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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금주 김락호


purple01_next.gif이인철 수필 소설 문학서재

ㆍ작성자 이인철
ㆍ작성일 2014-01-05 11:37
ㆍIP: 124.xxx.149
슈킹 (109회)

“수혜 씨, 강 실장입니다. 서류를 돌려 드리려고요. 남의 중요한 서류를

오래 갖고 있으면 실례지요. 마침 그쪽을 지나갈 일이 생겨서요.“

그녀는 당장 사용할 일이 없다며 천천히 갖다 주어도 괜찮다는 걸 그가

부득불 우겨 약속시간을 잡았다.

 사무실 문을 나서는 그의 발걸음이 활기차고 평소보다 보폭이 넓었다.

밖을 나오니 하늘은 잿빛 구름이 깔려 있어 곧 눈이 올 것만 같았다.

 그가 10층 스카이라운지에 들어섰을 때 그녀는 어두운 표정으로 미동도

않은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가까이 다가가자 그때서야 고개를

돌려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녀는 코트 안에 목까지 올라오는 흰색의 폴라 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세련되어 보였다. 몸에 착 달라붙은 청바지가 마치 찢어질

듯 팽팽했다.

 “여기 서류 있습니다. 열 번을 확인해 보십시오. 그대로일 겁니다.”

 그는 이 어색한 분위기를 전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수혜 씨, 저번에 약속한 것처럼 제가 재미있는 이야기 3가지를 더 하면

이제 9천9백9십4번 남은 것을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는 준비해 온 이야기 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이야기 중간에 감정과 흥을

돋아가며 최대한 액션까지 동원하였다. 마지막 이야기에 가서는 처음의

침울했던 그녀가 배를 움켜쥐고 탁자 앞으로 고꾸라질 정도였다. 그녀의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

 “수혜 씨, 저는 지금 하는 일을 올해까지만 하고 그만둘 겁니다. 그러고

보니 이제 며칠도 안 남았네요. 내년부터는 제 전공인 건축설계를 다시 하려고

합니다.“

 “그거 정말 잘되었네요. 축하드려요.”

 그녀의 미소 띤 표정과 기뻐하는 음성으로 보아 진심인 것 같았다.

 그는 사실대로 모든 것을 속 시원히 털어놓을 수 없는 것이 몹시

안타까왔다. 언제부턴지 눈이 조금씩 내리더니 본격적으로 차장에 눈송이가

부딪히기 시작했다.

 “어, 눈이 오네요!”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똑같이 말했다. 동시에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멋쩍어 미소를 지었다.

 현우는 그녀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거기에는 물기어린 촉촉한 눈동자가

있었다.

 “수혜 씨, 저 하나 물어볼 게 있는데 절대 기분 나쁘게 생각지 않길 바래요.

저번에 수혜 씨가 말한 개인사정이란 것을 제가 좀 알면 안 될까요?“

 그녀의 눈치를 보며 현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의 얼굴에 슬픈 기색이 비치는가 싶더니 금방 두 눈에 눈물이 글썽였다.

그녀의 감정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현우가 무겁게 입을 열였다.

 “죄송합니다. 단지 저는 수혜 씨와 좀 더 친해지고 싶어서 물어본 것인데

상처가 되었다면 정말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실장님께서 저를 생각해서 하시는 말씀인 것을 알아요.”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드릴게요. 실장님은 제가 왜 대출을 받으려 하는 걸 아시지요. 엊그제

부동산에서 왔었어요. 상담할 때 말씀드렸던 피아노 교습소가 딸린 집을 빨리

계약을 안 하면 무작정 기다릴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 가게를 다른 사람도

보고 갔는데 관심을 갖는다는 거지요. 제가 대출 나올 때까지만 기다려 달라고

했거든요. 다행히 부동산 아저씨가 저의 형편을 이해해 주셔서 지금까지 많이

기다려 주셨거든요.“

 그녀는 눈물을 삼키고 나서 말없이 눈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한동안

그렇게 있던 그녀가 다시 입을 떼었다.

 “제가 그 가게를 꼭 얻어야 하는 사정이 있어요. 엄마가 당뇨 합병증으로

신장 투석을 받거든요. 이틀에 한 번씩 병원에 가서 서너 시간을 투석해야

해요. 그런데 제가 학원에서 근무하다 보니 엄마를 모시고 병원에 가기가

너무 힘들어요. 학원 눈치도 봐야 하거든요. 여럿 선생님 중 저만 편리를

봐주는 것도 원장님께 한계가 있거든요. 그 가게를 얻으면 제가 시간을

조정하니까 엄마를 모시고 병원 가는 데 아무 문제가 없는데...“

 그녀의 눈에 다시 눈물이 번졌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지금 그녀에게 무슨 말로 위로해 주어야 한다는 말인가! 말끝을 맺지

못하는 그녀를 보는 그의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침착해지려고

애썼다.

 비로소 그는 궁금한 것이 풀렸다. 현우의 안타까운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

머물렀지만 속으로는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집 모퉁이를 돌아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애처롭게 바라보며 그가 중얼거렸다.

 “그녀의 처한 상황이 어쩌면 나에게는 좋은 기회일지도 몰라.”

 그는 가로수 밑둥을 힘 있게 발로 걷어찼다. 나뭇가지에 쌓여 있던 눈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그녀는 이제 현우가 보호해야 할 절대적인 존재로

부각되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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