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낭을 메고 오르는 9월 중순의 관악산에는

이미 갔어야 할 더위가 등산로 길목 길목에 버티고 앉아

어김없이 내 등 짝에 땀방울을 송송 맺혀준다.

삼막사로 올라 가는 산길에는 휴일을 맞아 많은 사람들이

계곡을 따라 혹은 산등성이를 따라 발길을 옮기고 있다.

그래도 맹추(초가을)인지라 발걸음이 한가롭다.

국기봉으로 갈라지는 등성이쯤에 다다르니

여러 남녀 등산객들이 허리를 꾸부정하게 구부리고

나뭇가지로 바닥을 헤치며 무언가를 줍고 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내 예상대로 땅에 떨어진 도토리를 줍고 있다.

비단 도토리 줍기는 이곳뿐만 아니고

여기까지 올라 오는 산길 주변에서 자주 보이던 광경인데

유독 이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등산 목적이

도토리 수확을 위한 것처럼 줍기에 여념이 없다.

문득 서울대 앞의 등산로 입구 한 가운데 자리를 넓게 펼쳐 놓고

무심코 도토리를 주워 내려온 등산객들에게

산짐승의 겨울 먹이인 도토리를 놓고 가라고 권유하는 문구와

제법 많은 양의 도토리가 널브러져 있던 모습이 상기 되고

또 한 켠에는

‘도토리나 밤을 불법 채취하면 벌금 5만원’

이라고 적혀있던 현수막이 생각이 났다.

그래서 나는 도토리를 줍고 있던 중년의 등산객에게

“도토리를 주워가면 벌금이 5만원 이래요.”

하며 서울대 앞의 등산로 입구에서 봤던 것을 이야기 해줬다.

그러나 그 등산객은 대수롭지 않게

“올해는 도토리가 너무 많이 열려서

좀 주워가도 다람쥐가 겨울을 나는데 아무 지장 없어요.”

하며 도토리 줍는 손길을 멈추지 않는다.

가만 생각해 보니 그 말도 일리가 있다.

올해는 어쩐 일인지 도토리가 많이도 열렸다.

관악산의 곳곳에서 등산화에 채이는 게 도토리다.

여기 저기에 열리고

스스로 바닥으로 떨어진 도토리가 너무 많으면

그렇지 않아도 자연보호로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 다람쥐들이

이제는 먹이를 물어 나르고 비축하는데 게으르게 되어

닭둘기처럼 흉물스럽게 변할 수도 있으니

인간이 얼마간 주워 가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다람쥐들의 천적이라야

관악산 인근마을에서 올라와 사는 살찐 고양이들이나

얼마나 되는지 모르지만 족제비 부엉이 정도가 될 것이니

지천에 널려 있는 도토리와 밤을 힘들이지 않고 포식할 수 있다면

올해는 노숙자 다람쥐가 많이 생길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 먹이 사슬이 무너지지 않도록

약간 모자란 식량이 오히려 다람쥐들이 긴장을 풀지 않게 하고

자연스럽게 생태계를 유지하게 될 것도 같다.

올해는 예년에 없이 도토리뿐만 아니라

가을 과실들도 풍성하게 많이 열렸다.

들판의 나락들도 너무도 많이 달린 쌀알들의 무게로

고개를 활처럼 늘어 뜨리고 힘겹게 버티며

농부의 빠른 추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예년 같으면 이미 몇 번의 태풍이 이 나라를 훑고 지나 가며

많은 결실들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쳤을 테지만

올해는 작은 바람도 이 나라를 피해서 조신하게 지나갔다.

덕분에 산과 들에는

풍성한 결실이 다투어 올망 졸망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하긴

한 나무에 열매가 많이 열리면 대신에 당도나 양분 함량이

다소 떨어 진다고 하지만, 서민들은 그나마 싼 가격으로

과일을 즐길 수 있고 농민들도 다 수확으로 기쁨을 누릴 수 있겠다.

우리가 흔히 묵을 만들어 먹는 도토리는

갈참나무, 졸참나무, 물참나무, 떡갈나무, 상수리나무열매의 총칭이며

갈참, 졸참, 떡갈나무등은 꽃이 핀 그 해에 열매가 성숙하지만

상수리와 굴참나무는 꽃이 핀 다음해에 열매가 성숙하여 떨어진다.

