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창작문학예술인협의회/대한문인협회-수필

ㆍ작성자	김필근
ㆍ작성일	2020-10-01 23:09

ㆍIP: 180.xxx.104

아무래도 병(病)인 거 같애

“너무 심한 거 아니에요? 아무래도 병인 거 같애.”
폰으로 전해오는 집사람의 목소리 톤이 제법 진지하였다.
“취미나 소일거리가 아니라 ‘집착’이나 ‘편집증’처럼 보여서 그래요.”
초목 가꾸는 일을 좋아하는 나를 이해한다지만 이번엔 좀 너무 한다 싶었던 모양이다.

금년 초, 마산으로 발령을 받아 숙소에 가 보니 텃밭 비슷한 땅이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흙이라곤 하나 없는 시멘트 바닥 뿐의 숙소라면 좀 갑갑했을까. 흙이 있으면 일단 풀이나 나무라도 있게 마련이고, 없더라도 심으면 그런대로 삭막함은 덜 하니 말이다. 네 고랑 정도 작물이 심어져 있었는데, 나머지 부분은 아무렇게나 잘라 놓은 나뭇가지들과 3월이 되면서 무성하게 자라는 잡풀들로 뒤덮였다. 한쪽 담장은 송악으로 뒤덮여 그런대로 운치가 있었다.
‘어떻게 꾸밀 수 없을까’ 싶어 출퇴근 때 시간을 내어 조금씩 풀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집에 가는 금요일 오후, 조금 일찍 퇴근하여 마무리 작업을 하였고, 해질녘이 되어서야 ‘곧 갈 거다’ 전화를 했으니 그럴 만 하긴 했다.

내가 사는 부산의 아파트 단지 내 놀이터 옆으로 큰 나무들이 있는 제법 넓은 공간이 있다. 분양을 받아 처음 입주했던 여름, 그곳은 잔디까지 조성되어 있었다. 나무들과 어우러진 잔디밭은 여느 아파트에서 볼 수 없는 여유와 편안함을 주었고, 나는 곧 그 공간을 좋아했다. 낮에는 햇빛을 받아 더욱 선명하고, 밤이면 가로등 은빛에 의해 차가운 시원함을 가져다주던 초록융단은, 그러나 해가 갈수록 그곳에 운동 삼아 걷는 입주민들이 늘어나면서 진작에 다 사라져 버렸다. 20년 세월이 흐른 지금 그 땅 위에 아름드리 잔디가 있었다는 걸 아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사라진 그때의 풍경을 아쉬워하는 나에게 그나마 울창하게 자란 나무들이 위안을 준다.
보도를 경계로 한쪽 공간은 상대적으로 사람들의 왕래가 적은 편이다. 큰 나무만 덩그러니 있는 모습이 한적해 보여 나무 주위로 맥문동을 옮겨 심었다. 언제부터였는지 기억도 못하지만, 차츰 광나무나 쥐똥나무도 나무와 나무 사이에 심었다. 간격이 1∼3m 안팎이라 어느 정도 자라면 오솔길 비슷한 느낌이 나겠다 싶어서였다.
오가는 사람이 적다 해도 사람의 왕래가 있다 보니 처음에는 힘 빠질 때가 많았다. 며칠 지나고 보면 짓밟히고 부러져있거나 심지어 뽑혀져 있기 일쑤였다. 그러면 몇 번이고 다시 심었다. 울타리 표식 삼아 기다란 나뭇가지를 맥문동 주위로 자주 둘러치기도 하고, 뜨거운 여름에는 물 주기 역시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어느 때는 ‘인간의 무관심 또는 폭력이 이렇게도 가공스럽구나’라고 할 정도로, 꺽이어진 모습에 실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왜들 그렇게 하는지 속상하기도 했는데, 그러다 문득 ‘모든 것은 항상(恒常)하지 않다’는 ‘제행무상’을 체감하였다. 심어놓으면 그 모습 그대로를 바랐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온전할 수 없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아하, 모든 존재가, 사물이 다 그대로일 수 없지. 변할 수밖에 없는 거지.’ 그러자 그런 스러짐에 대해 더 이상 크게 아파하지는 않을 수 있게 되었다.

