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창작문학예술인협의회/대한문인협회-수필

ㆍ작성자	권영심
ㆍ작성일	2021-09-19 19:42

ㆍIP: 58.xxx.93

기적시리즈

-기적-(3-2)

권영심

그 날도 그는 그녀의 창구에서 돈을 입금하고 보낼 곳에 보내면서, 사소한 일상 이야기를 나누고 사무실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누가 봐도, 멋진 옷을 차려입고 반짝 거리는 구두를 신고, 손가방도 그녀의 말 한 마디에 바꾼 그는 이제 어깨를 펴고 걷고 있었습니다.
자신을 위해 돈을 쓰는 것이 또 다른 즐거움이 된 것을, 어느새 즐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이런 변화를 가져다준 그녀에게 감사하기까지 했습니다.
사실 그녀는 그에게 바꾸라는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저 지나가는 말 처럼,
-아저씨는 옅은 회색의 셔츠에 짙은 회색의 양복이 참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사람은 구두를 좋은 것으로 신어야 한대요-
그렇게 웃으며 한 마디씩 아주 가끔 말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면 그는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하고 있었습니다.

좋은 옷과 구두와 여러가지들을 사무실 에 쌓아 놓을 수 없어 집을 샀고, 좋은 옷을 입고 아무데나 갈수 없어 수금원도 여럿 새로 채용했습니다.
사무실도 여러가지 집기들을 바꾸고 리모델링을 새로 했습니다.
좋은 옷을 입으니 웬지 아무 곳에서나 욕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 변화에 그녀는 사실 기여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답니다.
그저 언제나 깊은 보조개를 지으며 웃고 종알종알 이야기를 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는 그녀의 이름과, 여상을 졸업하고 은행원이 된지 3년이 된 것과, 남동생 둘과 시장에서 장사하는 엄마와 사는 것 외엔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아, 한 가지 더!
그녀가 옷을 매우 좋아하고 대학 의상학 과에 가고싶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지요.
...지금이라도 간다면 내가 보내줄 수 있는데...
그 생각도 마음속으로 했을뿐, 그는
어떤 것도 그녀에게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목소리에 심장이 뛰고, 깊은 보조개에 칼로 긋는 듯한 아픔을 느끼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이제 그도 압니다.
그러나 자신은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요 그녀는 이제 겨우 스물 하나...
절대 그래서는 안되는 것을 그는 스스로 알고 다그쳤습니다.
그저 볼수있는 것.
그녀를 보지못하는 일요일이 그에게는 세상에서 제일 싫은 날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그 날 말입니다.
은행에서 사무실로 돌아온 그는 통장들 을 챙기고 다시 한 번 장부를 점검하려 고 손가방을 열었지요.
한 웅큼 꺼낸 통장들의 하나에서 반으로 접은 쪽지가 책상에 떨어졌습니다.
그 순간 그의 심장이 무섭게 죄어왔습 니다.
그는 손까지 떨며 쪽지를 펼쳤습니다.
동글동글한 이쁜 글씨.
-아저씨 오늘이 제 생일이예요
근사한 저녁 한 번 사주시면 안돼요?-

그는 쪽지를 펴든 채로 그 글자를 눈에 넣을 듯이 노려보고 움직이지 못하고 부들 부들 떨기만 했습니다.
여직원이 노크를 하고 들어오려다가 황급히 도로 나가버릴 만큼 그의 얼굴은 무섭게 일그러져 있었답니다.
어느새 그는 흐느끼고 있었습니다.
훗날 사람들에게 그 이야기를 할 때 마다 그의 작은 눈은 촉촉히 젖고는 했답니다.
왜 그렇게 울었는지는 도대체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더랍니다.
그 밑의 글씨,
-만약에 허락하신다면 소공동 어디에서 몇 시까지 기다릴께요-
그는 쪽지를 아주 소중하게 지갑속에 넣고 시간이 가기를 기다렸습니다.
아직 열 한 시도 안되었고 시간은 너무나 더디 흘렀습니다.
그 사이에 그는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실수를 몇 번이나 했습니다.
이자가 밀려 원금 상환을 재촉하던 가내 공업 사장의 읍소하는 전화를 받고 기한 을 연장해주고 부도 위기에 처해 얼굴이 까맣게 되어 돈을 빌리러 온 사람에게 원하는 금액을 내주었습니다.
돈귀신은 절대 하지 않던 일이었지요.

