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네 내 딸하고 잘살 자신 있나?”

“아니오.”

“......”

시골아버지(나는 빙장어른을 이렇게 부르고 있다.)가 처음 나를 보던 날 물으시는 말씀에 나는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였다. 당혹하셨는지 혼란스러우셨는지 입을 굳게 닫고 나를 바라만 보시는 시골아버지에게 나는 곧이어 말씀 드렸다. “저는 잘살 자신은 없지만 재미있게 살 자신은 있습니다.”

그래도 조용히 나를 바라보시던 아버지는 굳게 닫혔던 입을 열어 한 말씀 하셨다. “그러면 됐네. 되도록 일찍 날짜를 잡겠네.”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에 가을도 막 꺾이어 가던 11월의 어느 날. 영등포역 앞 어느 커피전문점에서 결혼하기 전 아내와 함께 시골에서 막 올라오신 아버지를 처음 만나서 나눴던 단도직입적인 대화다. 그것이 아버지의 둘째 딸과 나와의 결혼 승낙이었던 셈이다.

나의 아내는 아들 삼형제 딸 세 자매 중에서 가장 가운데인 셋째형제 둘째 딸로 태어났다. 다른 형제들과 달리 공부에 취미가 있어서 시간 나는 대로 책에만 매달리니 부모님은 심부름이나 설거지 등 궂은일을 아내에게는 절대 시키지 않고 다른 형제들에게만 시켰고, 고등학교는 청주로 유학을 보냈다고 하니 아내는 부모님에게는 보배같이 아끼는 귀한 자식이었지만 반대로 다른 형제들에게는 눈총도 많이 받아씀직 하다. 하긴 우리의 큰아들이 책을 무척 좋아하고 책에 쉽사리 빠져드는 것은 아내에게서 받은 유전자 덕인가 한다.

완고한 시골아버지는 자식이나 조카들은 물론 식구들이 쓸데없는 낭비를 하면 꾸중은 물론 한두 시간씩 꿇어 않아 훈육을 받아야 할 정도로 완고한 전통 시골 노인으로서 상당히 깐깐하셨다. 아버지는 작은 돈이라도 허투루 쓰시는 일이 없으셨지만 부모님을 위해서는 지극 정성이셨으며 돈을 아끼지 않으셨고, 시골어머니도 오랜 세월 시부모 모시기로 허리 편할 날이 없으셨다.

그렇게 6남매를 키우고 살던 중 일찍이 언니인 큰딸은 연애결혼으로 반대도 심하셨고 부녀가 마음에 상처를 주면서 마음고생도 심했던바 자식을 이기지 못하고 결혼을 시켰지만, 나머지 두 딸은 남자 사귀는 걸 무척 경계하시고 훈육한 관계로 둘째 딸은 결국 중매로 짝지어줘야 하였다. 큰처남이 교편을 잡으면서 학교 선생이 배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부녀에게 공통으로 있었는데, 신장이 1미터 70센티에 육박하고 날씬 하지만 그리 예쁘지 않았던 아내의 얼굴에 맘에 드는 반려자를 만나기가 녹녹치 않았었다. 내가 마음에 들면 네가 싫고, 네가 마음에 들면 내가 싫고. 남자 키가 작아서, 직업이 선생이 아니라서, 나이가 많아서 등등 이런 저런 이유로 처녀의 나이를 채우는 사유가 그렇게도 많았었단다.

그러다가 친척끼리의 주선으로 나를 본 지 2주 만에 시골아버지가 남원에서 올라오셔서 처음 본자리에서의 물으심에 그렇게 당돌하게 대답했으니 황당하시기도 하였겠다. 어쨌거나 그 결혼승낙으로 우리는 처음 만난 지 단 28일 만에 결혼식을 올리고 설악산으로 신혼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잘살다’를 검색해 보니 그저 중국어 사전에 ‘富裕(부유)’라고 표기 되었는바 이를 역 하면 ‘재산이 많고 넉넉하다’로 풀이 되니 아무래도 ‘잘살다’는 일단 재화가 넉넉해야 될 것 같지만 또 다른 표기로는 ‘安逸(안일)’이라고도 하니 이는 ‘편안하게 즐기다’라고 직역되어 결국 재물만 풍족해서는 ‘잘살기’를 만족 할 수 없을 것이다.

반대로 ‘재미있다’를 검색해 보니 국어사전에 ‘아기자기 하게 즐겁고 유쾌한 기분이나 느낌이 있다’라고 설명을 붙이니 ‘재미있게 살기’는 아무래도 ‘금전에 관계없이 커다란 행복이 아닌 작고 소소한 행복이 오랫동안 지속되는 삶이다.’라고 나름대로 정의를 하고 싶다. 참고로 영어의 표기는 ‘Funny’나 ‘it's fun’이라고 한다.

