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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ple01_next.gif이인철 수필 소설 문학서재

ㆍ작성자 이인철
ㆍ작성일 2013-12-29 08:07
ㆍIP: 124.xxx.149
슈킹 (105회)

 그는 내키지 않았지만 대출 방법 등을 설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꿈과

희망을 실망과 좌절로 안겨줄지도 모른다는 순간적인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절뚝거리면서도 오히려 노인을 부축해 나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고는 그는

곧 후회했다.

 "이곳마저 문을 닫는다면 하루종일 열심히 땀 흘리는 장애인들과 보다 더 나은

내일을 꿈꾸며 일하는 그들에게 더 이상 희망은 없습니다"라는 노인의 마지막

말이 귓전에 울렸다.

 귓가에 내린 서리와 쭈굴한 노인의 얼굴이 큰바위 얼굴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현수 형, 사무실 방문할 손님 더 있어요?"

 노인과 장애인 사내가 통장을 주고 사무실을 나간 후 동인이 물었다. 현우가

없다고 고개를 젓자 그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그때 노크소리가 났다.

 소파에서 신문을 보던 동수가 발딱 일어나 문을 열었다. 사무실에 들어선 사내는

낡은 밤색 세무 잠바를 입고 훌쭉한 키의 중년남자였다. 나이는 얼른 분간하기

어려웠지만 대략 50전후로 보였다.

 맞은편에 앉은 현우와 눈을 마주친 사내가 경계의 눈빛으로 그를 바라다보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 시선을 피했다. 사내가 주민증과

운전면허증, 등본, 인감을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떼었다.

 "정말 이 일을 하면 1억 주시는 거 맞습니까?"

 초췌한 외모처럼 그는 잔뜩 긴장되어 물었다.

 "예, 틀림없이 약속합니다."

 "아까 찻집에서 명의를 빌려주고 돈만 찾아오면 1억을 주신다 했지요. 그런데

무슨 일인지는 모르나 너무나 큰 금액이라 사실은 지금도 믿기지가 않아서

그럽니다. 제가 할 일을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십시요."

 이 사내는 동인이 조금 전에 커피숍에서 만나고 왔던 사람으로 아마 한양금융

작업에 이용할 바지인 것 같았다.

 사내는 겉보기와는 달리 조리 있고 또박또박한 말투였다. 날카로운 콧날과

번쩍이는 안광이 그의 총명함을 말해 주고 있었다.

 "저, 혹시 전과 있습니까?"

 "10여 년 전에 음주운전으로 면허취소가 되어 벌금을 낸 것 외에는 없습니다."

 "그러면 됐습니다. 그런데 커피숍에서 돈이 급하여 어떤 일이라도 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하셨는데 그 사정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때부터 십여 분 동안 사내의 고단한 인생역정이 펼쳐졌다.

 "저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철공서를 운영했습니다. 철공서는 그럭저럭 되어 밥은

먹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근처에 사는 가까운 친척도 저와 같은 계통의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척의 간곡한 부탁으로 보증을 선 것이 돌이킬 수 없는

화근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은행 보증을 섰고 다음에는 납품대금이 곧 나온다기에 사채보증까지

섰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도박으로 은행 빚은 물론이거니와 사채까지 끌어들여

모두 탕진한 후였습니다.

 살던 집과 공장은 은행과 사채업자에게 경매로 넘어갔고 지금은 처와 애들 셋과

지하 월세방에서 살고 있습니다. 저에게 피해를 준 그 친척은 어디선가 노숙자로

지내고 있다는 이야기만 들었습니다. 사람을 너무 믿은 부족한 저 자신을 탓해야지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그는 현실 자체를 숙명으로 받아들인 것 같은 달관의 빛이 서려 있었다. 그의 눈치를

보며 동인이 조심스럽게 입을 떼었다.

 "만일 이 일이 위험하다고 해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리야 없겠지만 최악에는

감옥도 갈지 모릅니다."

 느닷없는 그의 말에 사내가 멈칫했다. 그의 얼굴에 순간 혼란이 일더니 안색이

창백하게 굳어졌다. 사내는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는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입술을 질근 씹고 난 후 결심한 듯 말했다.

 "거기까지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제 딸이 대학생인데 다음 학기 등록금이

없을 뿐더러 졸업할 때까지도 걱정입니다. 또 둘째는 고 3 수험생으로 올해 대학에

입학해야 하는데 마찬가지로 입학금도 준비가 안 된 상태입니다. 그나마 막내는

중학생이어서 아직까지는 첫째 둘째에 비해 다행입니다. 집안 형편을 잘 아는

큰 딸이 '남은 2년만 마치면 졸업하게 되니 그 후로는 동생들을 자기가 책임지고

공부를 시키겠다'고 합니다. 능력없고 초라한 부모가 이 자식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는 담배에 불을 붙이더니 긴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아까 찻집에서 수고비로 1억을 말씀하셨을 때 무슨 일인지는 모르나 위험한

일이라고 직감했습니다. 그리고 교도소까지도 갈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며칠 만에 1억을 벌 수 있겠습니까?"

 여기까지 말한 사내는 담배 연기를 뱉으며 낮게 신음을 토했다. 몇 번의 신음소리가

이어지더니 그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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