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창작문학예술인협의회/대한문인협회-수필

ㆍ작성자	김필근
ㆍ작성일	2019-10-16 19:51

ㆍIP: 211.xxx.240

훈장이며 위안이었던 날들

불그스름한 노을이 아름다운 남국의 해변에서, 한 잔 맥주를 마시며 석양을 바라보는 광고 속 인물의 여유를 부러워했다. 하지만 나와는 거리가 먼, 또는 현실성이 없는 그림처럼 보였다.
그럴 수 있다면 좋겠지만 형편도 딸리는 상황에서 굳이 그러고 싶다는 필요까진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풀장에 몸을 담근 채 와인잔을 든 모습은, 낭만적일 뿐 아니라 성공한 삶의 표본같이 내 가슴에 담아져 있었다.
9월의 마지막 날 오후, 나는 베트남 푸꾸옥(Phú Quốc, 富國)의 어느 리조트에 있었다. 집사람의 고교 친구 모임에 남편들까지 합세해서 근 30년 가까이 지속된 네 부부의 첫 단체여행이었다.

출국 전 푸꾸옥에 대해 검색을 해 봤다. 제주도의 1/3 정도 크기 섬이라는데, 흥미로운 건 캄보디아 본토 바로 앞에 있음에도, 베트남에 병합된 이후 국력이 약해 적극적으로 자기 영토임을 주장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힘의 논리다.
‘햇빛이 따갑다’는 감각이 어떤 건지 느껴지는 열기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다가 일행이 머무를 방으로 안내되었다. 들어 선 순간 에어컨 냉기의 시원함도 반가웠지만, 거실 통유리 밖의 풍경에 나는 그만 함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에는 남국의 바다가 시원스레 펼쳐져 있었다. 창 바로 앞에는 넓지는 않지만 전용 풀장이 있었고, 그 너머로 진초록 잔디가 깔려져 있었다. 해안쪽 잔디 끝 부분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나팔꽃 비슷한 덩굴식물이 모래를 덮으며 무성히 자라고 있었다. 그리곤 모래사장이었다.
야자수나무 아래로 때깔 좋은 황금색 고운 모래가 저 멀리까지 펼쳐져 있었다. 푸르른 바다는 잔잔하고 맑아서 가까이 가 보면 바닥이 내비쳤다. 뜨거운 햇살 아래 바다는 은빛 윤슬로 쉼 없이 반짝거리는데, 인적은 없어 더없이 한적하고 적적한 해변이었다.
더군다나 삼시세끼도 리조트 식당에서 해결하는 걸로 예약을 하였단다. 눈뜨면 야자수 늘어선 해변에, 풀장이나 바다에서 물놀이하다 때 되면 밥 먹으면 되었다. 이런 호사(豪奢)를 누리다니! 막연하게 아니면 그저 동경(憧憬)으로만 여겼던 사진 속 풍경이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일행이 짐을 푸는 사이에 수영도 할 줄 모르면서 나는 바다로 직행했다. 얕은 물 밑으로 바닷물에 밀려 층층이 형성된 모랫결이 훤히 비쳤다. 그 물에 목까지 담근 채, 밀려오는 바닷물 따라 이리로 저리로 흐느적거렸다. 조그만 배 한 척이 느긋하게 떠 있었다. 해안선을 따라 늘어선 빌라들 역시 무척이나 한가해 보였다.
옛적,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을 보고 깃발이 움직이는지, 바람이 움직이는지 입다툼하는 대중들에게 혜능(慧能)대사는 말했다. ‘그대들 마음이 움직이는 것〔不是風動不是旛動仁者心動〕’이라고.
물속에서 느끼는 이 여유, 느긋함, 아늑함, 그리고 평온함까지, 혜능의 말에 의하면 그 역시 내 마음이 그러하니 주변까지 그렇게 보이는 걸까.
잡초 솎아내기도 내가 즐겨하는 시간 보내기 방법 중 하나이다. 바다에서 나와 풀장 앞 잔디밭의 많지 않은 잡초를 뽑다 보니 잔디밭이 훨씬 고르고 정갈해 보였다. 그러지 않아도 되련만 잡초 없는 녹색 융단의 단아(端雅)함을 보는 즐거움이 뽑는 수고보다 훨씬 크다.
잔디밭을 걸으며 놀랐다. 쑥쑥 발이 들어갔다. 마치 스펀지 같았는데 잔디가 땅 위에 떠 있는 듯하였다. 그 감촉이 좋아 맨발로 걸어 다니며 집사람에게도 그리 해보라 했더니, 오히려 그 느낌이 더 이상하다며 끝내 맨발을 사양하였다.
풀장에 들어갔다. 아직까지는 밖이 뜨거운 지라 일행 대부분은 방 안에 있어, 나만 바닷가로 잔디밭으로 풀장으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수영을 할 줄 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엉거주춤 모양으로 왔다 갔다 하며 물속의 안온함을 느끼며 즐겼다. 풀장 가에 두 팔을 괴이고 화초 너머 보이는 해변을 바다를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 편안하다. 한없이 여유롭다.
풍경을 바라보는 머릿속으로 아무런 고민도 생각도 없어졌다. ‘성공한 삶의 표본’을, 나와 무관하다 싶었던 ‘남국에서의 힐링’을 지금 내가 누리고 있었다! 적어도 이틀 동안은 이 모든 게 나의, 우리의 것이었다.

