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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ple01_next.gif임정수 수필소설작가 문학서재

ㆍ작성자 임정수
ㆍ작성일 2012-01-11 12:24
ㆍIP: 58.xxx.46
금정산 미륵불에서
금정산 미륵불에서 / 임정수

 


새벽 기도를 끝내고 잠시 눈을 감고 앉아 있다가 그만 깜빡 잠이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8시가 넘어 버렸다.
새벽 기도가 끝나면 늘 꾸벅꾸벅 졸기 십상이다.
춘곤증이 몰려오는 것도 아닌데 더운 날씨 탓에 요즘은 자주 이러고 산다.

어쩌면 금정산 도량의 신중님들이 벌건 눈을 뜨고서
두고 보자며 잔뜩 벼르고 있을런 지도 모르겠다.

용왕당에서 찬물로 세수를 하고 미륵불 뒤쪽으로 한 바퀴 휘휘 돌아보니
상쾌한 기운을 머금은 맑은 자연이 내 마음을 설레게 한다.

늘상 가까운 곳에서 함께 하는 벗들이지만
언제나 이렇게 다른 모습, 다른 감정으로 다가올 수 있는지
새삼 자연의 아름다움에 놀랄 뿐이다.

오늘따라 더욱 따사롭고 다정스럽게 쏟아져오는 햇볕의 알갱이들이
친근감 있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바쁠 것도 없이 햇살의 알맹이를 주워 담으며 시간을 보내노라니
왠지 모를 아쉬움이 남는다.

바로 옆에선 세상 근심을 모두 내려놓고 자기만의 방식대로 피어오르는
산초나무가 무척이나 여유로워 보인다.

그러고 보니 세상 무엇에도 방해를 받지 않고 이렇게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으니
참으로 행복하고 소중한 때다.

고개를 들어 쌍계봉 정상을 바라보니 온 몸으로 불어오는 바람과
조화로운 산신님의 따뜻한 품을 느낄 수 있다.

산이 감싸주는 포근한 느낌...
대 자연이 가져다주는 이 속에서 내 마음의 때가 서서히 벗겨짐을 느껴본다.



지금 이 순간,
속세에 찌든 ‘나’는 없고 대 자연 속의 일부가 되어서
내면 깊숙이 들어앉은 ‘나’를 비우는 텅 빈 껍데기 하나만 덩그러니 있다.

그렇다.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직 이 순간만 있을 뿐이다.

생각의 저편에서 오래 전에 산산 조각난 파편 같은 기억들을 애써 끄집어내어
짜 맞추려 하지 않아도 지금 이 자리는 변함이 없다.

현실로 돌아온 지금의 ‘나’만이 이 자리에 여여하게 있을 뿐이다.

이따금 산 모기들 때문에 그리 오래 앉아 있지도 못하지만
이런 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래도 피 보시 밖에 없다고 생각하면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물려서 벅벅 긁으면서도 기분이 나쁜진 않다.
이 또한 인연이라고 받아들이면 그만이지 싶다.

세상 그 어떤 존재라도 아무런 이유 없이
내 앞에 불쑥 나오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가져본다.

그런 마음을 품게 되면 조금이나마 여유가 생겨난다.

모든 게 존재의 이유가 있는 것이고,
인연법에 의해서 이렇게 만났으니
이 모기 또한 이유가 있어 나를 물고 있는 것이라 믿는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내가 굳이 알 바가 아니지만...

이렇게 대 자연과 하나가 될 수 있음에 감사하며 천천히 발걸음을 내딛는다.
걸음걸음에 이 마음을 다해 자신을 비추어 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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