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아침을 먹고 나서는 관악산 산행길이

어느새 여름 더위는 한풀 꺾이고

간간이 시원한 바람을 한줄기 뿌려준다.

아침에 열린 올림픽 마라톤경기 중계를 시청하고

집을 나선 사람들이 많아서 인지 시내버스는 빈 좌석은커녕

등산객의 배낭에 어깨가 닿아 다소 거북스럽다.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베이징 올림픽도

이 마라톤을 끝으로 모든 일정을 갈무리하고

이제 오늘 저녁 폐회식을 남겨 두고 있다.

하긴 세계에서 유독 마라톤경기를 안하고 시청도 꺼리는

단 하나의 국가도 존재 하고 있다고 한다.

몇 일전 큰아들이 우리 부부에게 퀴즈를 냈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마라톤을 싫어하고

체육 종목에도 없는 나라가 하나 있는데

그 나라가 어딘지 아세요?”

정답을 알리 없는 우리 부부에게

아들은 정답과 부연 설명을 해준다.

“중동의 이란인데요. 마라톤이 생기게 된 계기가

아테네가 마라톤평야에서 페르시아와 치른 전쟁에서의

승전보를 전하던 것이 계기가 되었으니 옛 페르시아의 후손인

이란이 마라톤경기를 싫어하는 건 당연한 일이죠.”

한다.

30여분이 걸려서 내려선 서울대 앞쪽의 관악산 등산로 입구는

많은 등산복 차림의 시민들로 숲 그늘을 채운다.

종종 아내와 같이 오르던 관악산 등산길이

친구와 나선 지리산 종주와 지방 출장등

여러 가지 이유로 모처럼의 산행이 되어 버렸다.

정오가 다 되어 가는 시간이지만

그저 3,4시간의 산행이면 그만인지라

발걸음을 재촉할 필요도 없는데

오랜만의 산행이라 그런지 아내의 발걸음이 더디다.

조금 올라가다 보면 뒤쳐진 아내를 기다리느라

등에서 땀이 날 새가 없다.

아내는 손사레 치며 먼저 올라가라 하지만

이 넓고 높은 관악산에 내 인연이라고는 그대와 나 뿐인데

어찌 서로 떨어져 산을 오를 수 있으랴.

산모퉁이 약수터에서 물을 받아 아내에게 먼저 마시라 건네주니

달게 마신 아내는 물이 시원하진 않다고 한다.

나도 바가지에 물을 받아 마셔보니 시원한 맛이 없다.

아마 기온은 꺾이어 가을로 가지만 여름내 덥혀졌던 지하수는

아직도 제 체온을 못 찾았는가 보다.

삼막사로 향하는 등산로를 어느 정도 오르니

산길엔 사람이 뜸하고, 엊그제 내린 비로 수량이 많아진

계곡의 물가에 사람들이 올망졸망 모여 앉아

꼬리만 남은 여름을 즐기고 있다.

삼막사 근처의 자주 쉬던 뜨락암반에 자리를 펴고

다가오는 이번 가을의 멋진 산행을 설계하며

손수 요리해서 준비한 닭 발에 아내와 나는

캔맥주와 막걸리 한 병을 마신다.

산객들은 여기저기 자리를 깔고 앉아 준비해온 음식과 음료수로

산밑에서 묻은 찌꺼기를 닦아낸다.

산 위에서는 인심도 후하다.

처음 보는 이웃에게 주저 없이 음식과 술을 나눠준다.

아마도 산밑 보다는 산 위가 하나님의 눈과 가까우니

굳이 선한 척 마음을 베푸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도 옆의 팀들에게 말 한마디 잘해서

먹음직한 찐 옥수수 한 개를 얻어 먹었다.

술도 음식도 하나님의 은총도 배불리 먹었으니 이제는 하산이다.

지천명인 내 인생도 등산으로 비유하면

얼마나 내려 왔는지 모르지만 분명 하산 길일 것이다.