각자 찍은 사진을 단톡방에서 공유하다 집사람 친구의 생일이 마침 그날임을 알게 되었다. 어쩌랴, 축하 케이크가 없으니. 리조트에 케이크 파는 곳도 없을뿐더러 오는 도중에도 그럴만한 동네를 보지 못했다. 한참 있으려니 거짓말같이 케이크가 등장하였다. 사정을 들어보니 여행을 기획한 광조 씨가 구해 온 것이었다. 그는 일행 중 유일하게 영어를 구사하는 친구이기도 했다.
“식당에 가서 사정을 얘기했더니 1시간 정도 걸려서 만들어 주데요.”
‘최고’라며 옆에서들 말하자 그는 조금 쑥스러운 듯 엷은 미소를 지었다.
날이 어두워져 모두들 풀장에 들어갔는데 물 온도가 미적지근하게 알맞았다. 갓쪽에서 케이크에 촛불을 켰다. 축하노래가 끝나자 기다린 듯 옆에서 물을 튀기며 물세례를 퍼부었다.
“이런 생일은 처음이에요. 너무나 고맙고 잊을 수 없는 생일입니다.”
그렇게 말하던 그녀는, 방 안에서 케이크를 놓고 다시 축하했을 때 당혹스러운 듯, 고맙고도 미안한 듯 살짝 울컥해 보였다.

