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창작문학예술인협의회/대한문인협회-수필

ㆍ작성자	김숙자
ㆍ작성일	2013-12-31 10:40

ㆍIP: 183.xxx.46

특별한 因緣

특별한 因緣

연희동 김 숙자

조선왕조시대 때부터 궁궐에서 불공드리러 자주 왔다는 보광사, 흥국사, 선린사 부근이라 그런지 통일로 주변엔 작은 암자가 자주 눈에 뜨인다. 암자 주변의 양쪽 길가엔 길게 줄지어 달린 아름다운 연꽃 등이 가로수와 어울려 한들거린다, '부처님 오신 날'이 가까이 옴을 느끼는 5월 초의 풍경이다.

큰 연꽃 모양의 갖가지 색깔의 造花의 등엔 크게 쓴 불자들의 이름들이 적혀있다. 저 연등 속엔 불자들의 어떤 발원들이 담겨 있을까? 난 부처님께 무엇을 부탁할까? 혼자 피식 웃는다. 난. 불교 신자가 아니지만, 스님과 절이(특히 토굴 암) 항상 마음 한 편에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사찰을 지나칠 때나 TV에서 불교행사가 있을 때는 가슴속에 담아온 20여 년 전의 한 여자 어린이와 老스님을 떠 올리곤 한다.

3월에는 언제나 희망차고 설레지만 을씨년스럽기도 하다. 4년마다 학교이동도 있고 새 학년의 업무분담과 담임 학년의 배정 및 어린이들과 동료교사들의 새로운 만남도 3월에 이루어진다. 학교이동은 교사들의 가슴을 늘 설레게 하지만 불평과 불만도 뒤따른다.
발령받은 임지는 교사들이 간절히 희망하는 학교가 될 수도 있지만, 그 학교만은 가고 싶지 않은 학교일 수도 있다. 거주지역에서 통근하기 어렵거나 교육적, 환경이 좋지 않아 4년 동안 힘든 근무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1991년 3월 난 주변에서 A급이란 역사가 깊고 큰 서울 ㄱ 초등학교(75학급)에서 C급의 서울 ㅅ 초등학교로 이동되었다. C급 학교의 근무기간은 3년이다. 수업이 끝나고 방과 후면 모두 허허벌판의 창밖을 내다본다. 정리되지 않은 빈 공터에 작은 집들이 어수선해 보인다.

2학년 2반 교실은 1층 양지바른 두 번째의 교실이다. 54명의 작은 눈망울들이 초롱초롱 반짝인다. 부스스한 머리와 희끗희끗한 마른버짐이 얼굴에 번진 아이들도 눈에 뜨인다. 키순으로 자리를 정해주고 이름과 얼굴을 기억해둔다. 앞니가 영구치로 갈아 위와 아랫니 4개가 뾰족이 자리 잡아가는 아이들이 눈에 뜨인다. 한층 귀엽고 의젓해 보인다. 뒤와 옆을 휘저으며 참견하는 ㅎ련은 위 영구치 2개가 유난히 넓적하며 벌어졌다. 얼굴도 가름하며 피부도 맑고 깨끗하고 옷차림은 아주 단정하다.
준비물도 잘 챙겨오고, 숙제, 일기 등 가정학습도 아주 잘해온다. 집에서 부모가 지극정성으로 관심을 두고 보살피는 어린이 같았다.

어느 날 '가족들이 집에서 하는 일'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수업시간이었다.
"주인공을 가운데에 아주 크게 그려요. 그리고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가, 주변 인물과 배경을 자세히 그리세요. 주인공은 물론 나지요."
ㅎ련은 밀짚모자를 쓴 회색 옷을 입은 노스님이 마당을 쓸고 있는 모습을 크게 그렸다.
그리곤 '말괄량이 삐삐'의 머리처럼 추어 올려 맨 양 갈래 머리를 한 자신을 한쪽에 아주 작게 그려놓았다.
바탕색은 흰색과 연두색을 혼합한 탁한 색을 칠하였으니 쓸쓸하기 그지없다.
"ㅎ련아!, 엄마가 무슨 일을 하고 계시지?"
"노스님이 마당을 쓸고 있어요."
"아빠는 어디 계시니?"
"인도에 가셨어요,"

나는 새 학년 초에 아이들의 학습능력이나 생활습관, 집단생활의 적응사항을 내가 파악할 때까지 어지간해선 생활기록부를 들춰보지 않는다. 전년도에서 평가된 어린이의 학교생활이 그대로 각인되어 그 아이의 다른 가능성을 찾지 못할까 봐서다.