하산 코스는 안양 유원지 쪽이다.

그건 안양의 중앙시장 포장마차의 허파볶음이

소주를 대동하고 나를 유혹하고 있어서 일 것이다.

신라시대 원효, 의상, 윤필이 암자를 짓고 수도를 하였다는

삼막사를 뒤에 두고 산길을 내려 온다.

그러고 보면 원효, 의상등 옛 고승들은

이 나라 도처에 흔적을 묻혀 놓았다.

달 초에 가 보았던 설악산 금강굴에도 그 흔적이 있었는데

근대에 놓여진 철계단도 없이 어떻게 절벽 중간에 있는

험한 굴에 까지 오를 수 있었을까 생각하니

그 스님들은 등산에도 대단한 실력자가 아닌가 억측해본다.

내려서는 등산로에는 곤줄박이의 울음이 조심스럽다.

한 시간여를 내려오니 산허리를 점거한 음식점에서

고기 굽는 냄새와 음주를 즐기며 떠드는

산객들의 웃음소리가 계곡의 물소리를 밀어 내고

주변의 숲 속에 가득 찬다.

계곡의 물소리 따라 걸어 내려 오다

다소 한적한 물가에 앉아 아내와 나는

등산화와 양말을 벗고 시원한 계곡물에 발을 담근다.

오늘 달팽이처럼 느린 산행이었지만

이 무거운 육신을 떠받치고 내 마음과 눈을

선한 자연으로 다듬게 해준 발에 대한 보답인 것이다.

살며시 아내의 발을 끌어 당겨 닦아주니

아내는 간지럽다면서도 거부를 안 한다.

커다란 내 손에 비해 아내의 발은 애처롭게 야위어 보인다.

남은 산길을 이리저리 맴돌듯이 내려오니

맑은 물이 넘치는 유원지의 넓고 깨끗한 개울에는

아이들이 가는 여름이 아쉬운 듯 물놀이에 여념이 없고,

길 따라 나래비선 상혼은 여름 더위 대신에

화덕의 열기를 포장도로 안으로 들어 앉힌다.

중앙시장을 가기 위해 마을버스 종점에 당도하니

많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서성이며 떠날 줄을 모른다.

이곳은 등산용품 파는 점포가 두엇 들어선 곳으로

후배의 가게도 하나 있는데 그 가게 앞에서는

휴일마다 그럴듯한 솜씨로 한 남자가 섹스폰 연주를 한다.

처음에는 후배의 가게인지 모르고 섹스폰 연주를 즐기다가

우연히 장사하는 그 후배를 만나서 커피를 마시며 들어보니

섹스폰 연주자는 그의 동생이고, 마케팅의 효과를 위해

휴일마다 와서 섹스폰을 분다고 한다.

참 멋진 인생이라고 생각하여지곤 하였었는데

혼자서만 연주 하는 게 아니라 여벌의 악기를 준비해 있다가

가끔 산객중에 실력 있는 연주자가 원하면

이중주를 하기도 한다.

그런데 오늘은 섹스폰 연주는 다른 휴일과 마찬가지인데

관람 산객이 여느 날보다 훨씬 많다.

사람들 사이로 들여다 보니 섹스폰 음악에 맞춰

한 쌍의 중년 남녀가 사교춤을 아름답게 추고 있다.

많은 관객은 무료의 공연에 즐거워하고

춤 꾼들은 관객의 눈길을 흠뻑 즐기고 있다.

한 곡이 끝나니 다른 곡에 맞추어 다른 한 쌍의 중년 남녀가

멋들어지게 춤을 춘다.

어림 짐작해 보아도 내 나이보다는 네댓 살 어려 보이는 이들은

아마도 동호인 이거나 부부일 것이다.

그러니 이런 백주 대낮에 많은 눈길을 관객 삼아

거리 공연을 하는 것이겠지.

