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일장 나들이

그토록 기승을 부리던 더위도 저만치 가고 추석 명절이 지나서 추분이 되고 보니 소슬바람이 귀밑을 스친다. 계절의 가고 옴은 참으로 명쾌하다. 올해는 추석이 이른 양력 9월 한중간에 위치한지라 햅쌀은 물론이고 대추나 밤은 다소 귀했던 명절이었다. 하긴 밤 줍기를 지역 이벤트로 내 걸고 진행한 어느 지자체는 묵은 밤을 구매하여 밤나무 밑에 뿌려 놓고 손님맞이를 했다고 한다.

이번 명절 전에도 나는 경기도 마석장과 성남에 위치한 모란 오일장 구경을 갔었다. 다른 어떤 시기보다도 추석 전 오일장은 가장 풍성하고 볼거리가 많으며 장 보는 사람도 많은 시기이다. 그 많은 인파에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면서도 중앙에 위치한 매대뿐만 아니라 시장 구석구석과 골목 끄트머리 할머니들이 텃밭에서 한 움큼씩 뜯어 온 푸성귀와 한 됫박 잡곡들까지 세세히 구경하는 재미는 시장 구경의 백미가 되었다. 더해서 각종 토속적인 먹거리와 맑은 술(소주) 한두 병은 장 구경의 덤으로 생각된다.

장날은 조선 시대 15세기 말 무렵부터 지역마다 10일에 한 번씩 서는 장시(시장)가 있었다고 하는데,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그 수가 증가하고, 열흘 간격이 닷새 간격으로 바뀌어 17세기 말부터 열리는 장이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는 설이 있으나 분명한 건 아닌 것 같다. 간격이 그렇게 바뀌게 된 것은 보부상들이 생산된 물품들을 무리 지어 혹은 개별적으로 지역을 정해놓고 짊어지고 다녔는데, 시장과 시장을 옮겨 다니는 알맞은 기간이 5일이어서 자연스레 그렇게 변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 시기부터 상업의 발달로 봇짐장수들이 활성화되면서 시장도 한층 더 성장하였다고 한다.

19세기 초반에 편찬된 ‘만기요람’에는 전국 팔도에 1,061개의 장이 섰었다고 하며, 그중에서도 경기도에는 광주 사평장(沙坪場)과 송파장(松坡場), 안성 읍내장(安城 邑內場), 교하 공릉장(交河 恭陵場), 충청도에는 은진 강경장(恩津 江景場)과 직산 덕평장(稷山 德坪場), 전라도에 전주 읍내장과 남원 읍내장, 강원도의 평창 대화장(平昌 大化場), 황해도의 토산 비천장(兎山 飛川場)과 황주 읍내장, 봉산 은파장(鳳山 銀波場), 경상도에는 창원 마산포장, 평안도의 박천 진두장(博川 津頭場), 함경도의 덕원 원산장(德源 元山場) 등이 가장 큰 장이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도시화와 산업화로 상설시장에 밀리고 더군다나 대형할인점들에 치여서 오일장이 많이 사라졌다.

오일장에는 민초들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고여 있어서 봉평장과 대화장이 나오는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이나 신경림의 시 ‘파장’ 등 여러 장르의 문학 단골 배경이나 모티브가 되기도 한다. 시는 물론 소설과 수필 등 문학작품의 단골 배경으로 장터가 나오는 이유는 아마도 장터가 지닌 뭔가 부족하고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에게 희미하지만 막연한 희망을 주던 진한 추억이 있기 때문이지 싶다.

나는 시간이 허락되는 대로 오일장 나들이를 자주 해서 경남 의령장, 전북 임실, 오수와 전남 벌교, 강진, 곡성, 그리고 경북 성주장 등 남도 오일장 나들이를 많이도 다니고 그 주변의 문학관이나 서원, 전시관 등을 여행한 이야기를 쓴 기행문도 10여 편 썼었다. (지금은 게을러서인지 기행문을 쓰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많이 다니다 보니 시장 나들이도 알차게 즐기는 몇 가지 요령이 생겼다. 그 요령을 소개하자면 볼거리가 가장 많고 풍성한 장날이 추석 전 10여 일 전후쯤이다. 명절이 지나서는 장날도 썰렁하다. 장 보는 손님도 뜸하고 따라서 장꾼들도 대부분 집에서 쉰다. 그중에서도 음력 설날 지나고 나서는 더욱 썰렁하고 볼거리가 없다. 구정쯤에는 항상 우리나라의 계절은 대부분 겨울인데, 한 번은 구정 지나고 일주일쯤 되었을 때 땅끝마을 해남 읍내장으로 나들이를 갔었다. 설날이 지난 장터에는 손님도 별로 없고 몇몇 상인들은 추위를 이기려 담요를 똘똘 말고 한껏 웅크리고 연탄불에 몸을 녹이며, 서울에서 온 나를 배부른 고양이 쥐 보듯 관심도 없었고 휑하니 뚫린 장터 하늘에는 스티로폼 박스 뚜껑이 겨울바람에 이리 날리고 저리 날리고 있었다.

장터 나들이를 나서기 전에는 항상 지자체 홈페이지를 확인하고 연계해서 주변의 서원이나 문학관, 명승고적을 검색하여 여행을 계획하고 떠나는 것이 좋다. 오일장 구경만으로는 2, 3시간이면 식사까지 마칠 수 있으니 멀리 떠나온 여행에서 다소 짧아 아쉬운데 주변의 코스를 돌아본다면 하루를 알차게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경남 의령 오일장을 간다면 주변의 홍의장군 유적이나 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의 생가 등을 연계하는 식이다. 미리 목적지 지자체 홈페이지를 검색해 계획을 세우고, 이메일로 여행자용 관광지도를 요청하면 2, 3일 내로 우편으로 받아 볼 수 있으며 여의치 않으면 그 지자체의 문화관광 담당자에게 전화로 요청할 수 있는데, 대부분 친절히 응답하고 도움을 준다. 더군다나 상설시장으로 바뀐 장터나 정읍 칠보장 같이 아예 없어진 오일장도 더러 있기 때문이다.

