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영 애

    “다리가 아파서 그런데 좀 앉아도 될까요?” 그녀가 말했다. 나는 “어, 그래요? 여기는 입구니까 저기 옆에 가서 앉으면 되겠어요.” 하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이제 막 만나서 간이 테이블을 마련해놓고 겨우 인사만 나누었기 때문이었다. 예전부터 알고 지내오던 사이이기는 하지만 둘이 대화를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부끄러운 듯 아니면 쑥스러운 듯 의자 하나를 끌고 구석에 가서 앉았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드나드는 입구에 있어서인가 오래 앉아있지를 못했다. 어느 출판기념회에 초대받아서 간 자리에서였다. 그녀와 나는 방문객을 맞이하는 입구에 서 있었다.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가 생각이 났다. 싱그러웠다. 그녀는 살갑고 친근했다. 소개해 준 선배는 너무 예쁜 친구라고만 했다. 별다른 대화가 오가지는 않았으나 어쩌다가 눈이라도 마주치면 그녀는 사람 좋은 표정으로 빙그레 웃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아 왔다는 듯한 친근함이 전해왔다. 함께 자리를 한 사람들과 연배가 한참 차이가 나서 이 모임이 낯설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많은 사람 속에서 자연스럽게 익숙한 듯 흡수되고 있었다. 매사에 수동적인 나와 다르게 그녀는 능동적으로 보였다.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주며 긍정의 표시를 했다. 간혹 상대방의 말이 공감된다 싶으면 혼자 빙그레 웃으면서 ‘맞아요. 그렇죠. 제 생각도 그래요.’ 하는 듯 공감을 표현해 주었다. 몇 번 만나지는 않았으나 만날 때마다 선배는 그녀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였던가. 그녀에게 자꾸만 관심이 갔다. 나와 비슷한 듯 아닌 듯. 그녀에 대한 얘기나 글들이 눈에 들어왔다. 자극적이지 않은 글. 편안해 보이는 글. 그러다가 그녀가 베이비시터 자격증을 받았음도 알게 되었다. 아기를 돌보는 일을 하겠구나! 짐작했다. 세상과 계산하지 않는 아이들을 안고 있을 그녀를 생각했다. 

  그녀는 그렇게 부드럽게 스며들고 있었다. 마음속에 깊은 우물 하나 자리하고 있다는 듯이. 수줍은 듯 은근슬쩍 보이는 미소와 용기. 타인이 보는 나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던 어느 글귀가 생각이 났다. 그녀는 조용했지만, 자신감에 차 있었다. 방명록에 이름을 적어야겠다고 말했다. 내 이름을 적은 다음 그녀의 이름도 적어줄까 하다가 성이 얼른 생각이 나지 않아서 그녀가 적도록 돌려주었다. 그 순간 나는 보았다. 볼펜을 잡는 데 불편해하는 손을. 줄과 간격을 무시한 듯한 글씨. 나는 순간 좀 멍해졌다. 그 상황을 그냥 자연스럽게 바라보지 못하고 색안경을 쓴 듯이 바라보고 있는 나 자신을 보았다. 그러면서 나는 그녀를 다시 보게 되었다. 그러자 눈에 들어오던 그녀의 불편한 걸음걸이. 그런데도 그렇게 말간 미소를 보일 수가 있다니. 어쩌면 그동안 살아오면서 세상의 편견과 맞서서 마음의 근육을 단련시키며 살아왔겠지. 누구나 잠재적인 장애를 갖고 산다고 나는 이론으로만 배웠나 보다. 편견과 색안경을 쓰고 바라보는 그런 얄팍한 사람은 되지 말아야지 했던 다짐도 다 소용없었다. 그래서 다리가 아프다고 했던 것을 나는 몰랐구나! 자책했다. 

  몇 해 전에 삼성동 정애학교에서 장애우들의 현장 체험학습에 일대일 교사로 봉사활동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중학교 1학년 여학생과 동행했다. 그 학생은 몸이 불편해서 입안의 침이 그냥 흐르기 때문에 수시로 손수건으로 닦아야 했다. 그러면서 나에게 미안하고 고맙다고 했다. 나는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 여학생은 자기의 부모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하면서 자기의 손을 잡고 동행해 주는 선생님께 폐를 끼치면 안 된다는 거였다. 마치 딸 같은 그 여학생에게 말했다. “사람 사는 건 다 비슷해. 나도 누군가의 이해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고. 도움을 받기도 하지. 우리는 그냥 조금 다른 것 같지만 또 다 비슷해” 그 여학생은 나와 헤어지면서 악수를 청했다. 물론 비누로 손을 깨끗이 씻었다는 말과 함께. 나는 그 학생을 안아주면서 세상은 그래도 따뜻한 사람들이 더 많다고 말해 주었다. 정애학교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동정이나 마음 아픈 시선을 보내면 안 된다고 하셨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일들. 다 안다고 생각했던 일들. 그러나 정작 그 순간을 맞닥뜨리자 당연해지지 않던 현실. 

  그날 출판기념회에서 만난 그녀는 몇 해 전 내가 정애학교에서 동행했던 여학생을 떠올리게 해주었다. 정작 그 들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어이없게도 나는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해 주어야 한다고 오만을 떨었다. 속을 들킨 것 같아서 부끄러웠다. 다리가 아프다는 그녀에게 새삼스레 의자를 권한다는 게 어쩐지 속 보이는 짓인 것만 같았다. 나는 슬그머니 의자를 두 개 갖고 와서 그녀에게 함께 앉자고 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