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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금주 김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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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 채영제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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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ㆍ작성자 |
채영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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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ㆍ작성일 |
2017-01-17 22: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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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소설) 낙인의 그늘. 5
(연작소설) 낙인의 그늘. 5
*
해후는 경찰서 유치장에서 고문의 후유증으로 밤새 끙끙 앓다가 오전 10시경에 형사들에 의해 다시 끌려 나왔다.
조사실에는 김 경위가 다른 형사들과 같이 책상 앞에 어떤 젊은 여자 한명을 앉혀놓고 부지런히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 오, 김해후. 여기 앉아.”
김 경위의 갑자기 변한 부드러운 말씨에 눈물이 그냥 왈칵 쏟아질 뻔하였다.
책상 위에는 이미 완성된 조서 몇 장이 놓여 있었다.
“ 자, 여기에 이름 쓰고 도장만 찍고 빨리 들어가 쉬어. 내일 검찰청에 넘어갈 거니까.”
조서의 제목은 피의자신문조서(제2회. 대질)라고 되어 있고 시작은 “ 피의자 김해후의 특수강도상해죄 피의사실에 대하여 사법경찰관 경위 김무작은 사법경찰리 순경 최성일을 참여시키고 다음과 같이 임의로 문답하다.” 로 되어 있었다.
“ 특수강도상해……. 아, 조그만 가게에서 공짜 술 얻어 마시고 파출소로 붙잡혀 와 유리창을 깬 것이 바로 ‘특수강도상해’라는 죄로구나…….”
김해후는 자신에게 붙여진 엄청난 낙인에 조사실 천장을 올려다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김 경위는 그 모양새를 보면서 빙긋 웃으며 짐짓 인정 많은 척 “ 인마, 이거. 독질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본성이 참 순하고 착한 놈이네. 쯧...쯧, 내가 이 조서에 너한테 모두 유리하도록 적어 놓았으니 내일 검찰청에 가거든 경찰서에서 한 말은 모두 사실이고 다시는 죄짓지 않고 착실하게 살겠다고 무릎 꿇고 빌어라. 그러면 너는 초범이고 나이도 아직 어리니 선처를 받고 빨리 나올 수 있을 거다.”
“ 예, 앞으로는 절대로 술 안마시고 착실하게 잘 살겠습니다.”
“ 옆에 앉아 있는 아주머니가 피해자 되신다. 얼굴 잘 봐두고 혹시 검찰청에 가서 이 아주머니 만나거든 피해자가 맞다고 말하고 무조건 잘못했다고 해야 너한테 유리한 거야. 알겠어?”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할 수 없었으나 험악한 인상을 가진 형사들이 시키는 대로 그 여인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죄송합니다." 라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사과를 하였다.
그리고 극도의 공포심과 불안감에서 와들와들 떨기 시작하였다.
피해자라는 그 여인은 김해후의 인사를 받고 멈칫하더니 다시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
철커덩 텅.
구치소의 육중한 철창문이 기분 나쁜 소리를 지르며 아가리를 벌리고 이어서 간수가 김해후를 안으로 떠밀어 넣었다.
저쪽 맞은편 중앙에는 살점은 제법 있으나 하관이 날렵하게 빠진 50대 남자 하나가 모포를 여러 개 깔고 옥좌 위 상감마마처럼 의젓이 앉아 있다. 그리고 그 좌우에는 30대 남자 2명이 내시 같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서너 평밖에 되지도 않는 비좁은 공간에 십여 명의 죄수들이 좌우로 쭉 늘어앉아 있다가 그중 한 놈이 발딱 일어섰다.
“ 요, 쥐방울만한 새끼 좀 봐라. 그 자리에 서서 신고부터 해.”
신고 ……. 김해후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엉거주춤하고 섰다가 어디에선가 날아온 발길질에 폭, 하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이어서 모포가 뒤집어 씌어지고
그 위로 몰매가 가해졌다. 이유도 없는 발길질에 끽소리도 못한 채 지근지근 밟혔다.
아, 나는 왜 이렇게 가는 데마다 폭력이 뒤따라 다닐까……. 그 와중에서도 무기력한 자신에 대한 분노만 치밀어 퍽퍽, 하는 소리만 들릴 뿐 아픔이라곤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 됐다. 그만. 족제비는 새 식구에게 신고하는 방식부터 가르쳐 주어라.”
양반이 아랫것들에게 지시하는 듯 제법 무게 있고 점잖은 목소리가 들렸다.
김해후는 족제비라는 별명을 가진 20대 후반의 수형자로부터 신고하는 요령을 교육받았다.
아리랑. 올해 나이는 스무 살. 그러나 호적이 잘못되어 실제는 열 여덟살.