“해 놓으면 훼손되는데 대체 왜 해요?” 집사람과 애들이 물었다.
“글쎄, 음…. 나무만 덩그러니 있는 것 보다, 주변에 초록 풀이나 작은 나무들이 같이 있으면 더 좋지 않겠어.”
공감을 쉬 얻진 못했으나, 어쨌든 우리 주위가 보다 자연친화적이면 좋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신념이나 고집도 아닌, 그저 초록색이 좋아서라는 게 보다 현실적인 이유이기도 하겠다.
조동하 시인의 ‘나 하나 꽃 피어’는 그런 나에게 큰 힘이 된다. 함께 하는 이 없는 혼자 작업은 때론 ‘왜 하지?’라며 흔들리기도 한다. 그럴 때 ‘나 하나 꽃 피고 너 하나 꽃 피면 꽃밭이 되지 않겠느냐’는 시인의 글은 나를 지탱하게 한다. 작으나마 초록 공간이 있으면 그만큼 우리의 삶이 여유롭지 않을까.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은 되고 싶은 유형의 사람이기도 하다. 메마른 땅에 물이 흐르고 작은 새들이 지저귀는 숲을 나도 만들고 싶은 게다.
산의 우거진 녹음, 키 높은 가로수의 대열 등 주변의 푸르름은, 예전에 나무를 심었던 사람들 때문이잖은가. 일상의 삶 속에서 자연의 아름다움과 평화를 누릴 수 있도록 일정부분 역할을 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나의 작업은 충분히 유의미하다.
휴일이거나 틈이 나면 아파트의 그 곳은 나의 주요한 놀이터이자 작업 공간이 되었다. 1년, 2년, 5년… 그렇게 시간이 가면서 어느덧 맥문동과 나무가 제법 자랐다. 당초 구상하던 오솔길 모습을 조금씩 연출해 주고도 있다. 짧디짧은 그 길을 거니며 요즘같이 새순이 쑥쑥 자라는 초록잎을 보는 건 분명 행복하고도 즐거운 시간이다. 집사람에게도 애들에게도 시나브로 그곳은 나의 ‘정원’으로 불리어졌다.

재작년 여름은 기록적인 무더위와 가뭄이 있었다. 퇴근 후 정원을 둘러보면 잎들이 늘어져 있는 게 종종 보였다. 물을 주면서 ‘인간의 이기심’이란 게 떠올랐다. 너무 나간 감이 없지 않지만, 시원하자고 샤워하면서 흘러 보내는 그 물의 일부라도 식물들에게 배려해줄 순 없을까 하는 마음이 굴뚝같았다. 씻은 물일망정 그들에게는 생명수다. 초록과 함께 하고자, 가꾸고자 하는 관심만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을까. 그 심경을 적어 보았다.

타는 목마름

날이 미친 게 틀림없어
그렇게 폭염이 계속되는 날

땅은 갈라지고
한 방울 물마저 없어

초록은, 나는 말라 가는데

지 한 몸 시원코자
샤워하며
아낌없이 흘려보내는 사람아

그 물,
비눗물이 되었더라도
내게는 생명이니 삶이니

타는 목마름 타는 목마름으로
신음하며 스러지는 초록에게, 나에게

조금이라도
조금이라도
나누어 다오

정원에 나무를 심느라 땅을 파다 보면 비닐이나 플라스틱, 건전지 등이 나올 때가 있다. 건전지는 특히 토양에 좋지 않다. 이런 쓰레기는 쉽게 썩지도 않아, 자연을 해치는 주요 원인이 된다.
코로나는 역설적으로 인간이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란 가정을 하게도 하였다. 인공 쓰레기와 오염물질이 엄청 줄어들 것은 명확하다. 지구를 힘들게 하는 첫째 원인이 인간이라 아니할 수 없다.
직장 동료들과 얼마 전 삼천포에 갔다. 해안을 따라 걷다 보이는 페트병과 비닐, 스티로폴들을 애써 외면하다 결국 줍게 되었다. ‘그리 해서는 표도 안 난다’며 동료들이 만류했는데, 맞는 말이다. 그래봤자 얼마나 될까. 하지만 ‘그래도 치우면 그만큼 줄겠거니’ 싶었던 거다. 더군다나 바다로 흘러가면 미세플라스틱으로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이 더욱 크다. 나 하나라도 그걸 조금이나마 줄여 보자는 것이었다. 산행을 하면서도 담배꽁초나 페트병 등 보이는 족족 가능한 비닐봉지에 주워 담는다. 집사람도 이젠 곧잘 따라 한다. 산천이 건강하기를 바라는 것인데, 자연이 건강해야 사람도 건강해진다는 확신 때문이다.

“신발이 왜 그래요?”
9시 정도 되어 집에 오자 집사람이 묻는데, 흙이 신발과 바지 주변에 묻어 있었다.
“으응, 정리하다 보니 맥문동이 있데. 그걸 옮겨 심고 물 주고 했더니 그랬나 보네.”
정원에서 작업을 하면 어쩌다 옷에 벌레가 묻은 지도 모른 채 집에 들어갈 때가 있다. 집사람이 경악을 하고 나 역시 같이 기겁하지만, 한편으로는 살아있는 자연을 느낀다. 묻혀 온 흙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런 나에게 농담이었겠지만, ‘집착’이나 ‘편집증’으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자연과 인간의 아름다운 조화, 그걸 바라고, 그러기 위해 할 수 있는 조그마한 일을 하는 것뿐이니까.

흔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