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창작문학예술인협의회/대한문인협회-수필

ㆍ작성자	최옥희
ㆍ작성일	2005-10-08 0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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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여행
시간여행

이른 아침 봄 햇살을 받으며 통근형 기차를 타면 창문너머로 자연이 만든 원형 그대로의 경치가 마음까지 들어와 스며든다.
지나는 길에 어쩌다 저수지라도 보일라치면 곧이어 저수지 물위로 쏟아지는 빛이 반사되어, 그 빛을 마저 다 담지도 못한 채 벌써 눈은 반쯤 잠긴 실눈이 된다.
때 이른 봄인가 했더니 어느새 여름의 문턱이 산골짝에서 더운 손짓을 해댄다.
잎보다 꽃을 먼저 피워 봄을 알리던 하얀 백목련은 벌써 어른 손바닥만한 잎으로 뒤덮힌 채,하얀 자태를 뽐내던 그 목련이 맞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로 푸르러 있다.
목련이 이러니 다른 잎들이야 두말할 나위가 없다.
철컥철컥거리며 달리는 기찻길 옆으로 누군가 심어놓았는지 노란 꽃길이 계속 이어져 온다. 사람의 발길이 제일 닿지 않는 곳이 철길 옆인데 누구의 손길이 저리도 예쁘게 치장을 해놨을까! 가끔은 보라색의 붓꽃과 한데 어울려도 피어있는데 그 모습이 과히 봄의 요정이 살아갈 듯한 숨막힘을 느끼게도 해준다.

한 이십여분을 달렸을까. 작은 시골마을이 보이기 시작한다.
집집마다 피어있는 장미넝쿨이 빨간 송이로 탐스러움을 뿜어내고 있다.
일찍부터 밭으로 간 주인을 대신해 하얀 진돗개 한 마리가 마당을 어슬렁거리다 땅에 코를 박고는 킁킁거린다.
시내에서 꽤 멀리 떨어진 작은 마을이라 그런지 그 흔한 유선방송은 들어오지 않는 것 같다. 지붕마다 둥그런 비행접시를 붙여 놓은 모양새가 요즘 tv에서 한참 인기를 모으고 있는 그 스카이라이프 접시인가 보다. 햇볕이 비추일 때마다 여기저기 지붕위에서 반짝반짝 햇살이 춤을 추는 듯하다.
또 그렇게 한참을 지나자 넓은 들판이 펼쳐진다. 반듯반듯한 논들은 이미 물이 들어차 있고 벌써 반은 모내기를 끝낸 논들이 보인다. 물위로 뾰족하니 연녹색 잎사귀들이 줄을 맞춰 늘어서 있다.
반듯하니 정리가 잘된 논을 보면서 문득 어린 시절 논두렁을 뛰어다니며 아버지를 부르던, 또 그 길을 따라 새참바구니를 들고 걸어오시던 어머니가 떠오른다.
날이 새기 무섭게 밭으로 논으로 일 나가시던 부모님...

부모님은 그 당시 나이로는 좀 많은 서른하나, 스물넷에 결혼을 하셨다.
결혼 후 어머니는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만 할머니의 미움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부모자식간의 정이 어디 그리 쉽게 사라지는것인가.
결혼은 했어도 할머니의 미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지만 부모님은 결혼한 그때부터 시내로 이사를 간 큰집을 대신해 할머니를 모셔야 했고 할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땅마지기를 모두 장남에게 주고 싶어 했던 할머니의 욕심 때문에 변변한 땅 한평 얻어들이지 못하고 큰댁 농사를 대신 지어야 했다. 그러나 그것도 가을걷이가 끝날 무렵 예고도 없이 한밤중에 들이닥친 큰아버지댁 때문에 한 여름 내내 농사지은 곡식알갱이 하나 가져나오지 못한 채로 쫒겨 나야만 했다고 한다.요즘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임에 분명하다.
요즘도 이 이야기를 할 때면 어머니의 눈에는 그때의 서러움이 울컥하시는지 눈물을 글썽거리시며 우신다.

그렇게 쫒겨난 후 부모님은 그 서러운 한을 내 땅 하나 가지는 것으로 풀려는지 닥치는 대로 일을 하기 시작하셨다.
산골짝 마른 땅이 있으면 돌을 치우고 흙을 골라 고추를 심었고 도회지로 주인이 이사를 가며 휴작하는 논이 있을라치면 그건 으레 아버지의 몫으로 되돌렸다.
그렇게 악착같이 일을 한 덕분인지 내가 집안 사정을 알 수 있을 나이가 됐을 때 아버지는 작은 동네였지만 제법 부자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계속되는 할머니의 구박에 아들하나만 낳으면 좀 덜하실려나 생각에서인지 어머니는 아들 하나 볼 욕심을 멈추지 않으셨고 그로인해 우리집은 딸이 여섯이나 늘어나 있었다.