오늘 내가 ‘재미있게 살기’와 ‘잘살기’를 사전적으로나 보편적으로 따지고자 이렇게 서두를 장황하게 풀어 놓은 건 물론 아니다. 지나고 보면 ‘내가 그때는 처음 보는 어려운 장인어른 면전에서 왜 갑자기 그런 대답을 하였었나?’하는 생각도 들면서 ‘과연 잘사는 건 어떤 것이며, 재미있게 사는 것은 어떤 것인가?’하는 의문을 가져본다. 더불어 그때 아버지께 약속한 ‘재미 있게 살 자신은 실천하고 있는 것인가?’하는 마음을 가져본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이고 어떤 것이 재미있게 사는 것인가? 정의는 있는가?

보편적으로는 그저 아들딸 잘 낳고 집 한 채 장만하여 아이들 잘 키우고 큰 걱정 없이 살다가 시집 장가 잘 보내고, 특별히 몸이 아픈데 없게 사는 게 잘 사는 것일까? 아마도 큰 욕심 없으셨던 아버지의 잘산다는 기준은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살기는 사람의 의지대로 되는 건 아닐 것이다.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이 반드시 기다리고 있듯이 인생 짧게 살아도 항상 여유롭지 못하고 언젠가는 고단하고 지난한 시간을 맞을 것이다. 그러니 항상 잘 살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로 사람의 노력, 절제와 하늘의 보살핌이 있어야 할 어려운 것이다.

자식 키우기도 마찬가지다. 부모가 아무리 정성을 들여도 억지로 안 되는 것이 자식농사이니 ‘잘살기’를 실천하기는 정말로 내 의사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생각되며, 그때 자신 없다고 말한 건 비겁하지만 잘한 일이라고 생각을 해본다.

그렇다면 ‘재미있게 산다.’라는 것은? 그때 내가 재미있게 살겠다고 할 때 내게는 그에 대한 어떤 목적이나 스펙이 있었는가? 지금까지 나는 그렇게 살아왔다고 자부할 수 있겠는가? 한마디로 정리하면 나는 절대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다.

사람이 살다보면 행복할 때도 있고 불행에 눈물 흘릴 때도 있을 것이다. 나 또한 몇 번 삶의 롤러코스트를 경험했다. 대체로 행복할 때는 문제가 없으나 불행할 때가 문제이다. 나에게는 삶이 고단하고 수렁에서 허우적거릴 때 변치 않고 나를 신뢰해주며 고통을 분담해 주고 힘을 보태 늪에서 벗어나려 같이 노력해준 내 가족들이 있어서 그나마 재미있는 삶의 근사치는 살아온 것 같으니 그 30여 년 전에 내가 시골 아버지께 맹세한 ‘재미있게 살기’를 내가 아닌 내 사랑스런 가족들이 지켜준 것 같다.

사람 사귀길 좋아하는 내가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를 해보니 평소에는 걱정거리가 하나도 없이 마냥 행복해 보이다가도 술이 한잔 들어가서 얼큰해지면 긍정적인 것 보다는 대부분 부정적 삶에 대하여 토로하곤 하였다. 겉으로는 행복해 보이고 한껏 미소 띤 얼굴이지만 가슴에는 시커먼 응어리 하나씩을 가슴에 안고 있었다. 경제적인 문제, 자식의 문제, 부모 문제, 건강문제, 사업의 송사문제 등등 크고 작은 응어리들.......

겉으로 보기에 배부르고 따스해 보이는 사람들 대부분이 결코 100프로 잘살거나 재미있게 살고 있지는 않더라.

이제는 연세가 그만 하셔서 거동이 불편 하시고 약간 치매기가 있으신 아버지는 나를 보시면 어김없이 물으신다. “요즘 어디 나가는가?” 나는 건성으로 대답을 한다. “예” “어떤 직장인가?” “예. ooo회사입니다.” “월급은 많이 주는가?” “예” “그런가?” “예” “......”

그토록 깐깐하게 살아오신 아버지는 만년에 들어 내가 했던 30여 년 전의 약속을 아버지의 잣대로 재어보시고 확인하시는가 보다. 나는 마음속으로 변명 같지만 나름 진솔한 답을 한다. “아버지! 국민들이 불신하고 야당이 함부로 흔드는 나랏님, 공돈이라고 받아먹었다가 구토하듯 몸과 맘이 황폐해진 세도가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불법을 동원하여 재산을 늘리고 법의 틈새에서 전전긍긍하는 부자들보다 맘 편하고, 잃을 것도 없으니 아버지에게 맹세한 ‘재미있게 살기’는 어느 정도 이룬 것 같고 ‘잘살기’도 그리 나쁘지는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