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창작문학예술인협의회/대한문인협회-수필

ㆍ작성자	장춘희
ㆍ작성일	2017-10-03 12:34

ㆍIP: 61.xxx.201

할머니의 여행
할머니의 여행 장춘희

앞산이 붉어지고 강물이 깊어지면 할머니는 그만 가슴이 내려앉는 병이 도지고 만다. 단풍이 붉어질수록 할머니의 가슴도 점점 더 붉은 물이 들어갔다. 길을 떠나야지, 안 봐야지, 할머니의 혼잣말이 불안한 마음을 대신했다.

할머니는 부잣집으로 시집을 갔다. 처녀가 인물은 없어도 덩지가 크고 덕이 있어 보인다며 맞선자리에서 시어머니 될 사람이 마음에 들어 했다. 큰살림을 맡기기에는 좋은 조건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얼굴도 안 예쁜데 여자답지 않게 큰 덩지의 큰 색싯감을 총각은 싫다고 했지만, 어머니를 이길 수는 없었다. 어머니는 일찍 청상이 되어 집안을 책임지게 되었다. 어린 아들 하나 데리고 아랫사람들 부려가며 안팎살림을 감당해 내는 어머니는 웬만한 남자보다 기가 센 사람이었다. 그런 어머니에게 아들이 싫다고 하는 말은 그저 세상물정 모르고 하는 투정 정도로만 치부되었다.
부잣집으로 시집갔지만 귀한 아씨마님 대접은 잠깐이었다. 할머니가 느껴본 박꽃같이 환하고 아름다운 세상은, 어둠에 밀려 한순간에 사라지는 저녁노을처럼 너무 짧았다. 새신랑이 사업을 한다고 도회지로 떠나버린 것이다. 부부는 아직 낯가림도 채 걷어내지 못한 사이였다. 남편 없는 시집살이는 허울만 새아씨였다. 천성이 부지런하고 과묵한 할머니의 삶은 남의집살이만 아니었지 그냥 군말 없이 일 잘 하는 일꾼과 다르지 않았다.
남편은 집안에 행사가 있거나 명절 또는 큰돈이 필요할 때만 집에 들렀다. 남편은 집에 와도 사랑채에서만 지내고 안채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부부는 얼굴 마주할 기회도 별로 없었다. 어느 날 집에 다니러 온 남편은 길을 잘못 든 사람처럼 아내 방에 들어와서 하룻밤을 자고 갔다.
그 이듬해 여름, 할머니는 아들을 낳았다. 손이 귀한 집이었다. 집안은 여러 날을 두고 잔치 분위기였다. 시어머니는 아들을 집으로 불러 들여 며느리에게 치하를 하게 했다. 그 때 할머니는 생애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단 한번 남편에게 ‘큰일 했다’ 는 따뜻한 말을 들어봤다.
아들이 제법 커서 집안을 뛰어 다닐 때 쯤 되어서다. 명절에 집에 온 남편은 구름에 스미는 달빛처럼 소리 없이 아내 방에 들어와서 자고 날이 새기도 전에 나가 버렸다. 간밤에 남편이 자고 간 일이 사실이었을까, 할머니에게는 그저 아득히 먼 옛날에 꾼 꿈처럼 여겨졌다.
두 번째는 딸을 낳았다. 그런데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일이 일어났다. 아들은 어릴 때부터 도회지에서 키워야한다고 남편이 아들을 데리고 갔다. 조금 더 크면 데리고 가라고 사정도 하고 울며 매달려도 봤지만, 할머니의 말은 누구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 때 할머니는 모르고 있는 사실이 있었다. 남편은 작은댁과 살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작은댁과의 사이에는 자식이 생기지 않았다.
아들을 남편에게로 보내고 오직 큰딸에게만 마음을 쏟고 살던 할머니에게 그런 행복도 잠깐이었다. 여름 더위가 숙져가고 앞산에 단풍이 들 무렵 그만 딸이 잘못되고 말았다. 어린 딸이 고구마를 먹고 급체한 것이다. 어린 것 하나 제대로 간수하지 못했다고 시어머니에게 모진 구박을 받았다.
명절이면 집에 오는 아들도 아버지와 함께 사랑채에서 지냈다. 할머니는 그립고 보고 싶은 아들이 집에 와도 마음 놓고 안아보지도 못했다. 어쩌다가 마주 처도 어머니와 아들은 서로 눈길을 피하고 마는 어색해하는 사이가 되고 말았다.
그 후로 할머니는 딸을 둘 더 낳았다. 둘째 딸은 아버지를 닮아서 이목구비가 뚜렷하게 잘 생긴 아이였다. 아이가 성격이 밝고 활달해서 온 집안 분위기를 훈훈하게 했다.
둘째 딸은 읍내에 있는 소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둘째 딸이 소학교 4학년 무렵이었다. 학교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많은 비가 내려서 갑자기 불어난 강물에 그만 휩쓸려가고 말았다.
그때도 가을이 붉어지고 강물은 깊어질 무렵이다. 아이 둘을 앞산에 버리고 가슴에 묻던 날 할머니 눈은 앞산 단풍보다 더 붉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시어머니는 바람 잦은 아들보다 무던한 며느리를 더 믿고 의지했다. 그런 시어머니가 돌아가실 무렵에는 집안 재산을 며느리에게 다 맡기면서 아들에게서 재산을 지키라고 당부 말씀을 남겼다. 그러나 시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사흘이 멀다 하고 남편은 땅을 팔아갔다. 젊어서부터 어렵고 먼 사람이었던 남편을 말릴 힘이 할머니에게는 없었다.
남편은 병이 들어 누워있으면서도 사람을 시켜서 땅을 팔아갔다. 그런 남편은 죽어서조차도 할머니에게로 돌아오지 않았다. 작은댁 친정 산에 묻혔다.
어린 시절 새터 밭에 푸성귀 뜯으러 가면 밭둑에 앉아서 들판을 바라보며 ‘그늠의 인사가 바다 같은 논을 다 팔아버리고’ 하는, 할머니의 한숨에 묻어나던 혼잣말을 자주 들었다. 그야말로 바다 같은 논밭을 다 팔아버리고 할머니에게 남은 건 새터 밭 몇 마지기와 커다란 집 한 채 뿐이었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와 헤어져 도회지에서 자란아들은 장가가서 아들 둘, 딸 셋을 두었다. 아들은 고향 집에 혼자 계시는 어머니 적적하시다고 큰딸을 어머니에게 데려다 두었다.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아들 마음속에 어머니는 항상 아픔이었다. 그런 어머니에게 아들은 나름의 효도를 한 것이다.
적막하기 그지없는 할머니 삶에 손녀는 한 줄기 빛이자 따스한 온기였다.