아이들을 모두 하교시키고 생활기록부를 들쳐보았다. 夫의 난은 사선이 그어져있고, 母의 난은 1934년생에 최효실. 아무리 나이를 계산해보아도 손녀 관계의 차이다. 이번 담임반 아이들 구성원은 ㅎ.련이 외에 결손가정의 어린이가 여섯 명이나 된다. 전임학교는 고학력자의 부모가 절반이 넘고, 저학년에서 결손가정의 어린이는 거의 없다. '박석고개'라는 언덕 하나 사이로 가정의 환경이 이렇게 차이가 난다.

변덕스러운 초봄 날씨인데도 남쪽 창가에 놓인 내 책상 주변은 따뜻하다. 어린이들 하교지도가 끝나면 종종 책상에 엎드려 잠시 쉬기도 한다. 세 아이 학교 뒷바라지에 피곤이 얼굴에 찌들어 보는 사람까지 피곤해진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고3인 큰 아들과 나는 하루가 48시간이라도 부족한 듯 몸과 마음이 아주 바쁜 때이다. 두 팔을 접어 엎드리는 순간 교실 문이 스르르 열렸다. 자그마한 체구에 대추 알처럼 가름하고 곱상한 얼굴에 차양이 큰 밀짚모자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얼굴에는 怒氣가 풍긴다.
"어떻게 오셨어요?"
"ㅎ련이 때문에 왔어요."
약간의 경상도 억양이 냉정해 보인다. 표정엔 교사에 대한 불만이 역력하다. 스님을 학부형으로 모셔서 면담하기는 처음이다. ㅎ련이가 오늘 미술 시간에 나와 대화한 것을 스님께 말씀드린 것 같다.
"선생님, ㅎ련은 2월 초에 서울교동초등학교에서 이 학교로 전입했어요. 그때도 교감 선생님이 아이 신상에 관심을 보여서 아주 불쾌했습니다."
'아차!, 실수를 하였구나?' 얼른 편한 자리를 권하며
"스님, 죄송합니다."
나는 ㅎ련이가 오늘 그린 그림을 보여드리며 학교생활, 교우관계, 학습능력, 생활습관 등 그동안 관찰한 모든 자료를 제시하며 말문을 열었다.
노스님은 서서히 마음을 열며 자신이 전직 간호사였고, 27세에 입산하였으며, 대구 00사의 주지승이 되었다고 과거까지 이야기 하신다. ㅎ련이가 5세 때 아이 교육을 위해 모든 것을 정리하고 서울로 이사와서 '토굴 암' 이란 암자를 짓고 둘이서 살고 있다고 한다.

"ㅎ련의 부모도 배운 사람들이에요. 대학교 1학년의 철부지들이 아이를 낳고 부모의 연을 끊었어요. 어디엔가 그 아이 부모가 생존해 있어요. 지금 인도에 유학 보낸 여승과 둘이서 산중에서 키웠지요. 핏덩이를 하루하루 사람으로 성장시키는 행복감을 부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걸음마를 할 때는 산중에서 십리 길의 민가로 나와서 피아노 교습도 시켰어요."
이 아이를 위해 두 여승이 온 정성을 다 쏟은 것 같았다. 구파발에서 안국동 서울 교동초등학교에 입학시켜 일 년 동안을 데리고 다닌 것만 봐도 얼마나 열성적인가를 알 것 같다,

수업이 끝난 후 어린이들을 하교지도를 하기위해서 교문 앞까지 가면 노스님은 오토바이를 타고 와서 꼭 기다리신다. '토굴 암'에서 학교까지 거리가 멀기는 하지만 그 동네에 사는 어린이들도 다 혼자 다닌다. 등교와 하교를 노스님은 오토바이를 태워서 보내고 또, 데려간다. 신체단련을 위해 태권도장도 보내신다. 노스님의 일상은 오르지 ㅎ련이의 교육 뒷바라지가 전부다. 그 당시 16비트의 컴퓨터를 사놓고 특별과외교육을 했다. 피아노 교습도 시키고, 과외공부 교사를 암자로 불러서 지도받게 하셨다. 교육열이 대단한 젊은 엄마들과의 교류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노스님은 ㅎ련의 교육에 관한 열성은 일반 엄마들과 다른 바 없다. 스님의 뜻에 맞지 않고, 비교육적이라고 생각되는 학부모들이 있으면 이들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으신다. 방과 후엔 학교에도 자주 들러 많은 이야기를 하시며 학부형으로서 교사와의 관계를 돈독하게 유지하였다.