푸꾸옥에 처음 도착한 숙소는 섬의 남부 쪽에 위치한 리조트였다. 호치민에서 푸꾸옥으로 비행기 환승 때 착오가 있어 예정보다 늦게 도착하였다.
안내를 받아 다른 동(棟)에 있는 방으로 가는 중, 은은한 가로등 아래 각종 나무와 화초들로 잘 조성된 정원을 통과하였다. 그때에 터져 나온 여자들의 들뜬 탄성과 표정이라니. 아직도 쟁쟁한데 한편으로는 그런 곳으로 한 번도 데려다 준 적 없는 집사람에게 미안함도 들었다.
세계에서 가장 길다(8㎞)는 해상케이블카 탑승을 하기로 한 날의 아침. 새벽부터 억수같이 내리던 비가 출발시간이 되어 가는데도 그칠 기색이 없었다. 게다가 천둥과 번개까지 요동을 쳤다. 결국 포기하고 자유시간을 갖기로 했는데 조금 지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말짱하게 개었다. 광조 씨가 바로 출발할 것을 결정하였다.
일행 모두 5박을 하며 함께 있기는 처음이었다. 그러면서 그를 옆에서 더 잘 알 수 있기도 했는데, 지난 시절 업무 차 베트남이나 미국 등 여러 나라를 많이 돌아다녔음도 처음 알았다. 더군다나 여행 중 보여 준 그의 계획성과 신속한 판단력, 일행을 위한 수고와 행동은 그가 ‘좋은’ ‘멋진’ 사람임을 다시 확인할 수 있게 하였다.
스노쿨링과 워터파크에서의 시간 역시 잊을 수 없는 여정 중 하나였다.
수영을 못하므로 물을 엄청 무서워한다. 그럼에도 주변의 권유에 힘입어 구명조끼만 걸친 채 바다에 들어갔다. 하지만 발밑으로 전해지는 서늘한 물 기운이 그만 나를 질겁케 했다. 허겁지겁 배 난간의 사다리를 잡고는 ‘안 해, 안 해’하며 얼른 올라갔다. 그러다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모습을 보며 ‘이까지 왔는데…’ 싶어 다시 용기를 내었고, 선상(船上) 식사 후의 두 번째 스노쿨링에서는 혼자서 육지까지 다녀왔다. ‘장족의 발전’이었고 ‘새로운 경험의 경이’였다. ‘대단하다, 용감하다’며 집사람이 억지척을 하며 격려해 주었다.
고소공포증이 있어 높은 곳을 꺼려했음에도 여행은 그마저 풀어주었다. 일탈해도 좋다고 은근히 들뜨게 하는 요소가 여행에는 분명 있나 보다. 튜브를 타고 물미끄럼틀을 내려오기 위해 밑이 훤히 보이는 계단을 제법 걸어 올라가야 했다. 높아질수록 난간을 잡는 손마디에 힘이 들어갔고, 일행들에게 내색을 않으려 다문 입술을 더욱 꽉 깨물었다.
“손 놓지 마! 손 놓지 마!”
튜브를 타고 내려오는 그 빠른 와중에 함께 탄 일행들에게 고함을 쳤는데, 내려 와서 보니 그건 오히려 내 자신에게 다그친 말이었다. 절대 손 놓으면 안 된다고, 정신을 꼭 차려야 한다고 다짐하는 자기세뇌에 다름 아니었다.
‘바이킹’을 아주 오래 전 경험하고는 그 이후부터 그런 류의 탈 것을 일체 하지 않았다. 까딱했다간 심장마비라도 올 거 같아서였다. 걷다보니 바이킹보다 훨씬 어지럽고 아찔해 보이는 ‘디스코’라는 놀이기구가 있었다. 그걸 ‘타 보자’고 내가 제의했다. 집사람이 깜짝 놀랐다. “탈 수 있겠어요?”
국내에서라면 엄두조차 내지 않았을 텐데 어디서 이런 용기가 나는지 몰랐다. 그 역시 ‘여행이니까’로 치부하며 도전해 보고 싶었다. 어쨌든 마치고 내려오다 얼핏 다리가 일그러졌는데, 옆에서 ‘얼굴이 하얗다’ ‘다리에 힘 풀렸다’며 걱정 반 농담 반으로 웃으며 얘기하였다. 용기에 스스로도 대견했으나 그 탓인지 머리가 아프고 속이 좀 메스껍더니 이튿날에도 그 증상이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어느 정도 해외여행이라고 다녀 보니, 내 맘대로 일정 조절을 할 수 없는 불편함 때문에 단체여행은 가능한 피하고 싶었다. 집사람과 함께 대만으로 자유여행 갔을 때의 얽매이지 않는 일정이 여간 편안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 건은 휴식형 여행으로 달리 돌아다니는 곳도 없다지 않은가.
푸꾸옥으로 떠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의 여행관(觀)은 아무쪼록 많이 싸돌아다니는 형(形)이라야 했다. 외국까지 갔으니 그 나라의 이모저모나 살아가는 모습을 최대한 많이 봐야 되지 않느냐는 주의였다. 개인—나와 집사람의—여행도 아니고, 한 곳에 머무르는 휴식형 여행을 하기에는 나이가 아직 이르지 않느냐는 생각도 한 몫 하였다. 그래서 다소 떨떠름하며 떠난 여행이었다.
하지만 이번처럼 관광지를 별로 둘러보지 않고 오롯이 재미와 휴식을 취하는 여행도, 둘러보는 여행 못지않은 즐거움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어쩌면 그런 여행이 오히려 이제 우리에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열심히들 살았다. 일행 모두는 잘나지도 못나지도 않은 평균적인 보통 사람들이다. 집사람을 통해 듣노라면 이 집은 어떻고, 저 집은 저떻고 등등 삶의 고비도 많았다. 그런 세월을 헤쳐 가며 3～4년 뒤에는 어느덧 60을 바라보게 되었다. 스스로에게 훈장 쯤 하나 주어도 되지 않을까. 사치(奢侈)도 부릴 줄 모르며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 온 그녀들에게, 우리 모두에게.
이번 여행은 그런 우리들에게 훈장이었고 위안이었으며, 우아한 품격의 삶도 살아 보라고 일러 주었다.

전병일 2019-10-17 09:40	작가님 등단을 축하드립니다 여자분들의 모임에 남자분들이 함께 하셨네요 저도 그런 모임이 하나 있습니다 나아가 들어가니 기념모임을 가진듯 합니다 3~4년후에 기념으로 환갑기념여행 다시하시면 훈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집필하신글 잘배람하고 갑니다 향필하세요...

주응규 2019-10-23 10:13	김필근 작가님으로 인해 수필방이 활력이 생깁니다 일상의 사소로움에서 얻는 행복이 가을날에 가득하기를 바래봅니다. 기온차가 심한 요즘입니다. 감기 조심하시고 좋은 글 가득하시기를 빌어봅니다.

석공(石工)의 비원

애들 뛰는 거 봤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