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창작문학예술인협의회/대한문인협회-수필

ㆍ작성자	김복희
ㆍ작성일	2020-12-26 0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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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재교육

세상에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것이 이처럼 자랑스러울 줄 예전에 미처 몰랐다. 어려서 지지리도 가난하고 부모님들 일손 돕는 것이 죽기보다 싫을 때도 있었는데 나이 먹고 보니 그보다 더 큰 유산이 없는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제 사야 내가 철이 들었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시골 농촌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두 분 모두 학교라고는 문턱도 가보지 않은 분들로 열심히 농사일하시면서 사신 분들이다. 1950년대 한국전쟁이 끝나고 전쟁의 후유증도 있었겠지만 발전하지 못한 우리나라 농촌의 생활은 너나 할 것 없이 비참하였다. 1950년대 우리나라 국민 1인당 GNP가 80불대 수준이었으니 얼마나 비참한 생활을 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하긴 3만 불 시대에 사는 요즘 사람들이 생각하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생활을 했던 것이 내 어린 시절 우리나라 풍경이었다.

지난날을 되돌아보면 초등학교 3~4학년 때부터 부모님 일손을 도와주고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꼴머슴과 지게를 짊어진 것이다. 농번기 때는 동생을 등에 업고 남의 집 일을 하러 가신 어머니를 찾아 이 골짝 저 골짝 논밭으로 찾아다니는 것은 늘 있는 일이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에 다닐 때 농번기 어느 날인가는 동생을 데리고 학교에 같이 가서 하루 동안 생활한 적도 있다. 그런 학교생활도 고등학교에 다니다 흉년으로 학교를 더 다니지 못하고 집에서 농사일하는 농부로 변하기도 했었다.

이때 내가 해본 일은 농촌에서 하는 일은 거의 다 해 봤다. 모내기는 당연하고 논이나 밭 김매기, 벼나 보리 및 밀 베기, 각종 농산물 타작은 물론 소독도 도맡아서 했다. 그중에서 가장 하기 싫었던 일은 보리타작 같다. 보리 알 끝에 붙은 부푸러기가 땀에 젖은 옷에 붙으면 왜 그리 껄끄러웠든지 생각만 하면 지금도 몸이 군실거린다. 이런 나에게도 배우지 못한 농사일이 하나가 있다. 그것은 밭을 가는 쟁기질이다. 쟁기는 딱 한 번 잡아 봤는데 아버님이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단 2m도 갈기 전에 쟁기질을 못 하게 하셨다. 그리고 절대로 쟁기를 잡지 못하게 했다. 일 중에서 가장 어렵다는 장군까지는 지고 다녔는데 왜 쟁기질은 못 하게 했는지 알 수가 없다. 하긴 장군을 지었다고 하여 오물 장군을 진 것은 아니고 물장군만 지고 다녔다. 오물 장군은 아버지가 지신 것이다.

이처럼 일을 하던 나는 책을 좋아하여 힘들고 바쁜 일손에서도 친구들이나 헌책방에서 책을 구하다 읽고 있었다. 그 영향인지 어느 날부터 학교에 다시 가겠다는 생각으로 부모님을 졸라 2년 동안 일하고 고등학교를 다시 들어가게 되어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학 생활도 하게 된 것이다. 그때 내 결심은 '내가 괭이나 낮을 잡으면 사람이 아니다'라고 결심했으며 농사짓고 사는 우리 집이 창피하게 느껴지기도 했었다.

그랬던 내가 오늘날은 농부 아들로 태어난 것을 자랑스럽게 느끼게 된 것은 나이 70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그동안 공직생활을 하면서 남에게 욕먹지 않는 삶을 살겠다고 발버둥 치며 살다 정년이 되어 집안에 들어 안게 되자 또 다른 사회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많은 선배로부터 퇴직 후의 생활에 관해서 이야기를 들어왔고 퇴직하기 직전 퇴직 후 생활을 위하여 교육도 받아 보았지만 손수 체험해 보기 전에는 알 수 없었다.

