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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연 수필가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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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ㆍ작성자 |
이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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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ㆍ작성일 |
2019-06-19 20: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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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버 스
이 정연
볕 좋은날 오후에 버스를 탔다. 나는 지하철 보다는 버스를 자주 이용한다. 빠르고 쾌적한 지하철이 편하긴 하지만 깜깜한 터널 안을 쏜살같이 달릴 때면 나도 모르게 뭔가에 쫓기는 듯한 느낌이 든다. 느리고 게으른 내 성격에는 조금 일찍 나서서 버스를 타는 게 마음이 편하다. 생김새와 기능이 각기 다른 차들과 나란히 속도를 맞추고, 정류장마다 타고 내리는 사람들의 분주한 모습도 생기가 있어 좋다. 간혹 난폭운전을 하는 기사를 만나는 날은 불안하기 짝이 없다. 오래 살고 싶다는 마음보다 건강하게 살다가 옛 어르신들 말씀처럼 자는 잠에 이 세상을 떠나길 소원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제법 긴 시간 타고 가다보면 버스 안에 우리네 살이의 오만가지 상이 다 보이면서 떠오르는 추억은 덤으로 주어지는 선물이다.
가슴에 하얀 손수건 달고 초등학교 입학하고 난 후의 일이다. 학교에서 집까지는 직선거리로 2㎞쯤 된다. 입학 후 선배들로부터 배우는 것은 공부가 아니었다. 공깃돌 놀이. 고무줄놀이. 바닥에 오징어 그림을 그리고 빵떡 같은 돌을 차고 노는 오징어 놀이, 먹을 수 있는 꽃과 풀, 독이 있는 꽃과 풀을 구별하는 법 등을 배우면서 집으로 오는 길은 더없이 즐거운 시간이었다. 산에 올라 진달래꽃을 잔뜩 따서 먹은 후 꽃 한아름 꺽어 안고 버스정류장으로 향한다. 버스는 중. 고등학생 등. 하교 시간과 장날, 주말 막차를 제외하면 거의 빈차로 달렸다. 짧은 단발머리에 볕에 그을려서 까무잡잡한 얼굴, 진달래 물이 들어 검푸른 입술의 친구들이 버스가 도착하길 기다린다. 나와 친구 모두 버스비가 한 푼도 없지만 버스를 타고 싶은 간절함으로 도전해 보는 것이다. 이런 일 역시 선배들한테서 배웠다. 버스가 도착하고 안내양이 문을 열면 우리는 기사 아저씨를 향해 한아름의 진달래꽃을 말없이 내밀면서 애절한 눈빛으로 “제발 저희를 태워 주십시오.”라고 속으로 간절히 기도한다. 매번 소원이 성취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가끔 마음씨 착한 분은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신다. 그때의 기쁨을 떠올리면서 혼자 웃기도 하다보면 눈 깜짝할 사이 버스가 목적지에 도착한다.
나는 평소 밖에 나갈 때 이어폰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 어딜 가나 복잡한데 이어폰을 귀에 꼽고 있으면 소음들과 휴대전화의 소리기 뒤섞여 머리가 복잡해진다. 차라리 소음 같은 세상 소리를 듣는 게 좋다. 실제로 이어폰을 끼고 횡단보도나 도로를 건널 때와, 인도와 차도의 구분이 없는 좁은 길을 걸을 때는 찻소리를 듣지 못해 매우 위험하다고 한다. 꼭 필요한 경우 한쪽만 끼는 게 좋다는 기사는 쉽게 볼 수 있다. 오늘 만큼은 꼭 들어야될게 있어서 이어폰을 한 쪽 귀에만 꼽고 버스에 올라 멍하게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괜히 싸늘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돌려보니 내 옆에 할아버지 한분이 서 계셨고 몇 사람이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얼른 일어나서 자리를 양보했다. 할아버지는 괜찮다고 사양하면서 앉으셨다. 점잖으신 분이다. 간혹 연세도 그리 많아 보이지 않은 사람이 자리 양보를 받지 못하면 요즘 젊은이들은 예의가 없다며 큰소리로 말하는 경우가 있다. 눈살이 절로 찌푸려진다.
몇 정거장을 지나자 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딸과 엄마가 탔다. 빈자리를 발견한 엄마가 잽싸게 앉더니 아이를 앞에다 앉혔다. 그리고 전화기를 꺼내들고 통화를 시작했다. 다른 사람이 듣건 말건 개의치 않은 채 수다 삼매경이다. 엄마 앞에 겨우 엉덩이만 걸친 아이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걱정되었던지 손가락을 엄마 입에 가져다 대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한다. 엄마는 아이의 손을 잠결인 듯 쓸어내린다. 아이가 같은 동작을 반복하자 엄마는 파리나 모기를 잡는 시늉으로 아이의 손등을 찰싹 친다. 엄마와 낯선 사람들을 번갈아 쳐다보며 마음 졸이던 아이의 얼굴이 떠올라 오늘은 기분은 별로 좋지 못했다.
