 느낌만으로도 산과 강으로 가는 휴가 보다는 바닷가 해수욕장을 찾는 휴가라는 느낌이 강하다.

그래서 바캉스에 대한 정보를 검색해 보니

**그 유래는 라틴어 바카티오(vacation)인데,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워 지는 것”이란 뜻의 어원을 가진 프랑스어이며 근로자의 육체적 정신적 자질 향상을 위해 재충전의 기회로 삼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는걸 찾을 수 있었다.

유럽국가 중에서도 프랑스가 바캉스에는 더욱 적극적이어서 ‘프랑스사람들은 형편없는 요리를 영국요리라고 하고, 영국사람들은 제멋대로 노는 휴가를 프랑스휴가’라고 빗대어 말한다고 한다.

그런 이야기고 보면 프랑스인들의 바캉스에 대한 열정은 정말 대단한가 보다.

지금도 유럽의 바캉스는 대개 여름에 40여일 정도라서 아주 여유롭게 여름을 즐기는데, 유럽인들은 바캉스를 위해 일년 동안 돈을 모으고, 심지어 집에서 기르던 애완견이나 고양이도 바캉스를 떠날 땐 가차없이 버려두고 가서 프랑스 시내가 텅텅 비고 거리엔 주인 없는 개와 고양이가 어슬렁거린다고 한다.

1970년대 중반에 우리나라에 도입된 휴가는 아무래도 예전의 주말인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 1박 2일의 시간으로는 장거리인 바닷가를 찾기가 쉽지 않았으니, 바캉스는 바닷가 해수욕장을 찾는 것을 말하는 게 맞는 것 같다.

더군다나 자가용이 그리 흔하지 않던 90년대 이전에는 기간이 다소 긴 휴식기인 휴가에 평소 못 가봤던 바닷가를 더욱 찾았던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옛날부터 서구의 바캉스와 같은 절기가 있었으니 매년 장마가 끝날 때쯤인 음력 6월 15일 유두절(流頭節)이 그것인데, 유두절은 동류두목욕(東流頭沐浴)의 줄임 말로 유둣날에는 맑은 개울을 찾아가서 목욕을 하고 머리를 감으며 하루를 지내는데, 그래야 상서롭지 못한 것을 쫓고 더위를 먹지 않는다고 믿었다고 한다.

시기적으로도 양력으로 계산하면 7월 중순쯤 되니 우리나라의 대부분 관공서나 기업들의 여름휴가 기간은 이 유두절과 연관이 전혀 없지는 않았겠다.

그 전통은 신라시대에도 있었다 하는데, 동류(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가서 머리를 감는 것은 동방은 청(靑)이요, 양기가 가장 왕성한 곳이라 하니 그런 사유라면 대부분의 수도권 시민들이 동해로 피서를 떠나는 건 참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이치에 부합하는 휴가인 것 같다.

선비들도 이날에는 술과 고기를 장만하여 계곡이나 물가의 정자를 찾아가서 풍월을 읊으며 하루를 지내는 유두연(流頭宴)을 즐겼다고 한다.

올해도 어김없이 이 장마가 끝나면 나를 비롯해 대다수의 국민들은 어려운 현 경제형편에도 불구하고 바캉스를 떠날 텐데, ‘잘 놀 줄 아는 사람이 일도 잘한다’고 휴가를 그냥 먹고 노는 개념으로 보지 말고, 힘든 혹서기에 시원한 곳에서 가족들과 휴식을 취하고 체력을 충분히 보충하여 후반기 업무에 박차를 가하는 계기로 생각할 일이다.

또한 직원이 하루도 쉬지 않고 열심히 일에 열중한다면 물론 사용자는 그 직원이 믿음직스럽게 보일 테지만, 적시에 풀어주지 않아서 쌓인 스트레스로 일순간 병석에 눕는다면 본인의 생활도 그렇지만 사용자의 사랑도 금새 식어 버리고 원망만이 돌아 올 테니 멀리 보면 적당한 휴식은 근로자나 사용자에게 꼭 필요한 충전의 시간일 것이다.

작년에는 작은 아들이 군복무중이라 큰아들과 우리 부부가 회의를 거쳐 경비 지출계획과 여정을 상의하여 동해안쪽으로 결정하고 휴가를 떠났었다.