또한

졸참나무의 도토리는 떫은 맛이 없어 날것으로도 먹을 수 있으나

갈참나무나 그 밖의 것들은 타닌 성분을 많이 함유하고 있어

물에 담가 떫은 맛을 우려낸 다음 녹말을 채취하여

묵을 만들어 먹으며, 때론 장난감이나 장식품을 만들거나

껍데기가 두꺼운 것으로는 염주를 만든다고 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도토리 키 재기’란 속담이 있는데

북한에는

‘도토리는 벌방을 내려다 보면서 열린다.’ 라는 속담이 있다고 한다.

이것은 도토리가 산에서 벌(들판)을 내려다 보며 열리는데

‘풍년이면 잘 안 열리고 흉년이면 많이 열린다’는 비유라고 한다.

(간 혹은 올해처럼 농사가 잘 될 때에도 많이 열리기도 한단다.)

그래서 옛 문헌에는

이 도토리는 구황식품으로 흉년에 쌀과 보리를 대체하는

보조식품으로 기록되어 있다.

도토리의 어원은 처음 ‘도태밤’에서 ‘도토밤’이나 ‘도톨왐’으로

그것은 다시 끝 음이 탈락되어 ‘도톨이’로,

그리고 지금의 ‘도토리’로 변천되고 있는데 16세기의 문헌에서는

도토리를 ‘도밤’이라고 적고 있다.

이것은 ‘돝+애+밤’이 합성된 단어로

‘돝’은 돼지를 뜻하며, 이것은 도토리는 돼지가 먹던 밤,

즉 산에서 멧돼지가 즐겨 먹는 나무 열매라는 뜻이며

결국 조선시대에도 흉년일 때는 인간이 살기 위해

대체 음식으로 먹었지만 풍년에는 돼지에게 주었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20여 년 전 가을에는

내가 살던 동네사람들이 너도 나도 밤과 도토리를 따러

서울근교의 가깝고 먼 산으로 자루를 들고 다녔었는데

그렇게 주워온 도토리는 잘 말려서 빻아 가루로 보관했다가

필요 할 때에 묵을 쑤어 먹었다.

나의 어머님도 아버지와 함께 도토리를 주워

마당에 잘 말려서 가루로 보관했다가

찬바람이 찡찡대고 춥다며 방안에 들여 보내 달라고

창문을 두드리며 투정하는 겨울 밤에

윤기 자르르 흐르는 도토리묵 한 사발을 적당히 썰어

양념 간장과 함께 내어 오시면, 식구들은 동치미 국물과 함께

고소한 도토리묵을 먹으며 긴긴 겨울 밤을 얼마간 줄일 수 있었다.

그 시절에는 동네 사람들과 함께

나의 부모님도 도토리를 따러 다니셔서

가까운 인근의 산에는 더 이상 주울 도토리가 없었다.

그래서 하루는 미리 직장에 휴가를 신청하고

내 승용차로 부모님을 모시고 도토리를 따러 갔었는데

지금도 잊어버리지 않는 그곳은 분당 아파트단지의 뒤쪽 도로로

경기도 광주를 가는 길 중간쯤이니

아마도 경기도 광주시의 오포지구를 거의 다 가서인가 보다.

그곳에는 내 기억으로 근처에 성남시 공동묘지가 있었고

우리는 도토리 나무가 많은 인근 야산을 목표로 올라 갔는데

거기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왔다간 흔적이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그런걸 이미 예상하셨다는 듯

가져온 자루에서 손잡이가 짧은 쇠뭉치 해머를 꺼내셔서

도토리나무 둥치를 두어 방 치신다.

그러면 참나무는 한차례 파르르 몸부림치며 떨고

밑에는 ‘투두둑’하고 도토리가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린다.

어머니와 나는 정신 없이 떨어진 도토리를 주워 담았다.

그렇게 두드리고 담다가 각자의 자루가 제법 묵직해질 때쯤에

개울물이 졸졸졸 흐르는 양지바른 곳에 둘러 앉아

준비해온 도시락을 먹으며 땀을 식혔다.

주위를 둘러 보니 가을은 높고 푸른 하늘의 기운을 머금고

도토리묵빛으로 참으로 곱게도 물들고 있었다.

오후에도 두어 시간 도토리를 줍고 집으로 돌아 오는 길에는

그 동안 못했던 부모와 자식간의 대화로 승용차안은

수확한 도토리만큼 여유롭고 풍성했다.

