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발은 하이힐을 거부한다. 아니다.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동경한다. 어두운 동굴 속에서 찾아 헤매는 한줌의 빛을 기다리는 심정이랄까. 그래서 우리 집 현관 신발장에는 나와 함께 빛을 향해 꿈꾸는 사물이 있다. 내가 다가서기엔 이름마저 높은 하이힐.

외출할 때마다 빨간 하이힐에 눈도장을 찍고 나간다. 가끔 주위에서는 신지도 못할 하이힐을 왜 샀느냐, 혹은 건강이 좋아지면 신을 수 있느냐고 물어 온다. 그럴 때마다 마음속으로 되뇐다. 언젠가는 예쁜 하이힐을 신을 날이 있을 거라고.

내가 원하지 않지만 나를 지켜주는 고마운 친구는 따로 있다. 벨크로가 붙어있는 투박한 진한 갈색 특수화다. 현관 신발장에서 하이힐과 특수화가 서로 어울리지 않지만 둘 다 내 신발이다. 외출을 할 때 내 손이 특수화를 집어 들면서 시선은 나도 모르게 빨간 하이힐에 꽂혀 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하이힐은 한 번도 신어 본 적이 없다. 내 발은 변형으로 인하여 특수화를 신지 않으면 걷지를 못하기 때문이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직장생활을 하던 어느 날 내 몸에서 이상한 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나는 인생의 비애를 마시며 처참하게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내가 내 몸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천형 같은 고통 속에서 옴짝 못하고 집안에서만 살 때가 있었다. 집안에선 할 일이 별로 없다. 그러다 보니 무료한 일상의 연속이었다. 가끔 창밖에서 하이힐소리가 똑! 똑! 똑! 들리면 귀를 기울인다. 경쾌한 소리가 활기차게 들려온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하이힐에 청바지를 입고 예쁜 스카프를 휘날리며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선다. 상상의 세계는 꿈꿀 수 있어서 더 아름답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기적이 일어났다. 꿈꾸던 하이힐은 아니지만 특수화를 신을 수 있어감사의 기쁨에 눈물을 흘렸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던가. 특수화에 기댄 호강에 권태가 왔다. 특수화의 고마움은 온데간데없이 굽 높은 하이힐을 신고 싶어졌다.

구둣가게를 지나치던 어느 날 쇼윈도 진열장에서 평평한 대지를 떠받들고 있는 날렵하고 세련된 빨간 하이힐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사지 않으면 후회할거라는 빨간 구두의 열정이 도꼬마리 씨앗같이 끈질기게 나를 유혹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하이힐을 유혹했다고 해야 옳을 듯하다. 쇼윈도를 박차고 나를 따라나선 빨간 하이힐이 고맙기까지 했다. 그러나 하이힐은 몰랐다. 제 운명을..

하이힐만큼 예쁘지 않지만 신발장에 특수화가 다른 신발들과 나란히 자리 잡던 그날부터 나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특수화는 너무 투박하고 맵시가 없다. 물론 다른 사람의 눈길을 끌지도 못한다. 하지만 나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사랑스런 벗이다. 사물을 벗이라고 지칭하는 것이 우습지만 그 무엇보다도 나에게 소중한 물건이다. 특수화를 신고 현실 세계로 나가서 활동을 하는 동안 하이힐은 나에게 무언의 용기를 준다. 나를 신고 싶다면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참다운 삶을 살라고, 긍정의 삶을 살라고, 감사하면서 살라고 속삭인다.

하이힐이 내 삶의 꿈이라면 특수화는 내 삶의 현실이다. 특수화조차 신을 수 없었던 지나간 이십여 년 동안 내 삶은 없었다. 현관에 떡 버티고 있는 신발장은 가족의 존재를 확인해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자신의 신발이 신발장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서운함으로 인해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내가 신발에 대한 애착이 남다른지 모른다. 신발장에 놓은 신발이 가족의 구성원을 의미하는 소속감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하이힐의 시초는 16세기 베네치아 여인들이 거리의 오물을 피해 다니기 위해 신었다고 한다. 높은 굽의 초핀(Chopine. ‘쇼핀느’라고도 한다)이 하이힐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스페인 여자들이 신고 다녔다는 나무로 만든 통굽 신발이 하이힐의 원조라는 의견도 있다. 전설

같은 이야기지만 지금은 하이힐이 여성들이 멋을 내는데 없어서는 안 될 귀한 신분으로 변했다.

현관 신발장에 가지런히 놓인 빨간 하이힐과 특수화를 보면서 나는 오늘도 꿈을 꾼다. 매년 열리는 ‘하이힐 신고 달리기’ 시합에 참가한 나의 빨간 하이힐이 이국의 창공에서 높이 나는 꿈을. 뉴욕, 암스테르담, 예루살렘, 베를린을 뾰족한 하이힐로 꼭꼭 찍으며 활짝 웃는 나의 모습을 꿈꾼다.

그 꿈을 이루어줄 두 켤레의 신발. 사랑스런 하이힐과 특수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