우리 나라 수도권 여름휴가의 최고 피크는 아무래도 서울의 동대문과 남대문시장이 단체 휴가로 휴점을 하는 매년 7월 말에서 8월초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 피크 때를 피해서 휴가를 가던 다른 이전의 해와는 달리 아들과 아내의 일정에 맞추다 보니 본의 아니게 한참 성수기인 8월초에 휴가를 즐겨야 하였으니 물가 중에서도 숙박비의 지출은 가장 큰 경비를 소요될 것이었다.

두 번째가 높은 유가 덕에 교통비를 꼽을 수 있어서 먹거리 쪽에서 최대한 절약하기로 하고 웬만한 음식은 동네의 할인마트에서 미리 준비 하기로 했다.

그렇게 계획을 잡다 보니 우리 가족 셋이서 일인당 10만여 원씩이면 조금 빡빡하지만 2박 3일의 휴가를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만 교통비는 절감할 수 없을 테니 변수는 얼마나 저렴한 숙박시설을 찾아서 이용하는 것이냐가 관건이었다.

그렇게 계획된 휴가는 첫날 새벽에 출발하여 설악산 품 안으로 찾아 들었다.

이곳에서의 숙박은 비싼 숙박비로 무리일 테니 일찌감치 간단한 요깃거리와 안주에 막걸리와 캔맥주를 배낭에 넣어 둘러메고 와선대, 비선대를 거쳐 금강굴까지 올라 갔다가 다시 주차장에 내려선 시각은 오후 4시경.

이제는 해가 떨어지기 전에 다음 목적지에 도착해서 숙박시설에 들어가야 했는데, 아무래도 날이 저물면 서두르게 되어 흥정도 없이 숙박비를 계산하여야 하므로 다소 불필요한 경비의 출혈도 있을 것이란 계산에서 발길을 서두르는 것이다.

차를 달려 동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동해시의 옥계 해수욕장에 당도하니 여름 햇살은 남은 기럭지가 아직도 길다.

이곳은 아이들이 어렸을 때 배낭을 메고 고속버스를 이용해 고생고생하며 찾아 왔었던 80년대 후반의 경험이 있어 동해안의 많은 해수욕장 중에서 덜 번잡하고 숙박비도 다소 저렴하리라 생각해서 계획을 하고 찾았던 곳인데, 우리의 기대를 져버리지 않고 깨끗한 민박의 방값이 성수기에도 불구하고 4만원을 넘지 않았다.

단지 샤워시설이나 화장실은 공용인 것이 흠인데, 이런 휴갓길에 저렴한 경비지출을 담보로 하는 약간의 불편은 참을 수 밖에는 없는 것이다.

또한 조금은 고생이 되어야 후에 추억으로 남는 휴가가 될 것이다.

이곳에서 여장을 풀고 준비해간 쌀과 부식으로 저녁을 해 먹고 술을 한잔하며 바닷가에서의 일박을 보냈다.

이곳에 온 목적은 해수욕을 위함이니 늦잠을 잘 수는 없었다.

일찍 일어나 아침을 먹고 설거지를 끝낸 후 바다로 나가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동해 특유의 코발트빛 바다에 들어가 물장구를 치고 있었다.

우리 가족은 수영을 그리 잘하는 편은 못되어서 그저 개구리 헤엄이나 자유형도 불과 20여 미터 밖에는 못 간다.

수영 실력도 그렇지만 사실 물속에서는 두어 시간이면 이미 지친다.

이제는 민박도 비워줘야 할 시간이 되어서 정리를 하고 다음 목적지로 출발을 한다.

설악산 등반과 해수욕을 즐겼으니 다음은 시원한 계곡에서 일박을 하는 것인데, 앞의 두 곳과는 달리 계곡은 미리 정한바 없이 그저 생각나는 대로 계곡을 찾아 즐기기로 하였다.

처음 찾아간 곳은 그 유명하다는 동해시의 무릉계곡인데 주변에 많은 석회석 광산이 산재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릉계곡의 물은 참으로 맑았다.

그렇게 아름답고 시원하다는 찬사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었으나 모두들 텐트를 치고 물가 이곳 저곳에 들어 박혀 있으면서 아이들이 계곡물에 들어가 물장난을 치고 있었으나 마땅한 숙박 시설이 주위에 띄지를 않아 우리가 하루 머물기는 무리가 있었다.(계곡 깊은 곳인 유료지역은 일부러 피했다.)

특히나 이곳은 나이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온 가족들이 즐기기에 적당한 곳이라 우리는 텐트도 준비하지 않았지만 아들도 이제 군을 전역하고 다 컸으니 텐트에서의 숙영은 우리 가족에게는 적합하지 않았다.

