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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ple01_next.gif권영심 수필가 문학서재

ㆍ작성자 권영심
ㆍ작성일 2021-01-20 16:41
ㆍIP: 223.xxx.112
아버지의 글씨
아버지의 글씨

       권영심 ( 2021 , 1 , 20 )

아버지의 글씨 한 점을 남겨 놓지 못 한
것이 너무나 후회스럽고 마음이 찢기듯
이 아플 때가 있다
그렇게 남에게 많이 써 준 글씨를 정작 아버지는 집에 거의 남겨두지 않았다
가훈을 써서 벽에 붙여 놓긴 했으나
집에서 글씨를 쓰는 것은 드물었다
그러나 동네의 축문이며 경조사에 아버
지를 부르는 일은 너무나 많았고 그 글씨를 본 사람들은 감탄이 끊이지 않아
어린 마음에 참 자랑스러워 했었다
나도 글씨를 반듯하게 잘 쓰는 축에 속했는데 아버지는 펜으로 글씨 쓰기를
가르쳐 주었다
그런데 지금은 정말 마음먹고 쓰지 않으 면 내 글씨는 그야말로 항칠이 되기
십상이다
습작 시절을 오래 거치면서 떠오르는 것
을 공책에 쓰면서 점점 손은 빨라지고
글씨는 끝내 지렁이 춤 추는 것 처럼
변해 갔다

누구도 내 글씨를 읽지 못 했으나 나는
읽는데 전혀 불편이 없었고 공책 한 권
을 가득 메우고 난 뒤 한 번 읽고 태워
버리기를 얼마나 했는지...
어느새 일상에서 글을 쓰면 정자로 바로
쓰기에 불편할 지경이 되어 버렸다
지금은 독수리 타법으로 모바일로 모든
글을 쓰니 오히려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망막 출혈로 인한 눈의 불편만 아니라면
하루에 장편 한 편도 너끈히 쓰겠다
이제 나뿐만 아니라 손 글씨를 쓰는 일은 점차 사라지고 우리의 문자는 무엇
으로 변신할지 모르겠다
지금도 급속도로 무한 변신하고 있고
맞춤법이나 띄어 쓰기 등은 방송에서도
파괴된 지 오래다
아버지의 글씨가 생각난 것은 개인 서예 전의 초대를 받고 갈까말까 망설이면서
였다
국민학교 다닐 때 아버지는 교장실에
가끔 왔는데 긴 테이블에 하얀 종이를
펼쳐 놓고 글씨를 쓰는 모습을 보았다
큰 붓을 들고 한문을 거침없이 쓰는데
어린 눈에 보기에도 그렇게 멋있었다

그 때의 교장 선생님은 우리 아버지의
글씨를 얼마나 많이 간직한 것일까?
새학기가 되면 우리는 교과서를 새로 받
았는데 아버지는 반질거리는 누런 색의
종이로 책의 옷을 입혀 주었다
얼마나 단단하고 반듯하게 입혀 주었는
지 선생님이 감탄할 정도였다
그 겉면에 아버지는 국어 산수 도덕 등
과 함께 학년과 반, 이름을 정자로 써
주었는데 그림보다 아름다운 글씨였다
잘 쓴 글씨가 그림보다 아름답다는 것을
그 때 알았다
내 교과서를 들고 한 참이나 들여다 보면서 감탄하던 국사 선생님이 떠오른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잘 쓴 글씨를 참
좋아한다
서예는 할 줄 몰라도 보는 눈이 길러진
것은 그 때문이다
어떤 글씨체를 따지기 보다 마음에 얹히
듯이 닿게 되는 글씨가 있다

유려하고 능수능란하게 펼쳐진 솜씨도
좋지만 마치 내 마음인양 그렇게 닿아와
서 오래 머무르는 글씨를 가끔 만난다
그러면서 아버지의 글씨 한 본이라도
간수하지 못한 죄스러움에 몸둘 바를
모르겠다
아버지의 소천 한 참 후에 엄마에게 물었을 때 엄마는 다 태웠다고 잘라 말했다
그러나 그것이 거짓말임을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엄마는 아버지의 글씨를 모두
한꺼번에 접어 검은 가방안에 넣어 두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이북에서 넘어 올 때 가져 온
가방인데 땅문서며 여러가지 서류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그 가방을 열었을 때 엄청난 곰팡이와
함께 모든 종이들이 엉망이 되어 있었다
가방채로 그대로 불태워 아버지에게
보내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모든 것은 지나고 나면 후회하고 그 후회가 회한이 되어 이토록 심정을 비틀
리게 한다
서예전에 갈 것인지는 아직 미정이고
글씨들을 보고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서울까지 오고 가면서 여섯번의 차를 갈아 탈 일도 그렇고 코비드도 염려되지 않을 수가 없다
한 공간에 다섯 명만 입장 가능해서 시간을 예약해야 되는데 밍기적거리고
있다
머리속으로 떠오르는 글씨는 아버지의
글씨일까?
만약 그 시절로 다시 돌아 간다면 나는
서예를 배울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는데
어리석은 상념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지금 서예전에 가고싶은 것일까?
아니면 아버지가 보고싶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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