갑자기 길을 나서게 되었다면 그 지방 행정 관서를 방문하여 요청하면 담당자가 지도 및 자료를 잘 챙겨 주고 가고자 하는 유적지의 교통편도 세세히 알려준다. 만약 가는 날이 휴일이라도 걱정이 없다. 그럴 때는 당직 공무원이 친절히 응대해 주기 때문이다. 지방 여행길에는 가끔은 뜻하지 않은 친절을 받기도 하는데, 오수에서는 지나가시던 어르신의 스쿠터 짐칸을 얻어 타고 목적지까지 가면서 그 마을의 유래를 설명 듣기도 했다. 어느 지방이나 그분들이 사는 마을을 관광한다고 하면 하나같이 모두 친절을 베풀어 주신다.

지방의 시내, 혹은 군내버스는 손님의 많고 적음에 따라 운행시간을 연착도 하지만 출발 시각 전에 미리 떠나기도 하니 시간표는 꼭 믿을 게 못 된다. 한 번은 강진 버스터미널에 도착하여 다산초당 방향으로 가는 버스 시간표를 확인하니 두 시간여의 여유가 있어 강진 오일장을 느긋이 구경하고 점심을 마치고 터미널로 시간표보다 10분 정도 일찍 들어와서 버스를 기다렸는데, 도무지 버스가 들어오지 않았다. ‘조금 늦겠지.’ 생각하며 기다리다 20여 분이 지나도 버스가 들어오지 않기에 불안해서 매표소에 물어보니 직원이 정말 미안한 얼굴로 그 버스는 예정된 시간보다 20여 분 가까이 일찍 들어와서 5분 정도 기다리다 먼저 출발했다는 것이다. 허탈한 마음으로 할 수 없이 택시를 불러 행선지까지 갔다가 왔었다. 사실 오일장이나 인근의 여행은 택시를 타고 단시간에 여행하는 것보다 시골버스를 타고 차창의 들녘을 바라보며 여유를 부리는 것도 참 여행의 하나인 것인데, 무척 아쉬웠었다. 농어촌 여행은 그런 경우가 왕왕 있으니 오일장 나들이는 항상 여유롭게 시간을 준비하고 교통편의 시간표 정보를 숙지하여 기다리는 시간을 최대한 줄여서 알차게 하여야 한다. 시장에서 식사할 때도 그곳 상인들이나 공무원 등 현지 사람들에게 맛집을 물어봐서 찾아가는 게 가장 실망이 적은 식사를 할 수 있다. 그도 아니면 시장 장터의 국밥에 그 지방 막걸리 한 병이면 무난할 것이다.

요즘 같은 백세시대에는 생업전선에서 은퇴 후 잘 즐기며(놀며) 사는 일이 또한 중요하다. 나날이 할 일이 없이 무료하다면 그것도 우울증이나 치매로 가는 매개가 될 것이다. 그래서 더 오일장 나들이를 권하고 싶다. 교통비에 저렴한 식사와 약간의 주대면 며칠의 무미건조를 달랠 수 있다. 그래서 수도권의 일부 어르신들은 온양 장날에 맞춰 나들이하는데, 전철은 경로 우대증으로 무료고 온천욕도 경로우대로 반값이라 하니 왕복 시간을 쾌적한 전철로 이동하고 장터 구경과 저렴한 가격의 온천욕을 즐길 수 있어서 일 만원 내외의 저렴한 인기 코스라고 한다.

끝으로 그 지방 장 구경을 했으면 잡, 곡식이나 제철 나물, 또는 약초 등 적어도 기만 원의 장을 봐서 그냥 구경만 하고 오지 않는 자그마한 예의를 지켰으면 한다. 장터의 방풍나물, 고들빼기, 원추리 같은 나물이나 완두콩, 서리태, 팥이나 수수 같은 각종 곡식, 또는 우슬, 사철쑥, 겨우살이 같은 약초들은 서민들에게도 부담이 없는 가격이니 한두 봉지쯤 팔아주는 센스가 필요하다.

4계절 중에 오일장 참 나들이 적기를 꼽으라면 단연 이 계절 가을을 꼽을 수 있다. 오곡백과가 익어가고 가을걷이로 곳간이 넘쳐나는 이 시기에는 자연산 능이, 싸리, 느타리버섯 등을 구매하여 즉석에서 만들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재래시장표 두부 한 모 사다가 버섯두부전골에 사랑하는 가족들과 가을의 하루를 보낸다면 이보다 더 좋은 저녁 식사는 없을 것이라 자신하며 권해본다. 나도 이 계절을 놓칠 수 없어 다음 달 7일에는 기찻길 밑에 서는 남춘천역 인근의 춘천 풍물오일장에 가 보려고 계획하고 있다.

다음은 내가 항상 수첩에 적어 놓고 다니며 오일장 나들이를 계획하는 장터 날짜 정보인데, 그동안 발품 팔아서 얻은 정보도 많지만, 대부분은 ‘전국오일장연합회’ 홈페이지 등 인터넷 검색으로 얻은 정보들이다.

2016년 9월 22일 추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