학년 초 3월 말쯤엔 학부형 총회가 있다. 담임교사는 어린이들을 일 년 동안 지도할 여러 가지 안건과 참고 사항을 학부형과 의논한다. 나는 여러 가지 중점 지도계획 중 특히, 독서지도에 관한 필요성과 가정에서 협조사항을 당부하였다. 노스님은 나누어준 권장도서와 필독도서 목록을 소중히 간직하셨다. 또, 교사의 독서지도 계획을 이해하며 가정에서 부모의 역할을 실천하려는 의지가 엿보였다.

"잘한다. 어른이 어린아이와 공기놀이나 하고,"
철부지 ㅎ련의 이런 비아냥을 들으면서까지 가정에서 독서생활을 위해 혼신을 기울이셨다.
공기놀이를 하여 지는 사람이 책을 읽기로 해 그 많은 책을 스님도 읽으시며 ㅎ련에게 다 읽혔다고 하신다. 물론 대화를 나누며 독해력 평가도 하고 줄거리를 요약하는 말하기 훈련도 시켰다고 하신다.

"줄거리요약은 등장인물들이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하였나? 로 간추리도록 도와주세요.
이어서 등장인물들이 한 일과 성격 등에서 느낀 점과 내 생각을 쓰면 독후감이 됩니다.“
부모가 독서에 관심만 있으면 가정에서도 저학년의 일기 쓰기와 독후감 쓰기 지도는 아주 쉽게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학부형회의 때 강조한 말이다.

은평뉴타운의 개발로 일대가 뒤집어지고 산골짜기 샛길이 대로로 변했다. ㅎ련은 S 여대에 입학하고 소식이 뜸해졌다. 그동안 난 학교를 세 번이나 옮겼다. 아이도 둘이나 결혼하고 연희동으로 이사도 하였다.

2004년도에 연신중학교 바로 뒤쪽 신설된 서울 연광초등학교로 발령을 받았다. 자가운전으로 매일 그 중학교 앞을 오간다. 요일별로 차량운행의 날 나는 도보로 퇴근하던 중 연신중학교 정문 앞에서 그 노스님을 만난 것이다.
" 아이고 선생님!'
" 아이고 노스님!.

은평 뉴타운의 입주를 기다리며 이곳에 조그마한 주택을 구해서 이사하셨단다. 대문 앞에는 '토굴 암' 이란 현판이 눈길을 끌었다. 거실에는 큰 부처의 상이 모셔져있고, 매일매일 염불하시는 스님의 수도생활은 예나 다름없이 계속 이어진듯하다.
"ㅎ련은요?"
"인도에 갔어요."

'어디부터 말씀을 해야 할지.......,' 노스님은 고개를 설레 설레 흔드신다. 스님도 많이 늙으셨고, 그 때부터 키우던 두 마리 개도 많이 늙었다. 두 마리 개는 여전히 한 마리는 소파 위에서 한 마리는 작은 이불 위에서 뒹굴고 있다.
"저 개들은 살아 있는 생물이라 죽을 때까지 같이 데리고 있어야 해요."
사람이나 짐승이나 늙으면 힘이 없고 추하게 보인다.
"선생님, 나는 ㅎ련과 연을 끊고 싶어요."