좋게 말해 스포츠댄스라는 이 사교춤은 어두운 곳에 들어가면

한없이 손가락질 받지만 요즘은 밝은 무대로 나와

많은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제는 국내외 경연 대회나

영화로도 자주 소개되는 예술 장르인 것이다.

춤의 종류도 다양하다.

‘사교댄스’는 원시적인 구애의 춤이나

사교적인 춤에서 발달한 것이고,

‘댄스스포츠’는 스포츠요소가 가미된 사교댄스라고 한다.

또한 ‘댄스스포츠’라는 용어를 찾아 보니

1924년 영국황실무도교사협회가 왈츠(Waltz), 탱고(Tango),

퀵스텝(Quickstep), 폭스트롯(Fox-trot), 빈왈츠(Viennese waltz)등

5개 종목을 정리하여 ‘모던볼룸댄스’로 발표한 것이고,

그 후 50여 년 뒤인 1974년에 룸바(Rhumba), 차차차(Cha Cha Cha),

삼바(Samba), 파소도블레(Paso doble), 자이브(Jive)를

라틴아메리카 댄스 5종목으로 발표 하였다고 한다.

나는 잘 몰라도 첫 번째 중년들이 춘 춤은

‘지르박’일 것이고 두 번째는 분명 ‘탱고’일 것이다.

아니면 ‘왈츠’ 이거나…….

4분의 4박자의 경쾌하고 템포가 빠른 춤인 ‘지르박’은

‘지터벅(Jitter bug)이라고도 하는데, 1930년대

미국의 한 댄스홀에서 이 춤을 ‘신경질적인 벌레(Jittering bug)’

라고 부른 데서 유래하였으며,

우리 나라에는 8.15 광복 후에 보급 되었다고 한다.

모두들 행복한 얼굴에 흥겨운 몸짓으로 뭇 사람들의

시선을 희롱하고 있으니 섹스폰 연주자의 호흡도 힘차다.

아내의 손을 잡고 버스를 기다리며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부러움을 느낀다.

내가 잘 살아온 인생인가?

아니! 내가 잘 살아가고 있는가?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하고 싶은 많은걸 해봤고

이제는 내 나이 오십 줄에 들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즐기던 붕어 낚시에

가끔 출조하는 서해안 우럭 낚시, 늦게 사 시작한 아내와의 산행,

비록 잘 하지는 못하고 관전을 즐기는 스포츠,

가끔씩 가는 잠실 야구장, 담배는 못하나 술은 좋아서 즐기는

행복한 저녁시간, 그리고 좋아하는 글쓰기…….

하지만 오늘은 내 가진 것 모두가 시원치 않아 보이고

저들의 춤이 무척 부러워진다.

하늘은 내게 단 일년의 시간이라도 허락해서 춤을 배우고

저들처럼 거리에서 자신 있게 몸짓을 뽐낼 수 있을까?

아마 혼자서 춤을 배운다고 하면 아내는 결재를 안 할 터이니

같이 한번 배워 보자고 너스레를 떨어 볼까?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남은 내 생의 하루하루는 너무도 소중한 것 같다.

하늘이 얼마간의 시간을 나에게 배려해 줄지는 몰라도

남은 내 시간을 아껴서 잘 써야 될 것 같다.

하지만 내일이 되면 또 다시 나태한 일상으로 돌아 가겠지.

그렇더라도 이 순간만큼은 마음속으로 다짐을 해 본다.

‘살아 있는 그 날까지 배우고 해보고 싶은 건 다해보리라.’

오늘은 후배의 등산용품점도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마을버스가 도착 하였다.

많은 등산객들과 몸 비비며 버스에 올라

안양의 중앙 시장으로 향한다.

어느새 좀 전의 부러움은 차창 밖으로 흘려 보내고

나는 김이 모락모락 나고 청양고추를 가미해서

얼큰할 허파볶음과 소주 한잔의 행복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

2008년 8월 24일 저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