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창작문학예술인협의회/대한문인협회-수필

ㆍ작성자	조근수
ㆍ작성일	2022-06-24 11:19

ㆍIP: 115.xxx.183

군서록

1978 자월도

노랑, 빨강, 주홍, 보랏빛의 코스모스들이 부대 정문을 멋있게 펼쳐 주는 가을이 깊었다. 난, 이날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78년도 환한 이 코스모스의 웃음을, 하지만 그 웃음이 기억 나지 않는 건 기억을 되새기기가 싫은 것이다. 또한 지금의 내가 기억을 펼치기 싫어하는 건 아직도 정곡을 찾지 못한 우울한 나날속의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73년 여름이 시작 될 즈음, 나는 고등학교 학창 시절의 스마트함을 간직한 채 철조망 속으로 들어와 버렸다. 누구의 손 인사 하나 없이, 누구의 따뜻한 격려 한마디 듣지 못 한 채, 아쉬워하는 이 하나 없는 입대, 하지만 그땐 그것이 쓸쓸한 입대임을 느끼지 못했다. 오직 새로운 세계로 홀로 들어가는, 지금껏 있던 세상에서 갑자기 제외된 기분에 겁이 났고 처음 가보는 진해 여행길이 두려웠다.

73년 7월 29일 진해 통제부 앞.
입대하는 날부터 더위가 시작되었다. 두 달의 훈련소 생활은 꽤 힘들었지만, 누구나 그러했듯 시간의 흐름, 날짜의 흐름을 느끼지 못했다. 하루하루를 오직 훈련, 배고픔, 잠의 부족 속에 지냈으니 그것이 잊게 한 것이리라. 8주 훈련 후 해난구조대(SSU) 6주, 대구 국군군의학교 6주, 이곳에서 난 누구나 간직하고 있을 첫사랑의 첫 글을 받아 보았고 열심히 군생활에 임해 수료 때에는 사령관의 표창장도 받았다.

73년 12월, 해병 제2여단 최전방 파견 위생 하후생.
불공정하고 부당한 보직발령의 처사를 겪으며 김포 여단으로 부임 명령을 받았지만 잘하면 본전, 못하면 기압인 군대가 난 싫었다. 처음엔 아무것도 모르는 백지상태에서 때리면 맞고 시키면 했다. 하급자들에게 전방 철책과 맞붙어 있는 컴컴한 분초 벙커 속에서 돌팔이 소리 들으며 몰매도 맞았다. 한 달, 두 달 시간이 지나 갈수록 맞는 게 싫었고 악이 자라나 때리면 같이 치고 같이 붙었다 그러고 나면 밤에는 몰매. 그렇지만 분명 울지는 않았다. 다만 자신이 밉고 가족이 미워질 뿐. 그래서 주고받던 친구들의 편지도 끊었고, 가족도 잊으리라 생각했었다.
이런 불만족스러운 생활 속에서 기차 바퀴가 박달나무로 되어 있다고 하면 “예!” 하고 대답했던 복종심이 사라지고 대신 반항심이 자라고 있었다. 환경의 지배를 받고 생활 한다는 건 무척 힘든 거였다. 술을 마셔야 했고 술집을 드나드는 생활이 이어졌다. 자의가 아닌 타의에도 어울려야 했으며 글자 그대로 때리고 마시고 조졌던 5분대기 생활 두 달 동안은 워커를 신고 자야만 했다. 고막이 터지고 허리에 통증이 왔다. 하지만 그런 건 생각을 깊게 할 필요가 없는 작은 일일 뿐이었다. 군대는 모순 덩어리, 모순단체, 인간의 이마에 계급장을 표시하고 차이를 두는 인간 불평등의 조직이었다.

일 년 동안의 사격장 생활은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돌팔이의 호칭이 군의관님으로 바뀌었고 병들은 물론 하사, 중 상사들도 피교육자는 나의 손아귀에서 놀았다. 사격장 돌팔이 새끼 더러워서 사격훈련 못 가겠다는 소문이 여단에 나돌 정도로 그들을 괴롭히며 끌고 다녔다. 겁 없는 행동이었다. 그동안의 초임하사 생활에서 그들에게 당했던 복수심 같은 것이 작용 했던 것 같다.
사격장에서의 한 사건이 기억난다. 왼주먹 한방에 건방진 조교 한 녀석이 쓰러졌다. 의무중대 시설 미비로 옮긴 서울 통합병원에서의 X-ray 촬영 결과 우측 하악 골절로 진단 8주가 나왔다. 아찔했던 그 날. 너무나 큰 파도가 밀어 닥친 거다. 환자 치료보다 나 자신의 신변에 이상이 있을까 봐 최선을 다했고 부대원들의 협조로 매일 서울을 오가며 간호를 해야 했다.

76년 10월, 사격장 생활을 끝으로 여단에서 보직이동 명령으로 간 곳은 연평도 앞, 작은 무인도 당섬(해군심리전 공작대)이었다. 만조 때면 목을 꼭 조이는 듯이 섬 머리까지 물이 찼었고, 간조 때면 모세의 지팡이처럼 대연평도와 이어지는 길이 생기는 바닷길과 거대한 바윗덩어리들이 기억난다. 또한 무인도라 지루한 생활이었지만 군인이 아니고는 해 볼 수 없는 오류동 공군첩보대의 와일드한 교육도 기억에 남는다.
하인천의 명산집 아가씨들, 문화촌의 술집들이 복장이 이상하고 시커먼 우리들을 보고 문들을 꼭 닫던 생각이 입가에 웃음을 머금게 한다. 심리전공작대 생활이 끝날 때까지도 사회 진출이란 어려운 이야기는 내 머릿속에서 겨울잠을 자고 있었고 건강을 걱정해 본적이 없이 막무가내로 행동 했다.

77년 9월, 5해역사 PB(경비정) 인천근무 두 달 반은 처음으로 사람들을 만난 것 같았다. 처음 도시와 가까운 곳에서 근무를 했다. 서해 임무수행 후에는 인천 연안의 작은 섬들을 멀리하고 홋줄을 묶어 배를 정박했다. 그리고 드디어 상륙 할 때면 휘황찬란한 네온의 야경을 느낄 수 있었고 치고 싶었던 탁구, 마시고 싶었던 커피를 마셨다. 잠깐 가슴이 확 트이는 것 같았지만 약육강식의 인간 생활을 느낄 때 쯤 배가 폐선 되었고 난 지금의 이곳으로 왔다.
부임 날 여객선 갑판 상에서 본 216기지는 까마득한 섬 꼭대기 위에 얹혀 있는 듯했다. 하지만 이내 곧 그런 느낌을 별로 느끼지 못 한 체 기지를 오르락 거린지도 일 년이 지났다. 나 자신의 발전을 위해 무척이나 안간힘을 썼던 섬. 그래서 더 기억에 남는 자월도.

군(軍) 생활 5년 3개월에서 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내가 배운 건 무엇인지, 느낀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전우들과 부모형제에 대한 나의 행동이 어떠했는지를 잘 알고 있다.

긴 여정을 뒤돌아보며 떠오르는 세 단어가 있다.
정직. 정곡. 정진. 내가 지금까지 살아가고자 했던, 앞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삶의 방향을 대변하는 이 단어를 늘 마음에 새기며 올바른 사고방식으로 정확한 나의 길을 찾아 묵묵히 개척해 나가리라.
그리고 보여 주리라!

고독한 런너

직장조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