그는 약속 시간보다 두 시간 일찍 나와 걸었습니다.
그러면서 차를 사야겠고 그보다 운전 면허를 따야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그의 사무실에서 소공동은 걸어서 삼 십여분이 걸리는 거리였습니다.
그는 생전 처음으로 화려한 윈도우의 여자 옷들을 보고 악세사리들을 보고 구두들을 보았습니다.
자신의 세상에는 절대 들어오지 못할 것 같은 그 모든 것들이 왠지 친근하게 느껴져 혼자 웃었습니다.
그는 보석상에 들어가 주인의 조언을 얻어 팔찌와 목걸이를 샀습니다.
그가 도착했을 때 그녀는 창가의 자리에 앉아있다가 일어서면서 그렇게 환하게 웃었습니다.
마치 온 세상에 불이 켜지는듯한, 그 웃음에 그의 심장이 또 사정없이 벌렁 거렸답니다.

-고마워요,
아저씨 , 생일인데 집에 들어가서 밥하 기가 싫었어요.
동생들은 라면이라도 끓여 먹으래죠 뭐,
아무도 제 생일을 몰라요.
아저씨라면 어쩐지 제게 맛있는 밥 한 끼는 사주실것 같았어요, 이건 비밀 이예요.
고객에게 이런 요구를 한 것이 발각되면 저는 은행에서 쫒겨나요.
전 쫒겨나면 안되거든요.
동생들을 공부시켜야 해요.
꼭 대학들을 보낼거예요.
함박스텍을 먹고 싶어요.
한 번도 안먹어 봤는데 이 집이 아주 잘한대요-
그녀는 그렇게 종알종알 이야기하며 계속 웃었고 그녀가 그렇게 웃게 하기 위해 그는 나라라도 팔고싶은 심정 이었답니다.

함박스텍이 나왔고 그렇게 두 사람은 똑같이 처음 먹어보는 음식을 어색하게 먹었습니다.
그리고 추워지는 밤거리를 걸었습니다.
그녀의 외투는 학생 때의 옷이었고 낡고 추워 보였지요.
그런데도 그녀는 연신 웃으며 자신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의 키는 작았기에 그녀보다 반 뼘 정도 커서 어둠 속에서 마치 다정한 연인처럼 보였습니다.
-...결혼은 안할래요.
동생들을 공부시키고 난 후 저는 꼭 프랑스 파리에 가서 의상 공부를 할거예요.
그것이 저의 꿈이예요.
십 년은 걸리겠지요?
그래도 꼭 파리에 가서 공부할거예요.
이제 여기서 버스타면 집에 가요.
오늘 정말 고맙습니다-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면서 그녀의 이야기도 끝났지요.
그는 외투의 호주머니에서 보석함을 꺼내어 그녀의 손에 가만히 놓았습니다.

보석함에서 반짝거리는 목걸이와 팔찌 를 꺼낸 그녀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습 니다.
그도 무어라고 할 말이 없었습니다.
버스가 오자 그녀는 휙 몸을 돌려 올라 타고 마치 거짓말 처럼 사라졌습니다.
그래도 그는 좋았습니다.
싫다고 하지않고 가지고 갔으니까요.
그녀의 쪽지가 시작된 것은 그 다음 날 부터 였습니다.
감사의 편지와 함께 그녀의 목과 손목 에서 반짝거리는 자신의 선물을 보았을 때, 그는 세상에 태어난 이후 처음으로 무언가에 감사했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기적시리즈

기적시리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