볼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습관처럼 휴대전화를 꺼내들고 검색을 했는데 조금 전 아이의 안타까운 얼굴을 싹 가시게 하는 기사가 있었다. 대구에서 한 할머니가 체중의 두세 배가 넘는 폐지를 손수레에 실어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다. 초록신호가 끝나고 빨간 신호가 켜졌지만 할머니는 아직도 횡단보도를 건너지 못하고 도로 중앙에서 힘들어하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본 시내버스 기사가 손님들에게 양해를 구한 다음 버스에서 내려 할머니에게 달려가서 손수레를 밀어 안전하게 인도위로 안내한 뒤 버스에 올랐다. 손님들은 기사에게 박수를 보냈다. 승객이 촬영해서 인터넷에 올린 글이다. 이 글을 읽는 것만으로 오늘은 행복한 날이다. 나는 또 피식 웃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맑았던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면서 비가 내린다. 제법 굵은 빗방울이 창문을 사정없이 때린다. 비 한 방울 맞지 않고 비를 실컷 보는 일 또한 버스타는 즐거움 중의 하나이다. 우산을 쓴 길손들의 모습도 참 여러 가지다. 바람이 등 뒤에서 불어 우산이 뒤집히자 몸의 방향을 바꾸어 우산을 바로하고, 또 뒤집히고, 또 바로하기를 반복하며 걷는 사람, 비를 맞고 서서 뒤집힌 우산을 손으로 바로잡는 사람, 아예 뒤집힌 채로 쓰고 가는 사람 모두 비온날 버스를 탔을 때만 볼 수 있는 구경 꺼리다. 지금 내가 길을 걷는다면 첫 번째의 모습일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 여름에 비가 내리면 등굣길은 우산을 쓰지만 하굣길은 우산을 쓰지 않는다. 이날은 공식적으로 옷을 입은 채 멱을 감을 수 있으니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평소에 옷을 다 입고 멱을 감았다가는 엄마한테 저녁잠 들기 전까지는 꾸중을 들어야한다. 젖은 옷을 입고 풀밭이나 흙에 앉아서 놀다보니 옷 때가 지워지지 않으니 바로 집에 와서 옷을 갈아입든지, 옷을 벗고 물에 들어가든지 하라고 하셨다. 물에서 나와 바로 집으로 가게 되면 친구들과 놀이를 포기해야 하고, 그렇다고 초등학생이 옷을 벗고 물놀이를 할 수도 없는 내 사정을 몰라주는 엄마가 얼마나 야속한지 많이도 투덜댔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 정말 당황스러운 일은 아침 등교할 때 있었던 다리가 하굣길에 사라지고 없었다. 동네마다 있는 작은 시냇물이 모여 흐르는 큰 내를 건너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데 오전 수업하는 사이 불어난 물에 다리가 떠내려간 것이다. 이런 일이 거의 일.이년에 한 번씩은 있었던 것 같다. 이럴 때면 윗동네로 가서 거기서 되돌아오는 길을 택했다. 사정이 이정도인데도 마중 나오는 부모는 아무도 없었다. 다들 알아서 집을 찾아가야 했지만 불만도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어이없는 일이다. 홍수에 다리가 떠내려가는 일은 예전에도 종종 있어왔던 일인데 부모님이 왜 마중을 나오지 않았을까.
매일 버스를 탈 수 있는 중학생이 되었을 때의 기쁨은 내 인생 최대의 목표를 달성한 날이다. 읍내는 무엇보다 시장이 있었고 큰 문방구도 있었다. 세련된 친구들도 많았다. 매일 버스비가 필요했으니 지금껏 받아보지 못한 용돈을 받는 즐거움은 두 번째 성공인 셈이다. 물론 딱 버스비만큼만 받지만 예상치 못한 학교 준비물, 학급비 등 살짝 부풀려진 지출로 아침에 차비가 없다고하면 따질 시간이 없으니 그냥 주셨다. 간혹 엄마한테 받고 아버지로부터 또 받기도 했다. 이런 즐거움도 처음 몇 달이 지나자 지쳤다. 등교 시간대에 한 차례 뿐인 버스에는 중학교 한곳, 여고 한곳, 남고 한곳의 학생 모두 이용했었다. 매일 버스에 사람이 탑승하는 게 아니라 그냥 구겨 넣는다는 말이 맞을 것 같다. 가방은 창문으로 올리고 몸만 밀어 넣었다. 창문으로 들어간 가방은 창문으로 나왔다. 이런 상황이고 보니 가방 주인이 바뀌는 일은 빈번했다. 버스 안이 아무리 복잡해도 절대로 일어나면 안 되는 일은 교련복 입은 남고생의 하얀 운동화를 밟는 일이다. 아예 옆에 서지 않거나 서게 되면 손잡이에 매달려서라도 발을 들고 있어야했다.
추억을 되새김질하는 사이 버스는 우리 동네 근처까지 왔다. 비바람도 그치고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하면서 상가들의 간판 불이 밝혀진다. 불과 며칠 사이 상호가 바뀐 가게들이 띄엄띄엄 보인다. 가게 손님이 줄고 임대료, 유지비 등으로 보증금을 날리고 문 닫는 가게를 또 다른 희망을 품은 사람들이 새 단장해서 시작하는 경우가 너무 잦다고 부동산업을 하는 친구로부터 수시로 듣는다. 부디 경기가 좋아져서 돈을 쓰는 사람도 늘고, 더불어 버는 사람도 많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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