난 내 귀를 의심하였다. 서울 ㅅ 초등학교 2학년 때의 노스님을 기억해본다. ㅎ련의 교육과 장래의 삶을 위에 쏟는 정성은 부처님을 섬기는 것과 똑같다고 생각하신 분이다. 당신의 삶을 바치겠다는 말씀도 하셨다. 그 이상으로 실천하신 분이다.
그동안 키우며 힘들었던 일들을 풀어 놓으신다. 사춘기의 고비와 대학교에 입학하기까지의 뒷바라지에 지친 일은 그래도 행복하였다고 하신다. 스님 몰래 사채업자에게 돈을 빌려 쓰고 시달림 받는 ㅎ련의 빚을 몇십 배의 이자와 원금을 갚아준 일. 인터넷으로 물건을 주문하여 산더미처럼 싸놓아 마음 상하는 일, 남자친구 사귄 일, 도저히 스님으로서는 이해가 안 되어 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인도로 유학을 보냈다는 것이다.

"노스님, 뉴타운 보상으로 아파트 말고 얼마 받을 수 있어? "
"보상금에 관심을 갖는 ㅎ련이가 너무나 어이가 없어요. 유학 끝내고 돌아오면
결혼자금과 최소한의 보상으로 연을 끊으려고 합니다."
너무나 속상하여 하신 말씀일 것이다.

일상으로 돌아왔다. 출퇴근하며 가끔 노스님께 들린다. 동네 어린이들 대여섯 명을 모아놓고 서예를 지도하고 계신다. ㅎ련은 여전히 인도에 가 있단다.
"학비나 생활비가 싸서 큰 부담은 없지만,"
노스님의 말씀 속엔 타국에서 고생하는 ㅎ련에 대한 안쓰러움이 깔렸다.

2008년도 8월 서울 연광초등학교를 퇴임한 후 한동안 그 동네를 가지 않았다. 지난해 5월 말 그 부근에 볼일이 있어 노스님댁 앞을 지나는데 대문 앞 '토굴 암'의 현판이 보이지 않는다.
'은평뉴타운의 아파트로 입주하신 건가? ‘
주차가 불편하여 애를 쓰다가 옆집 문 앞에 차를 주차하고 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한참 있다가 한 스님이 나오신다. 노스님보다도 훨씬 젊은 스님이다. 얼굴이 칙칙하고 몹시 여위었다. 키는 껑충하고
마른 체격에 경계하는 모습이다.
'아-아 인도에서 공부한다던 스님이구나'
"노스님을 뵈러 왔는데요."
"노스님은 돌아가셨어요."
어이가 없다. 그렇게 정정하시던 분이, 옆집에선 차를 빼라고 난리다.
"언제 돌아가셨어요? ㅎ련이는 지금 어디에 있어요?"
스님은 대문 앞에 머쓱하게 서서 나를 몹시 경계하신다. 오랫동안 더운 나라에서 살아 그런지 피부가 까무잡잡하다. 표정엔 슬픔도 안타까움도 전혀 없다.
노스님은 췌장암으로 3월에 돌아가셨고, ㅎ련은 여전히 인도에 가 있다고 한다. 가슴이 아려온다. 옆집에선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이 험한 얼굴로 차를 빼라고 아우성이다.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난 자꾸 눈물을 훔친다. 하나, 둘, 인연이 자꾸 끊어진다. 새로운 인연을 만들기도 어렵고 그다지 만들고 싶지도 않지만, 간직해온 소중한 인연이 끊어진다는 것은 너무나 가슴 아프고, 슬픈 일이다. 당신의 과거를 모두 털어놓고, 힘들고 어려운 현실을 탓하며 내게 의지하시던 노스님! 아니 어쩌면 내가 노스님께 정신적으로 더 의지하였던 듯싶다. 내가 천주교 신자라는 것을 아신 노스님은 한 번도 불교에 귀의하라는 권고도 하지 않으셨다. 오직 ㅎ련의 교육에 관해 모두 터놓고 의논하는 하소연의 대상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어느새 소중한 인연들이 하나둘 소멸하는 외로운 고지에 점차 다가가고 있다는 것이 한없이 슬퍼진다. 그리고 눈물이 많아진다. ㅎ련의 앞날이 왜 이렇게 걱정이 될까? 그저 평범한 생활인이 되어 행복한 가정을 꾸렸으면 얼마나 좋을까? 슬픔과 걱정과 ㅎ련의 앞날에 대한 바람을 크게 외쳐본다.

'자비로우신 부처님! 중생들을 굽어살펴 주세요. 특히 불쌍한 ㅎ련과 노스님을 보듬어 주세요.'
'부처님 오신 날'을 생각하며 불자는 아니지만, 부처님께 간곡히 發願한다.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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