아라리요. 생산지는 부산 영도구 봉래동.
아리랑. 아버지는 성이 ‘유 씨’라는 것만 알고 있으나 이름은 모르겠고 얼굴도 본 적이 없다.
아라리요. 어머니는 어릴 때 어느 섬에서 부산으로 가출하여 술집으로 떠돌다가 어떤 군인과 연애를 하여 나를 배었다.
아리랑. 아버지는 제5육군병원 군의관이었는데 전쟁이 끝날 무렵에 어머니를 버리고 전선으로 떠나갔다.
아라리요.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기다리다가 내가 서너 살 때 이북에서 피난 온 어떤 홀아비와 다시 동거를 하였다.
아리랑. 그래서 내 성은 그때부터 ‘김씨“가 되었다.
아라리요. 내 죄명은 ‘특수강도상해죄 공범’이라고 한다.
아리랑. 그러나 나는 그런 죄를 저지른 적이 없다. 단지 남의 가게에서 술 마시고 술값 안준 것과 파출소 유리창 한 장을 깬 것밖에 없다.
아라리요. 나는 경찰서에서 물고문을 당해 너무나 무서워서 조서도 읽어보지 않고 그대로 도장을 찍었다.
아리랑. 오늘 검사한테 너무나 억울하다고 말해 보았지만 돌아오는 건, 야구 방망이밖에 없었다. 그냥 이대로 죽고 싶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그래서 나는 이제부터 죽을 때까지 내가 강도가 아니라는 것을 밝히고 말 것이다.
김해후의 눌변이기는 하나 조리 있고도 결연한 자세를 보고는 죄수들이 사방에서 ‘와’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 시발놈. 새비(새우) 좆만한 것이 제법 까부네.”
중앙에 정좌해 있던 그 사람. 이제 알고 보니 감방장이었다.
그는 빙그레 웃으면서도 화경 같은 눈을 번쩍이더니 김해후의 심장을 꿰뚫듯이 쏘아보았다.
“어머니 이름과 고향은?”
“고향은 제주도이고, 이름은 ‘고영해’입니다.”
“ 내가 관심법으로써 너의 마음속에 들어가 보니 너의 말이 맞는 것 같다. 너는 결코 그런 죄를 지을 애는 아니야. 그러나 세상은 강자의 편이지. 네가 아무리 억울하다고 하소연을 한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네 편이 되어 주질 않아. 그러니 공연히 법정에서 범행을 부인하여 판사 놈에게 괘씸죄로써 추가로 엮이지 말고 그냥 그대로 자백을 해버려. 너는 초범이고 소년범이니 피해자와 합의만 된다면 얼마든지 집행유예로 나갈 수 있는 길이 있지.”
난생 처음 듣는 따뜻한 말이었다. 그러나 김 경위에게 당한 고문과 억울하게 뒤집어 쓴 강도라는 낙인으로서 일평생 살아갈 생각을 하니 너무나 슬프고 억울하여 견딜 수가 없어 그 자리에서 풀썩 주저앉아 ‘으어엉’ 하고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죄수들은 왁자지껄하며 야유하고 배꼽을 잡던 중에 김해후의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울음소리를 듣고는 갑자기 숙연해 졌다.
“ 어이, 족제비. 오늘부터 얘는 내 옆에 재워라. 알겠지?”
“ 감방장님. 그건 우리 룰에 어긋나는데요. 신입은 무조건 똥통 옆에 자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 알고 있으니……. 그냥 내 시키는 대로 해.”
*
다음날 오후에 국선변호인이 면회를 왔다.
“ 이 사건은 피고인이 경찰이나 검찰에서 모두 범행을 자백하였고 피해자도 김해후 씨가 범인 중 한명이라고 확실하게 증언을 하였어요. 그러니 그냥 판사님에게 잘못했다고 자백하고 선처를 구하는 게 김해후 씨에게는 유리해요.”
“ 변호사님. 저는 죽어도 그렇게 못합니다. 저가 강도질을 하지 않았는데 무엇을 자백하였다는 말입니까?”
국선변호인은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푹 쉬었다.
“ 내가 이 한건을 변론하여 국가로부터 받는 수수료는 겨우 몇만 원에 불과해요. 김해후 씨의 주장대로 무죄변론을 하려면 엄청난 시간과 수고가 필요한데 그 돈을 받고 내가 그렇게 노력해 줄 수가 없어요. 정, 그렇다면 내가 변론을 포기할 테니 사선 변호사를 선임하여 무죄주장을 하도록 하세요.”
감방장의 예측대로 어느덧 사건은 그렇게 배배꼬인 채로 흘러가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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