그런데 자연을 훼손한 것에 대한 신의 체벌인가?

판교에서 안양으로 넘어 오던 왕복 2차선 좁은 길에서

뒷좌석의 어머님과 집안 이야기에 몰두하다가

교통신호 대기 중이던 승합차 뒤꽁무니를 그만 냅다 박아버렸다.

결국 출고 한지 보름 됐다는 승합차의 뒷문을 통째로 갈아 주고

내 차는 연식이 꽤 되었으나 기동에는 무리가 없었지만

수리 하느니 다시 구입하는 게 낫다는 정비소의 권유에

결국 폐차를 해 버리고 말았다.

무리하게 겨울밤 도토리를 준비 하다가

과다한 손실을 보게 되었으니 내 마음도 서운하고 황당했지만

뒷좌석에 타고 계시던 부모님은 놀라기 보다는

자식이 측은해 보이기도 하고 도토리 따러 같이 가자고 한걸

미안해하며 많이도 후회하셨다.

그 후로 다시는 억지로 도토리를 따거나 줍지를 않았는데

그 해에 동네의 노인 한 분은

밤을 따러 나무에 올라 갔다가 떨어져 사망한 사고가 났었으니

나의 자동차 사고는 그만도 다행이고, 두 번의 우를 범하지 말라고

내 두개골 한쪽에 자연의 경고를 굵게 각인 시켜준 것이리라.

도토리 나무인 참나무는

우리 나라에서는 숯의 재료로 쓰이며 여러 가지 먹거리를

맛있게 조리하는 재료인 장작으로 우리들 삶을 돕고 있다.

유럽에서는 술통을 만들거나 졸참나무에서 코르크를 채취하여

여러 가지 용도의 코르크 제품을 만든다고 한다.

효능을 살펴 보니

도토리음식은 소화가 잘되며 설사를 그치게 하고

뼈를 튼튼하게 하며 다이어트에도 좋다고 한다.

또한 몸 안에 쌓이는 중금속 제거에도 좋지만

너무 많이 먹으면 타닌 성분 때문에 변비가 생길 수 있으며

빈혈에도 좋지 않다고 한다.

특히나 토종꿀에 담구어 먹으면 좋은 약이 된다고 한다.

요즈음 뉴스에서는

중국산 유제품 식품이 우리 사회의 이슈로 시끄러운데

신장질환을 유발하는 멜라닌 다량 함유 과자들 보다는

우리의 먹거리인 도토리가 더욱 생각나는 이번 가을이다.

도토리로 만든 대표적인 음식은

우리에게 너무 친숙하게 다가서는 도토리묵인데

여느 등산로 밑에서나 파전과 함께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냥 숭덩숭덩 썰어서 양념장에 찍어 먹거나

빛깔도 곱게 잘 쑤어진 도토리묵을 적당히 잘라서

쑥갓이나 상추 오이를 썰어 넣고 양념장에 버무린 도토리묵은

남녀노소 모두가 싫어하지 않는 주전부리이며

막걸리와 잘 어울리는 우리나라 향토 먹거리다.

그 외에도

가루로 국수를 만들어 동치미 국물에 말아 먹는 ‘도토리국수’,

도토리냉면에 산채를 넣어 먹는 충북 단양지역의 향토음식인

‘산채도토리냉면’, 그리고 도토리가루를 곡식에 섞어 지어 먹는다는

북한음식 ‘도토리밥’등 여러 가지가 있다고 한다.

이제 나는

저들이 다람쥐의 밥이 남아서 도토리를 줍던

5만원 벌금이 무서워 도토리 줍기를 포기하던 개의치 않고

그저 먹고 살기 위해 생계형으로 도토리를 줍는 사람들이

수확한 도토리로 만든 묵을 그저 즐기면 될 뿐이다.

그 옛날 겨울밤에 어머님이 만들어 주시던 도토리묵 맛과

부모님과 함께 도토리를 따러 갔다 승합차를 들이 받았던

그 추억을 도토리묵과 함께 입 속에 넣고 오물거리다가

참기름 양념장이 스며든 묵이 목 울대를 슬그머니 넘어가는

그 맛으로 입가에 배시시 행복한 미소를 띄울 것이다.

도토리묵과 잘 어우러지는 막걸리 한 사발과 함께…….

2008년 9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