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창작문학예술인협의회/대한문인협회-수필

ㆍ작성자	이석희
ㆍ작성일	2016-09-02 15:39

ㆍIP: 124.xxx.224

인생 정년 퇴직

인생 정년 퇴직

언제인가 TV를 보니 ‘인간 극장’ 을 방영하고 있습니다.
주인공은 암을 앓고 있는 40대 여성입니다.
5부작 중 한 3편쯤부터 보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무대는 강원도 어느 산골 마을 뒷산이었습니다.
주인공은 한참 전에 유방암 선고를 받았고 이제 남은 생명이 몇 달 남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드디어 남편과 아이들에게도 마지막으로 유언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인생의 모든 사항을 정리하고 나니 이상스러우리만치 건강이 조금씩 좋아졌습니다.
약간의 힘을 얻은 그는 그 옛날 그리웠던 추억을 찾아서 고향으로 추억여행을 가게 되었습니다.
여기부터가 바로 내가 보고 들었던 내용입니다.

화면은 강원도 시골 마을 뒷산 계곡...
돌 틈으로는 맑디맑은 물이 졸졸 소리 내며 흐릅니다.
그 냇물 위로는 자동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만큼 좁은 다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앞쪽과 뒤쪽으로는 울창한 잡목들이 자리를 잡고 그들만의 천국이 펼쳐져 있습니다.
왼편과 오른 편으로는 흡사 콩나물시루를 연상하리만치 빽빽한 전나무 숲이 펼쳐집니다.
질서와 무질서가 함께 자리한 이 공간은 내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는 감히 바랄 수조차 없는 지상의 천국인 듯싶습니다.
‘찌르르르 찌르르’ ‘호오오르르 호르르’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하니 산새들의 청아한 노래 소리입니다.
이 모든 것을 함께 즐기며 걷는 두 사람...

옛날 친구와 함께 걷는 숲길...
가누기도 힘든 채 친구와 함께 걸으며 외우는 한 편의 시...
하얗게 말라버린 피부 등등...
영락없는 환자의 모습입니다만 마음은 이사 나간 빈 방처럼 텅 비어 보였습니다.
생명에 대한 애착을 놓고 남은 인생을 즐기다 보니 그 무서운 병마로부터 조금씩 벗어나더라는 이야기가 간간이 들려옵니다.
그런가 봅니다.
나는 젊어서부터 인생을 70으로 알고 살아왔습니다.
30대 중반에 보약을 먹어야 하는 일도 인생의 반을 살았기 때문이라고 의사에게서 들었습니다.
70이 넘어서 사는 인생은 덤이라는 말씀은 충고라면 충고인 셈이었습니다.
나는 그때 그 한의사에게서 이 충고를 들었고 이 사실을 마치 신앙처럼 믿고 살아왔습니다.
인생의 정해진 수명은 70년이라는 이 말씀이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살게 되면 그것은 덤입니다.

덤! 얼마나 좋은 선물인가요.
시골 장터에 가면 할머니들이 손수 가꾼 농산물들을 가지고 나와 좁은 바닥에 서로의 엉덩이를 비비고 앉아 지나가는 손님에게 눈을 맞추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인심 쓴다 생각하면서 조금 많이 사면 기분이 좋아진 할머니는 덤이라면서 한 움큼 집어 주십니다.
그러고는 주름살이 깊게 패인 까만 얼굴에 하나 가득 웃음을 덤으로 선사하십니다.
시골 장터를 구경하다 보면 부르는 값을 깎자 하는 분들도 보입니다.
흥정을 하다하다 안 되면 주머니에 담을 때 아예 한 손 가득 집어서 담는 여자 손님의 억지스런 모습도 더러 보입니다.
구경삼아 쳐다보면 그럴 경우에 대개는 잘 가시라는 인사도 건네지 않습니다.
‘잘 가거나 말거나.’ 하고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눈을 흘기는 모습에서 그것을 느낄 수가 있으니까요.

그래서 나는 지금은 덤으로 살고자 합니다.
무엇에 잡힐 일도 없고 걸릴 것도 없는 삶을 산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홀가분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의 삶이 덤인데 더 바랄 게 무엇이 있겠어요.
이제 언제 떠나더라도 여한은 없습니다.
다만 어머니 앞에 떠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어찌 나만의 의지로 되는 일일까요?
동생을 보니까 그렇더라고요.
나보다도 네 살이나 뒤에 따라오던 동생이 벌써 수년 전에 나보다 먼저 떠났습니다.
오는 순서는 있어도 가는 순서는 없는가 봅니다.
동생이라고 어머니 앞에 먼저 가려고 했을 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남이 주는 덤이라야 덤의 가치가 있는 것이지 억지로 빼앗은 덤은 덤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부끄럽습니다.
사체가 이러하다 보니 남이 주는 덤은 내 맘대로는 안 되는 일인 게 맞지 싶습니다.

만일 어떤 불치의 병이 나를 침범한다 하여도 그저 달게 받으려고 생각합니다.
왜냐 하면 지금 덤으로 주어진 삶을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인생 정년퇴직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직장만 정년퇴직이 있는 게 아니고 인생에도 그것은 있습니다.
세상 구경도 못하고 떠나는 사람도 있는데 거기에 비하면 나는 엄청나게 장수를 한 셈입니다.
몇 살에 마쳐도 거기까지가 천수입니다.
어찌 보면 이 길이 불치의 벽을 넘어 퇴치의 길로 가는 길인지도 모릅니다.
이제 마음이 아주 편안합니다.
그저 홀가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