처음으로 아버지를 따라 논으로 갔던게 언니가 국민학교 3학년 내가 1학년 때 였던 것 같다. 그해 아버지는 큰길 옆으로 꽤 큰 논을 하나 사셨다.
영농후계자인가 뭔가를 하셨던 것 같은데 아무튼 그 논에다 남들은 시도조차 하지 않던 딸기를 심으셨다. 그 당시 산골에서 딸기를 구경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우리집만해도 그 전까지는 집 뒷곁에다 만들어놓은 작은 정원에 딱 한 그루를 심어놓고 키웠을 뿐이었었다.
그런 아버지가 무슨 생각으로 그 큰 논에다 딸기를 심으셨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여름이 지나자 그 논에는 빨간 딸기들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확을 다 끝마칠때까지 밤만 되면 아버지는 딸기 서리 오는 놈들을 잡는다며 새벽이 되기 전까지는 집으로 돌아오시지 않으셨다.
그 논에서 제일 처음으로 한 일이 딸기 수확이었고 내 손으로 처음 딴 그 탐스럽던 딸기는 파란 플라스틱 양동이에 담겨져 학교선생님들께 전해졌다. 첫 수확은 고마운분들께 먼저 보내야 한다는 게 아버지 생각이셨기 때문이었다.
삼도봉 밑 산골마을 학교로 온 이후로 이런 딸기는 처음이라며 좋아하시던 선생님 얼굴이 아직도 기억난다.
논과의 인연은 그렇게 해서 시작이 되었다.
그 이후로 그 논에선 몇백 포대가 넘는 양파가 나와 고등학교를 들어간 언니 공납금으로도 들어가고 누런 황소도 한 마리 사들였다.
양파 수확이 끝나기 무섭게 물이 들어찬 논에는 벼가 자라기 시작했다.

처음 모내기를 했던 것이 초등학교 4학년 때로 기억이 된다.
아들하나 없던 아버지는 그 많은 농사를 포기할 수 없어 좀 컸다는 우리 딸들을 하나둘 씩 논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요즘도 그렇지만 예전에도 모내기는 온 동네를 제일 바쁘게 만들었고 놀고 있는 애기 손가락이라도 빌려야 할 판이라며 일손부족을 걱정하셨다.
무릎 위까지 파란 체육복을 둥둥 걷어 올리고는 아버지에게 모심는 요령을 처음으로 배웠다.
‘검지와 중지 두개의 손가락을 펴서 그 위에다 다섯에서 여섯 가닥의 어린모를 잡고 하얀 뿌리만 흙속에다 살짝 옆으로 밀 듯이 꼽아야만 한다.’
처음엔 너무 꺾은 나머지 어린모들이 허리가 꺾여 못쓰는 것도 많았지만 숙달이 된 후에는 왠만한 어른들만큼 한다며 나중엔 트랙터가 들어가지 않는 논은 으레 식구들이 총 출동해 뚝딱 모내기를 해치워 버렸다.

모내기를 하려면 아버지는 제일 먼저 꾸불꾸불한 논두렁을 돋우는 일을 하셨다.
작년에 만들어둔 것은 일년 내내 밟고 다녀 그 턱이 낮아지고 군데군데 파여서 여름 장마라도 날라치면 논두렁에 구멍이 생긴다는 것이었다.
축축한 흙으로 논두렁에 둥근 둔턱을 만들고 삽으로 탁탁 치며 쌓아올렸다. 그리고 하루가 지나면 그 논두렁은 이 논에서 저 논으로 옮겨 다니는 길이 되었다.
논두렁 옆으로 사람의 발이 닿지 않는 곳에는 어머니가 콩을 심으셨다. 다 익으면 노랗고 동글동글한 작은 콩이 열렸는데 어머니는 그렇게 심어놓은 것이 시장에 나가서 팔면 무공해라 꽤 두둑한 값을 쳐준다며 콩이 다 익을 때까지 애지중지 키우시곤 하셨다.

이렇게 나의 어린시절은 시골풍경을 가슴에 담는 일로도 한가득 배부름을 자아내게 한다.
그런데 지금의 논들은 그 예전처럼 둥그런 논두렁을 가지고 있지를 않다. 그래서 그런지 그곳에서 수확을 기다리는 콩 또한 보이지 않는다.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작은 그릇들이며 식구들 옷가지들을 채워주던 일명 콩나무는 한참을 달리는 이 기차에서 바라다보아도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다.
눈 안에 들어오는 차창에 스치는 풍경을 바라보며 가슴에 작은 서글픔을 애써 밀어낸다.
어린시절 그렇게 부모님들의 사랑으로 먹어 들인 쌀이며 콩이며 딸기들이 지금 내 삶의 원동력이자 글들의 표식이 되어 가끔씩 삶이 허전해질 때면 다시금 마음으로 찾아들어와 내 양식이 되어주는 듯하다.

어느덧 기차는 도시를 들어선다.
지금까지 흘리듯 봐온 풍경과는 또 다른 이제는 더 익숙해져버린 도시의 풍경들이 딱딱한 콘크리트 벽 속에 점령당해버린 듯하다.
옆으로 ‘휘릭’ 고속전철 한대가 빠른 속도로 지나간다.
세월이 누구보다 먼저 고속 전철을 탔는지 눈 깜빡할 사이에 시간을 꿀꺽 삼킨다.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낭낭한 여자의 목소리에서 종착역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온다.
종착역에서는 또 하루의 내 새로운 삶 한토막이 열리려 하고 기차는 천천히 플랫폼으로 나를 밀어내고 있다.

- 어느 초 여름날 기차안에서...

설동필: 최옥희 선생님,안녕하세요 -[10/09-23:39]-

설동필: 마치 제가 어렸을 때 시골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 놓은것 같아 동심에 머물러 봅니다
열차를 타고 지나다 보면 이제 갓 모내기 한 논에서 백로가 길다란 부리와 철사 꼬챙이 처럼 가늘은 다리로 성큼성큼 논바닥을 두리번 거리면서 논고동 잡아 먹는 풍경도 일품이지요'.좋은 시간 머물다 갑니다 -[10/09-23:46]-

아버지의 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