누구나 직장에서 퇴직하고 나면 시원하면서도 섭섭함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시원함은 공직에서 맡고 있던 책임감에서 벗어났다는 기분일 것이고 섭섭함은 그동안 누려왔던 것을 내려놓는 것에서 오는 허탈감이 아니겠는가? 퇴직 후 처음 몇 달은 식구로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는다. 그동안 고생했으니 이제는 다리 쭉 펴고 쉬면서 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인생살이 그리 쉽던가? 얼마 가지 못해 갈등은 또 쌓이기 마련이다. 지금까지 서로 다른 생활을 해 왔던 부부다 보니 같이 붙어있기도 쉽지가 않다. 사사건건 서로 잔소리한다고 부닥치게 되고 밖에 나가보니 생소하기만 하다. 같은 생활을 했던 옛 동료를 만나는 것도 한두 번이지 맨 날 만나면 또 하나의 쳇바퀴가 되니 점점 몸은 늙어 가는데 거기에 맞는 나만의 세계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퇴직하고 나서 제일 부러운 사람이 자영업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퇴직이 없이 자기 힘 있는 데까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닌가? 그 사람들은 노년의 새로운 사회에 특별히 준비할 필요성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인생 70이며 거의 다 사라 젖는데 지금은 인간의 수명이 늘어나다 보니 새로운 고민거리를 만들어 준 모양이다.

이런 고민거리를 해결하려는 방법으로 내가 선택한 것이 '밭 가꾸기'라는 취미 생활이다. 모든 사람이 퇴직 후 각자 자기 나름대로 계획을 세워 생활한다. 젊어서 열심히 산 보람으로 먹고, 입고, 자는 것은 별로 걱정이 없으니 그 만만 해도 부러운 건 없지만 어찌 사람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을까? 머릿속이 행복하려면 일거리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시작한 것이 밭 가꾸기였다. 젊어서 괭이자루를 잡으면 성을 바꾼다고 했는데 성을 바꿀지언정 잡아야겠다. 이렇게 해서 시작한 것이 농사였다. 농업경영 등록 체에 농업인 등록도 하고 명함의 직업란에 농업경영인이라고 기재하고 다니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사는 나를 보고 주변 사람들은 신기하게 생각하는 모양이다. 친구들도 지금 뭐 하냐고 물어오면
"밭에 나가서 놀아" 하면 이상하게 생각한다.
"어떻게 농사를 지어"
"풀을 어떻게 매"하며 농사짓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 같이 말한다. 그 사람들이 생각할 때는 내가 그동안 중·고등학교에서 교장을 하다 퇴직한 사람이니 무슨 농사를 지을 줄 알겠느냐는 식이다. 그러나 나는 농사일에는 자신이 있다. 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한 것도 있지만 어려서 부모님들에게 어깨 너머로 배운 잠재적 교육과정이 몸에 밴 모양이다. 내가 생각해도 신기하게 농사를 잘 진다. 풀을 이겨내고 가뭄을 방지하기 위하여 비닐을 사용하는데 다른 사람들과 같이하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비법으로 사용하여 농작물에 가뭄이 타지 않도록 한다. 풀을 매는데도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고 풀이 크기 전 싹이 트면 서양 괭이로 곡식에 붙을 주면서 긁어 버리니 풀이 살을 수가 없다. 이런 농법으로 심심풀이 1~2백 평이 아니라 1,000여 평이 넘는 밭을 관리하니 신기도 할 것이다.

요즘은 이처럼 농사를 짓는 나를 부러워하는 친구들이 쾌 많이 나타났다. 그 친구들을 보면 대부분 어려서 가정이 나름대로 부유하여 농사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친구들이거나 부모님이 농업에 종사하지 않고 다른 직업에 종사했던 친구들이다. 늙어서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하다. 내가 씨앗을 뿌리고 가꾼 작물들이 싹이 트고 자라서 열매 맺는 것을 보면 신기도 하고 자랑스럽다. 그리고 내가 먹고 싶은 작물이나 몸에 좋다고 하는 작물이 있으면 거의 다 자급자족하고 하고 있으며 그러다 여분의 생산물이 있으면 이웃에 나눠 주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는 판매도 하는데 이제는 제법 그럴듯한 농부로 변한 것이다.

이와 같은 내 생활은 누구에게 얽매여 있는 것이 아니라 자영업이기 때문에 다른 볼일이 있으면 얼마든지 볼 수 있으며 몸이 힘들면 쉬었다 하고, 여행을 가고 싶으면 얼마든지 다니면서 하는 자유 직업인 된 것이다. 거기에다 일을 잘못한다고 해서 나무랄 사람도 없고 다른 사람과 이해관계도 없으며 정년도 없으니 힘이 있는 동안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수시로 가족여행도 하고 산행도 즐기며 산다. 이런 나를 많은 친구들이 무척 부러워한다. 이런 노년의 내 생활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준 것은 내가 농부의 아들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농부였던 부모님들이 이렇게 고마울 줄은 예전에는 미처 몰랐었다.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