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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심 수필가 문학서재

ㆍ작성자	권영심
ㆍ작성일	2021-01-16 14:59

ㆍIP: 211.xxx.44

걸어야만 가는 곳, 그리고 쓰기

#권영심의글
걸어야만 가는 곳, 그리고 쓰기

권영심 ( 2021 , 1 , 16)

사람들이 나를 보면 운동은 전혀 못 하고 안 하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나는 나름대로 운동하고 하루에 만 보는 걷기 위해 노력한다
나는 운전 면허조차 없는 모태 뚜벅이
인데 빨리 걷기로 유명했었다
웬만한 남자들도 내 걸음을 따라잡지 못
했었는데 그렇게 빠르게 걷는 것이 나는
참 좋았다
삼 십리 길도 거뜬하게 걸었고 아들이 탄 유모차를 밀고 동대신동에서 영도 남
항동까지 걸어서 왕복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아들이 알수없는 소리를 지르면서 두 팔을 휘두르고 또 무언가를 보고 까르르
웃기도 하고 잠시 쉬면서 눈 맞추고 말
하는 것이 그렇게도 좋았다
아장아장 걷는 아들의 손을 잡고 대청로
를 따라 걸으며 헌 책방 골목을 샅샅이
뒤지던 걸음들도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소중한 행복이다

그 때 절실하게 알았다
죽을듯이 괴롭고 삶이 너무나 고통스러
워도 행복한 순간이 잠시라도 있다면
살 수 있는 것을.
뒤돌아 보니 나는 참 많이 걸었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 걸음들이 그나마 이렇게 아픈 중에도
나를 살렸다는 것을 말이다
앞으로도 걷고 또 걸을 것이며 걸으면서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 느낀 것을 글로
쓰면서 살아갈 것이다
무엇이든 느낀 것을 글로 표현하고 그 글이 나를 표현하며 그것이 나 자신이다
사람들은 나에게 어쩌면 그렇게 글을
맛깔나게 잘 쓰느냐고 하면서 소설을 써
보라고 말들을 한다
나는 세상에 내놓지 않았을 뿐이지 소설
을 수 백 편 썼다
그 소설들은 태어나자 마자 불태워져서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습작이어서 그럴 수도 있다고 하겠지만
오늘날 나는 내가 소설을 쓸 수 없음을
더욱 더 깨닫는다
소설을 쓴다면 내가 경험한, 나의 이야 기를 쓴 자전적 소설과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역사 소설뿐일 것이다
구성을 못 하고 인물들을 살리지 못 하고 내용을 연결하지 못 해서 등등...
소설을 쓰지 못 하는 이유는 많겠지만
나는 전혀 다른 이유로 못 쓰겠다
이것을 밝히면 웃음꺼리가 될지 모르겠 는데 나는 완전 행복주의자이기 때문에
소설을 못 쓴다고 스스로 결론을 내렸다
어떤 모티브에서 영감을 얻어 소설을 쓰
는데 나는 분명한 묘사와 똑 떨어지는
인물의 표현에 상황 전개도 멋들어지게
할수있다
그런데!!!

그것이 안 된다
주인공을 죽이는 것도 안 되고 불행한
고난에 휩쓸리게 만드는 것도 안 되고
악인을 만들어 내는 것도 안 되고 비참 한 정경을 그려내는 것도 안 되고...
소설 내용의 가장 중요한 과정을 전혀
그릴 수 없으니 무슨 소설이 되랴?
요즘 드라마나 소설을 읽으면 기괴한
인간상이 너무나 많아 기가 질리는데
그래야 인기몰이를 한다고 하니 나 같이
웃기는 행복주의자가 어떻게 소설을 쓸
수 있을까?
애저녁에 단념했다.
그렇다고 내가 천사같은 심성이어서 나
쁜 일을 쓰지도 못 한다면 그것은 새가
웃을 일이다
수 없이 시도를 해 보고 결론내린 것은, 나는 일종의 정신 질환에 속할 만큼의
불행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는
결론이다
불행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단적으로 말
했지만 나는 정신 질환이 아닐까 생각할
정도로 기피하는 것이 많다
피, 구타, 싸움, 동물, 상처...

이렇게 나열하면 그럴 수도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나는 정말 심각할 정도로 거부감을 느껴 영화나 드라마를 한 편도
온전히 보는 것이 없다
그래서 타인과 영화관을 가지 못 한다
어떤 장면을 못 보는가는 스토리 전개를
따라가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되고 예상한
장면이 나오기 전에 다른 채널로 돌리고
만다
요즘 인기 최고의 드라마 중에 딸이 욕망을 위해 아버지를 죽이는 장면이 나
오는데 그 아버지가 딸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거두고 빗 속에 밖을 나가는 순간, 나는 살인을 예감했었다
아버지가 계단을 내려가자 나는 채널을
또 돌리고 말았고 내 예감 그대로 진행 되었다
드라마 속의 가상이지만 자식이 욕망
때문에 아버지를 죽이다니...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런 일은 못 쓰고 그 어기찬 탐욕을 그려내지도 못
하겠다
그러니 나는 내가 걸어야 가듯이, 나의
것으로만 글을 쓰는 것으로 만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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