가을이 붉어지면 앞산을 바라볼 자신이 없는 할머니는 길 떠날 보따리를 꾸렸다. 앞산과 강이 보이지 않는 막내딸 네 집에 가서 겨울을 보내고 오는 것이다.
발이 유난히 큰 할머니는 코고무신 크기가 맞는 게 없었다. 발보다 작은 고무신은 늘 앞코가 찢어져 있었고 할머니 발을 아프게 했다. 앞 코가 찢어져 있는 고무신을 신고 불편한 걸음걸이로 할머니는 길을 떠났다.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한적한 들길을 걸을 때면 그 찢어진 고무신은 할머니 손에 들려 있었다.
찢어진 고무신과 할머니 인생의 무거운 짐을 덜어 내 버린 것처럼 가벼운 보따리 하나, 그리고 차갑고 시린 삶에 따스한 온기를 전해주는 어린 손녀딸의 손을 잡고 해마다 가을이면 나그네가 되어 길 위에 서 있었다.

김경렬 2017-10-03 19:26	오랫만에 서재 불을 밝히셨습니다. 장춘희 작가님! 그렇게 할머님손에 자라셨으므로 할머니의 정이 남다르셨나 봅니다. 저는 할머니에 대한 정이나 추억이 없어서 부럽습니다. 내일이면 즐거운 추석명절입니다. 온가족이 모여 행복한 명절 보내시기 바랍니다.

백낙은 2017-10-03 20:34	장춘희 작가님.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작가님의 할머니에 대한 애잔한 추억이 이 글을 읽는 나를 슬프게 하네요. 옛날에는 더러 더러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수많은 역경 속에서도 뿌리깊은 나무가 되신 할머니께 치하를 드리고 그 아픔을 기억하고 계신 작가님에게도 치하를 드립니다. 이 가을에 할머니가 손녀로 인해 더욱 행복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작가님이 이 가을에 더욱 왕성한 창작활동으로 우리 수필 서재가 밝게 빛났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을 가져봅니다. 감사합니다.

장춘희 2017-10-05 10:09	김경렬 선생님, 백낙은 선생님 제가 게으르고 재주가 없어서 두 분을 지면으로나마 오랫만에 뵙습니다 두 분들 건강하시지요? 맑을 가을날이 계속 되는 좋은 계절입니다 건강하시고 건필하십시요

이석희 2017-10-06 08:53	장춘희 작가님! 옛날에는 자주 목격한 일이었지만 막상 이렇게 가슴 아픈 사연을 접하니 마음이 몹시 아픕니다. 그래도 할머니께서는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곱게 미소 지으시리라 짐작합니다. 감동적인 글 마음에 새깁니다.

정찬열 2017-10-06 13:12	장춘희 작가님 팔월 한가위 잘 보내셨는지요 이런 대명절이 되면 할머니의 그추억들이 다소곳이 아롱지시겠지요, 더욱 그 아품이 서리는 추억이 말입니다. 감동으로 올려주신글 잘 배독했습니다. 남은 연휴도 알차고 보람된 나날 이시길 빕니다.

장춘희 2017-10-11 20:04	《Re》이석희 님 ,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어린시절 함께한 할머니를 꼭 한번 추억하고 싶었습니다

장춘희 2017-10-11 20:10	《Re》정찬열 님 , 추석 연휴 잘 지내셨지요? 부족한 이웃, 인사가 늦었습니다. 내일 부터는 날씨가 제법 쌀쌀할 거라는 일기예보입니다 감기 조심하시고 건강하십시요

환영합니다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