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창작문학예술인협의회/대한문인협회-수필

ㆍ작성자	김복희
ㆍ작성일	2020-09-19 11:17

ㆍIP: 121.xxx.107

꽃길

4월 초 이른 새벽 산책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데 천변에 화사하게 핀 벚꽃이 나를 유혹한다. 뒷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핸드폰을 꺼내 한 컷 담는 데 옆을 지나가던 아가씨도 한 컷 실례를 한다. 아마 사람의 마음은 늙으나 젊으나 다 똑같은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활짝 핀 벚꽃을 넋 놓고 바라보다가 문득 자연의 아름다움이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저렇게 아름답게 핀 벚꽃이 며칠이나 갈까 하는 생각 속에 지난날 내 모습이 떠오른다.

벚꽃의 화사함을 느끼면서 자연의 사계절을 생각해 보니 어쩌면 우리네 인생살이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봄에 새로 움트는 새싹 모습은 고사리손 같은 아이의 앙증맞은 모습이요, 나뭇가지마다 푸릇푸릇 돋아나는 실록은 천진난만한 유년기 모습이고, 싱그럽게 우거진 실록은 꿈만은 청소년기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그리고 짙푸른 녹음은 힘이 넘치는 청년기요, 누릇누릇 익어가는 가을의 모습은 세상 물정 다 파악한 장년기의 모습 같았다. 그러다 보니 을씨년스런 겨울은 해 저물어 가는 저녁노을 같은 내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자 씁쓸한 미소를 짓게 한다.

자연의 아름다움에 취하다 보니 지난날의 나의 모습이 떠오른다. 아무런 생각 없이 철모르고 나대던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이 내 인생의 봄이라는 생각을 하니 그리 아름다운 추억이 되지 못했다. 6·25의 쓰라린 상처 속에서 보낸 초등학교 시절이나 가난에 허덕이며 살았던 청소년기가 모두 가슴앓이하던 추억으로 남아있다.

나의 소년기는, 봄날처럼 화사하여 살겠다고 생각하면 갑자기 북풍에 휘몰아치는 눈보라와 한파가 오고 가는 2월이나 3월같이 불안한 소년기로 기억되었다. 생활이 어려워 부모님이나 이웃들의 눈치를 살피며 기를 펴지 못하고 학교에서도 친구의 눈치를 살피며 살아온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러다 사회가 발전하면서 운 좋게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진학하면서 책을 좋아하게 되면서, 사고 의식이 점점 넓어지자 내 인생의 꽃을 피우기 위하여 욕망을 부려보던 청년기로 자연으로 말하면 4~5월이 아니었나 생각이 들었다. 어려운 생활이었지만 남들이 부러워하던 대학이란 문턱도 넘어보고 오로지 내 꿈만을 위하여 열심히 공부하던 시절도 있었으니 얼마나 축복받은 생활이었나 싶었다.

그러다 취업을 하여 내 마음껏 교단에서 누렸던 행복은 녹음이 우거진 6, 7, 8월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사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넘나들면서 나에게 주어진 일들을 책임감 있게 욕심을 부리며 학생을 지도할 때는 아무런 고민이 없었다. 학교에서는 학생들로부터 인기투표에서 제일 높다는 소문이 들려오고 내가 가르치던 과목은 학력고사에서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많지 않은 월급이지만 돈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가정을 꾸려나가면서 알뜰한 집사람의 살림 수단으로 재산도 조금씩 부풀려 가던 시절은 분명 한여름의 우거진 녹음의 계절이 아니었던가?

이렇게 짙푸르던 녹음이 결실을 보아 풍성한 가을을 맞이하는 것이 아닌가? 나에게도 남보다 몇 년이나 늦게 시작한 교직 생활이었지만, 교감도 하고 교장도 했다. 그리고 아이들도 다 출가하여 자녀를 두고 잘살고 있으니 결실의 계절인 가을의 아름다운 단풍보다도 더 아름다운 내 장년의 삶이라고 자부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이렇게 허풍을 떨고 있지만, 자연의 아름다운 단풍 속에서도 제대로 물들이지 못하고 낙엽이 지는 잎사귀가 있듯 나에게도 전혀 아픔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가을이 지나면 모든 것을 벗어버린 앙상한 나무와 같이 나에게도 사회의 모든 책임을 벗어 버리고 이제는 새로운 세계로 가기 위한 준비로 수양을 쌓기 위해 고독을 즐기며 혼자의 세계를 외롭지 않게 살려고 오늘도 자연을 벗 삼아 산책을 즐기는 것이다. 누구를 의식할 필요도 없고 무엇을 두려워할 것도 없으니 눈길 닫는 대로 바라보고 보이는 대로 생각하며 지난날을 회상해 보면서 살아가는 내 모습이 휘몰아치는 강풍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겨울의 고목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내가 살아온 지난날을 회상해 보니 봄날에 활짝 핀 벚꽃같이 화려했던 시절이 곳곳에 숨어있다는 것을 느끼게 했다. 초등학교 6학년 시절, 중학교에 가고자 할 때 남들의 비웃음을 받고 살던 내가 당당히 높은 경쟁률 속에 치른 입학시험에 합격하여 중학교 현관에 붙어있던 합격자 명단의 내 이름을 보고 좋아서 껑충껑충 뛰며 냇물을 건너뛰던 그 기쁨은 지금도 가슴을 설레게 하는 감동으로 남아있다. 그 후 어렵게 몇 년을 거친 노력 끝에 들어간 대학 생활은 내 인생의 꽃길의 시작이 아니었던가?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꽃길은 교사 시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은 나이 30대 초반으로 속초에 있는 여자고등학교에서 근무할 때가 눈앞에 활짝 핀 벚꽃같이 화려했던 것 같았다. 가정을 예쁘게 꾸려주는 현모양처와 유년기의 세 딸 재롱을 바라보며 아담한 연립주택에서 아무런 근심 걱정 없이 살았던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에서는 담임 중의 담임이라고 하는 고등학교 3학년 담임에다 나이 어린 부장이란 직책까지 맡고 있었으니 더 부러울 것이 무엇이었겠는가? 학교에 출근하면 착하고 예쁜 학생들이 잘 따라 주고 집에 오면 귀여운 딸들의 재롱 속에 하늘 같이 받들어 주는 집사람이 있었으니 몸은 조금 고되고 업무는 많았지만 아무런 고민이 없는 생활이었으니 이보다 더한 행복은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활짝 핀 벚꽃에 취해 아름다웠던 지난날을 추억하며 지금의 나를 되돌아보니 아무런 근심 걱정이 없다. 자연을 벗 삼아 이야기하고 노래하며 사는 이 순간이 활짝 핀 벚꽃만큼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사는 내가 아닐까? 행복이란 바로 지금처럼 근심 걱정 없는 인생의 꽃길을 걷고 있는 내 생활이라는 생각에 미소를 지어본다.

고난과 근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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