이곳을 떠나서 두타산 백봉령을 넘어 정선 쪽으로의 계곡들을 더듬으며 서울 쪽으로 지나 가는데, 계곡마다 웬 피서객이 그리도 많은지 차를 주차하기도 어렵고, 민박집들을 찾아서 가격을 물어 보니 외지간 한데는 이미 방도 없을 뿐더러 있다고 해도 허름한 방의 방값도 일박에 10만원을 육박한다.

이런 곳에서 숙박을 하면 경비가 오버될 테니 방이 있어도 곤란하였다.

강물을 따라 이곳 저곳 더듬다 보니 어느새 평창군으로 우리 차는 들어 서는데, 이곳도 방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휴양림 사무소에서 운영하는 숙박시설도 이미 인터넷 예매로 8월 중순까지는 빈 방이 없다고 한다.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일정을 여기서 끝내고 서울로 돌아 가기도 그렇고 시내의 모텔에서 숙박하기도 그렇고…….

그런데 내 눈이 번쩍 뜨이는 곳이 있었던 곳은 평창군 진부면에 위치한 수항리계곡 입구에서였다.

슈퍼와 몇 개의 식당이 자리한 인근에 노인회관 간판이 눈에 띄었는데, ‘숙박 가능’이라는 쪽지를 가슴에 달고 있는 것이다.

쪽지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했더니 길 건너의 식당할머니가 받는데 자신이 관리를 한다며 하루 숙박비로 3만원을 요구한다.

우리는 잠깐 둘러 보고 깨끗한 시설에 흔쾌히 숙박비를 지불하였다.

바로 20여 미터 아래로는 깨끗하고 수량이 풍부한 강이 흐르고 있는 참으로 좋은 여건의 숙박시설이었다.

더군다나 방에 들어가 보니 깨끗한 샤워실에 많은 식기와 조리기구들, 그리고 얼마간의 양념류들…….

이게 왠 횡재인가?

더군다나 덤으로 체력단련시설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으니.

이곳은 휴가 성수기인 이때쯤에는 노인 회원들이 사용을 자제하고 휴가객들을 유치해서 돈을 받고, 그 돈은 노인회 공동경비로 충당한다는 것이었다.

이제 우리 가족의 계획경비도 여유가 생겼다.

일단은 토종닭을 한 마리 사서 직접 삶아 저녁을 해결하고, 늦은 밤에는 남은 닭고기와 국물에 칼국수를 끓여 먹으니 올해 더위도 이미 저만치 물러간 듯 하였다.

예로부터 유두절에는 유두면을 즐겨 먹었다는데, ‘유두면은 햇밀로 만들어 닭고기 국물에 애호박을 채 썰어 넣고 끓여서 먹으면 더위에 달아 났던 입맛도 살아 나고, 더군다나 유두면을 먹으면 장수를 하고 더위도 먹지 않는다’고 하는데, 우리 가족은 이렇게 유두면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여름 휴가를 즐기고 있으니 더위는 몰라도 다들 장수하리라 믿어 본다.

더군다나 동류두목욕(東流頭沐浴)에 맞게 동쪽으로 흐르는 계곡물에 맘껏 물놀이를 하며 머리를 감았으니…….

경비가 남으니 다음날 점심으로 삼겹살을 맛있게 먹고 집으로 돌아 왔으니, 작년의 휴가는 저렴한 경비로 산과 바다와 계곡을 두루 즐기는 패키지바캉스가 되었던 것이다.

이제 올해도 이 장마가 사그라들 기미가 보일 때쯤에는 아이들과 함께 올해의 바캉스에 대한 계획을 토의하여 정하고 준비를 하여야겠다.

사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내 계획에 다른 의사표시 없이 무조건 따라 왔었는데, 자식들이 다 장성한 후에는 아이들의 의견에 힘이 많이 실린다.

어쨌건 올해의 바캉스도 프랑스사람들이나 유럽사람들만큼은 아니더라도 저렴한 경비로 바다와 산과 계곡을 다 아우르는 멋진 일정이 되었으면 좋겠다.

사람이 일만 하고 살 수는 없지 않는가?

이렇게 기다리고 계획하며 즐기는 바캉스는 현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활력소가 되는 몇 중에 하나일 것이다.

올해도 특히 해수욕장은 꼭 들려서 지난 4월 해병대를 전역한 작은 아들과 함께 우리식구 넷이서 수영실력도 견주어 봐야 하겠다.

2009년 6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